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기주의 혹은 회의 그리고 시지포스

읽고쓰기---------/좋은글모음

by 자청비 2008. 11. 20. 22:54

본문

 


 

나쁜 짓만 일삼으며 바쁘게 살던 어떤 남자가 사고를 당했다. 얼마 후 그가 눈을 떠서 살펴보니 온통 흰색 벽 뿐인 방안에 혼자 누워 있는게 아닌가. 오래간만의 휴식인지라 그는 아픈 것도 잊고 편안함을 만끽했다. 그러나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을 계속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갑갑해서 견딜 수 없었다. 옆에 누가 있으면 말동무 삼아 이야기라도 할텐데 아무도 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심심해서 괴로운 상태로 한참을 지난 어느날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남자는 기쁜 마음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데, 한사람도 얼씬거리지 않나요?”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지옥이야. 네 놈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중이고”

“...”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바쁘게 산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주부이든 간에 비슷한 일정을 날마다 되풀이하기 때문에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나는 휴가는 그야말로 귀한 시간으로 느껴진다. 위의 이야기는 그런 상식을 뒤집는 유머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시지포스의 신화에 있다.


시지포스(Sisypho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이다.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지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할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뜩찮은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찍힌 존재였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의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날 저녁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형인 아폴론의 소를 훔쳤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웠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이 완전 범죄를 망쳐 놓은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시지포스였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시지포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임을 일러바쳤던 것이다.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했고 이 일로 시지포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 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됐다. 도둑질을 하든지 말든지간에 어쨌든 인간이 감히 신들의 일에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눈 밖에 나 있던 차에, 뒤이어 시지포스는 더욱 결정적인 괘씸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어느 날 시지포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잠시 궁리한 끝에 시지포스는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신(降神) 아소포스를 찾아갔다. 딸 걱정에 천근같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소포스에게 시지포스는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 준다면 딸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노라 했다.


시지포스는 그 때 코린토스를 창건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코린토스에 있는 산에다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게 시지포스의 청이었다. 물줄기를 산 위로 끌어 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을 찾는 게 급했던 터라 아소포스는 시지포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시지포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위치를 가르쳐 줘 아소포스는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었고 시지포스는 갓 창건한 코린토스의 산 위로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시지포스의 이런 똑똑한 처신이 항상 이로운 결과만 갖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러바친 자가 다름아닌 시지포스였다는 것을 확인한 제우스는 저승신 타나토스(죽음)에게 당장 그 놈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보복하리라는 걸 미리 헤아리고 있던 시지포스는 타나토스가 당도하자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러자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인간들은 제멋대로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신을 우습게 여기기도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인간은 절제를 잃고 저마다 욕망에 따라 난잡한 삶을 살게 됨을 일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보이지 않게 사회질서를 잡아주는 요인이다.


명계(冥界)의 왕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의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출하게 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섰다간 온 코린토스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지포스는 이번엔 순순히 항복했다. 그런데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가면서 시지포스는 아내 멜로페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릴 것이며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일렀다. 저승에 당도한 시지포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읍소(泣訴)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이나 마찬가지이오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시지포스의 말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시지포스는 '사흘간 말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생불사하는 신이 아니라 한번 죽으면 그걸로 그만인 인간인 그로서는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도 소중했던 것이다. 하데스가 몇 번이나 타나토스를 보내 을러대기도 하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시지포스는 갖가지 말재주와 임기응변으로 체포를 피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후로 오랫동안을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별빛이 되비치는 바다와 금수초목을 안아 기르는 산과 날마다 새롭게 웃는 대지" 속에서 삶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하고 신중하다 한들 인간이 어찌 신을 이길 수 있었으랴. 마침내는 시지포스도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 명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수명에 한계가 있는 까닭이다.


명계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데스는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다. 시지포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시지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지포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 끔찍하기 짝이 없다. 언제 끝나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시지포스의 무익한 노동 앞엔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시지포스 신화는 참으로 많은 걸 시사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까뮈는 아무리 밀어올려도 끊임없이 떨어지는 바위를 계속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포스의 처지를 통해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하는 인간의 운명이 곧 시지포스이며 끝낼 수도 포기할 수도 없고 완성할 수도 없는 부조리가 삶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시지포스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지포스의 이야기는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러한 삶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 또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밀어 올리기 위해 내려가는 시지포스의 굳은 의지에서 찾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임레 케르테스도 `좌절‘이라는 소설에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위대한 작가를 꿈꾸며 고통스런 삶을 사는 주인공의 처지를 시지포스의 신화에 비유한 바 있다. 거의 가능성이 없는 희망이지만 그 희망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버텨나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지포스는 눈 앞의 목표를 위해 고통을 견디는 절망적 인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바위를 들어올린다는 일이 항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때론 힘쓸 때 고통 자체를 잊기도 하고 또한 정상에서 걸어 내려오는 시간은 그나마 쉴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일주일 중에서 여러날 일하고 하루 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지포스와 다를 게 없다. 일할 때는 모르지만 쉴 때 느끼는 편안함이 평일을 고통스러운 날로 만드는 것도 그렇다. 요컨대 시지포스는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순간 회의 또는 의지를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기쁨, 슬픔, 무료함, 분노 등등 무엇이든 현재의 느낌이 곧 삶인 셈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