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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프레임에 갇힌 언론들

세상보기---------/조리혹은부조리

by 자청비 2011. 1. 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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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2시 한명숙 법정에 있던 기자들은 무얼했나
검찰 조서조작 의혹 드러났지만 보도 한줄 없어
핸드폰 통화 등 조서 핵심부분 거짓 드러나... 검찰 프레임에 갇힌 언론들

 

오마이뉴스


 

▶ 정치자금법 위반 협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4일 오후 서울 서총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3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 5일 새벽 2시쯤, 서초동 서울지방 형사법원 408호실에서는 실로 나라를 뒤흔들 만한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검찰이 한명숙 전 총리를 옭아 넣기 위해 처음부터 사건 자체를 완전히 조작했다는 정황이 핵심증인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을 통해 낱낱이 드러났던 거지요.
 

이른바 '한명숙 전 총리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의 요체는 한신건영이라는 건설회사의 한아무개 전 사장이 2007년 4월부터 8월까지 3차례에 걸쳐 3억 원씩 총 9억 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지난해 12월 21일 2차 공판에서 한 사장이 "한 총리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검찰에서의 진술은 전부 허위였다"고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완전히 뒤집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검찰은 한 사장의 구치소 접견 기록과 900통이 훨씬 넘는 서신을 샅샅이 뒤진 끝에 한 사장의 검찰에서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이날 3차 공판에 나선 것인데 재판 말미에 오히려 한 사장을 상대로 작성한 검찰조서의 핵심내용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사실이 발각된 겁니다.

 

새벽2시 법정에서 밝혀진 진실... 얼굴 새하얘진 검찰

 

조서의 핵심 부분을 요약하면 "한 사장이 2007년 3월 한 총리가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로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한 총리의 비서로부터 한 총리의 전화번호를 얻어 자신의 핸드폰에 입력한 후, 그 전화를 통해 한 총리에게 직접 정치자금 제공의사를 밝혔고, 이후 역시 그 전화를 통해 자금 수수날짜와 수수방법을 상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호인은 "2007년 상반기 여당은 민주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이었고 당시 열린우리당이 와해 상태에 빠진 후 중도통합민주당이 6월, 대통합민주신당이 8월에 창당됐고 지금의 민주당은 이것들을 통합해 이듬해 2월 비로소 창당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총리가 2007년3월 대선 경선에 나설 생각을 굳히기는커녕 민주당 자체가 겨우 소수 정당으로 존재하던 때였음을 신문 형식을 통해 밝힘으로써 그 해 3월에 벌써 '민주당 대선 경선 출마결심' 운운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가를 조목조목 논증한 것이지요.

 

검사들의 얼굴색이 새하얘질 정도로 더 놀라운 사실이 곧 이어 밝혀졌습니다.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증인의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한 사장의 핸드폰에는 그 해 8월 21일까지 한 총리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슨 전화로 3월부터 8월까지 수십 번 한 총리와 통화하면서 한 번은 길거리에서, 두 번은 자택을 찾아가 그 막대한 돈을 여행 가방에 넣어 전달했다는 말인가요. 아마 도깨비가 그리했던 게지요.

 

난 진실이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밝혀진 것에 대해 순간적으로 무척 기뻤지만 곧이어 밀려 온 분노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한 사장이 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한 것을 그대로 받아 조서로 꾸몄다면 검찰의 직무유기일 것이고 만일 검사들과 한 사장이 머리를 맞대고 꾸며낸 것이라면 이건 말 그대로 완전한 조작 아니겠습니까.

 

검찰의 조서 조작, 왜 진보언론마저 침묵했나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지난 해 말, 일본 오사카지검 특수부 주임검사가 후생노동성 공무원을 기소하면서 검찰 기소 내용에 들어맞게 압수품인 플로피 디스크의 갱신 날짜를 고친 것으로 드러난 뒤 현직 검사 3명이 징계면직과 함께 구속 기소된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이후 오사카지검 검사장과 차석검사 등 고위간부 3명이 물러난 데 이어 검찰 총수까지 사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일개 공무원이 아니라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한 조작입니다. 검찰총장 정도가 옷 벗고 끝날 일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4대강 파헤치기' '대포폰 민간인사찰' '형님-안주인 예산 날치기처리' 등으로 내공을 다져 온 정권이어서 이번 일로 붕괴되는 일까지 벌어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법무장관 사퇴, 대통령 사과까지는 있어야 할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온갖 기막힌 일들을 벌이면서도 유난히 국격을 따지며 정상적인 척하는 정권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닷새나 지난 오늘까지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못쓰게 된 것은, 또 다시 언론 때문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데 이 후안무치한 정권이 먼저 움직일 이유가 없습니다. 수구언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끼고 믿는 이른바 진보언론들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번 사건으로 깊이 깨닫게 됐습니다.

 

3차 공판을 다룬 종이신문과 인터넷 신문들을 주의 깊게 지켜봤습니다. 물론 모모하는 수구족벌 신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송은 듣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내가 신뢰하는 2개의 종이신문과 2개의 인터넷 신문 중에서 3차 공판을 보도하는 데 있어 검찰의 조서 조작을 문제 삼은 신문은 없었습니다. 한 신문과 한 인터넷 신문은 전날 저녁 늦게 기사를 마감한 후 다음날 새벽 2시에 벌어진 그 결정적인 상황에 대한 후속기사가 전혀 없었고 다른 두 매체 역시, 새벽상황에 대한 추가 보도는 했으되 시선을 전혀 다른 데 두고 있었습니다.

 

이날 공판이 휴정시간 포함 12시간을 넘긴 것이 사실이고 그중 11시간 이상을 검찰 쪽이 한 사장의 검찰에서의 진술이 법정에서 번복한 진술보다 더 신빙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집요하게 그를 신문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날 공판의 핵심은 '12시간 걸린 사상초유의 새벽재판'이거나 '검찰 추가증거 공개 놓고 공방 치열'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이날의 핵심은 12시간의 마지막 10분에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검찰의 한명숙 총리사건 조작의혹'입니다. 그것이 30년 가까이 현장에서 뛴 선배 기자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은 왜 한결같이 나와 다른 시각을 가졌던 것일까요.

 

검찰 프레임에 갇힌 기자들... 보도 한줄 없었다

 

이날 재판이 끝난 새벽 두 시 넘어서까지 법정에는 10명이 넘는 젊은 남녀 기자들이 자리를 지켰는데 그중에는 진보매체의 기자도 두세 명은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날 따라 평소보다 많은 기자들이 취재에 나섰고 그중 꽤 많은 기자들이 마지막까지 남았던 것은 아마도 검찰이 "뭔가 있다"고 사전 언질을 준 영향이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무엇'에 대한 프레임이 워낙 강력하게 기자들에게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요. 즉 '검찰의 사건조작 가능성'이 비록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정해준 프레임, 즉 이날만은 '한 총리를 꼼짝 못하게 할 결정적 증거'를 중심으로 공판진행상황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자기최면에 걸려 그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거지요.

 

◀ 정치자금법 위반 협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4일 오후 서울 서총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3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또 이른바 '조중동 프레임'도 생각해 봤습니다. 조중동이 건드리지 않는 문제는 먼저 건드릴 용기를 쉽게 내지 못하고, 고작 조중동이 설정한 범위 내에서 그들과 다른 소리 내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자족하는 협량이 이번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권력과 권위 앞에만 서면 사정없이 쫄아드는 무의식적 열패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검찰이라는 막강한 조직을 의심해야 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 또는 문제제기 후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후과에 대한 걱정이 진실을 애써 외면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 심리적 상태가 되면 지레 겁을 먹고 싸움을 피하게 되지요.

 

어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 진보언론인이 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고 말합디다. 구태여 어떤 진보적 시각을 갖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언론인이라면 지켜야 할 만국공통의 코드, 즉 정확성과 객관성, 균형성,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공정성만 꽉 움켜쥐고 있으면 얼마든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겠습니다. 조중동을 비롯, 수구신문들과 권력에 장악된 방송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행태가 얼마나 타락해 있는가를 또한 역설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가치들은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은, 진보언론인들이 그런 가치들을 지고지선으로 떠받든 채 양비양시론이나 수량적 균형론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엄중합니다. 온갖 분야가 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한명숙 전 총리를 이렇게까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사태가 지닌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진보언론인들이 수구언론과 거대 국가기관이 설정한 '악의 프레임'에 갇힌 채, 그들이 저지르는 온갖 패악질의 근본을 파헤치지 못하고 겉핥기에 그치거나, 고작 "나는 거기에서 자유롭다"는 정도로 자위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비유컨대, '깍! 깍!' 흉측한 괴성을 지르면서 먹이를 약탈하러 몰려다니는 까마귀 떼도 아니고, 한 끼를 위한 좁쌀을 찾아 할딱거리며 돌아다니는 참새 떼도 아닌, 하늘 높이 나는 매의 기상을 진보언론인들은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고하게 높이 날면서 넓게 살펴야 합니다. 저들이 확대, 축소, 왜곡하려는 것들은 물론 피하고 감추려는 것까지도 날카롭고 맹렬하게 추궁하는 그 당당한 기상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뉴스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윌리엄 화이트는 '기자가 쓰고 싶어 하는 것'이라 했고 월터 기버는 '신문 기자가 만드는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막강한 힘을 기자의 특권이 아니라 기자의 무한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진보언론인의 숙명 아닐까요. /강기석 (news) 기자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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