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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집단사기?

세상보기---------/조리혹은부조리

by 자청비 2010. 7. 18.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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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인터넷은 집단지성 아닌 집단최면"
나치·홍위병에 비유하기도 "월드컵 열풍도 이해 안 돼"

<미디어오늘>

 

소설가 이문열씨가 "정부가 북한에 화를 냈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야당을 찍었다"는 기상천외한 분석을 내놓아 논란이 일고 있다. 이씨는 "인터넷은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최면, 심하게 말하면 집단사기, 집단선동"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인터넷 문화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인터넷으로 인한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씨는 3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천안함 침몰 사고와 관련, "충격적이었던 것은 정부 여당이 선거 패인의 큰 원인을 천안함 역주행이라고 분석한 것"이고 "이명박 정권의 독주는 다음 원인이라는 것"이라면서 "막막하더라", "울적해져 대여섯 번 술을 먹은 이유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씨는 "명백하게 의도적으로 쏴서 46명이 죽었는데도 그것에 강력하게 대응한다고 역풍이 불었다고 하니 북한이 때리는 대로 맞고 참아야 한다는 논리가 되는데 그런 나라는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아니다, 그런 대한민국은 나라가 아니다"고 최근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력감이 짓누른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씨는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세계 때문이라고나 할까, 나는 우선 월드컵 열기가 이해 안 된다"고 말했다. "가령 히틀러 시대의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결국 나치로 끝났고, 중국의 문화혁명 때도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였다는 거다. 한국에서도 2002년에는 결과가 나왔다"면서 월드컵 열풍을 나치즘의 집단광기에 비교하기도 했다.

 

 ▲ 소설가 이문열씨.

이씨는 또 "월드컵 열기가 효선·미선 추모 촛불 집회를 거쳐 결국 대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그런 거 생각하면 이번에는 뭐가 오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무엇에 대한 불안감일까. 2001년 낙선운동을 벌였던 총선시민연대를 홍위병으로 비유해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이씨는 인터넷에 대한 반감이 뿌리가 깊다. 이씨는 시민단체들이 자신의 책을 모아서 태우고 불매운동을 벌인 것과 관련, "내 소설에 대한 장례식은 소설가인 나에 대한 장례식이나 다름없다"면서 "당시 일을 통해 그들의 행동이 홍위병의 그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이씨는 2008년에는 "촛불시위는 집단난동이고 이러한 내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씨는 이날 인터뷰에서도 "인터넷의 '쌍방성'에 대해 집단적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면서 "많은 사람이 '나도 저 사람처럼 똑같이 발언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인터넷을 신뢰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쌍방성을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대다수는 일방적인 선전 선동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이씨는 "(인터넷의) 쌍방성을 누리는 사람은 이데올로기를 가진 소수, 메커니즘을 잘 이용하는 소수"라면서 "인터넷에서 발신자가 되는 사람은 전체 이용자의 5% 정도며 이 5%와 나머지 95% 사이에는 10대 1이 아니라 100대 1, 1000대 1의 불균형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쌍방성을 믿기 때문에 나도 거기 끼일 수 있다며 신뢰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흔히 인터넷이 집단지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집단최면이고 심하게 말하면 집단사기, 집단선동"이라고 직설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심지어 "(발신자들이) 부메랑을 맞게 될 때 정화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흥기와 패퇴는 상당 부분 인터넷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씨는 "현재 인터넷에 적용되는 모욕죄, 명예훼손죄 등은 만들어질 때의 상황이 지금과 전혀 다르다"면서 "피해 법익의 크기가 다르고 속도도 다르다"고 지적했다. "내 경우 인터넷으로 명예가 훼손됐을 때 매번 고소했다면 19번쯤 됐을 것"이라면서도 "비용은 비용대로 들고 소송을 통해 받아낼 수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씨의 이런 격한 반응은 존경받는 소설가에서 하루아침에 '보수꼴통'으로 낙인찍혀 유례가 없는 '책 장례식'까지 치러야했던 오래 된 상처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패배를 정부가 북한을 비판한데 대한 반감이라고 해석하거나 인터넷 공간을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소수가 주도하는 공간이라고 평가하는 건 그 상처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씨의 이 같은 발언은 단순히 이씨의 불만을 넘어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비롯해 보수진영 전반의 혼란과 불안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거센 북풍이 몰아쳤는데 상당수 유권자들은 정부의 과도한 북풍몰이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보수진영은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씨는 광장의 젊은이들을 나치나 홍위병에 비교하면서 광장의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켰다. 이씨는 광장의 문화가 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불러왔다고 지적하면서도 이를 인터넷 문화의 폐해로 평가하는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이씨가 인터넷의 역동성과 개방성, 참여의 문화에 느끼는 혼란과 불안감은 보수진영의 혼란과 두려움일 뿐이다.

 

 

'인터넷은 집단사기'라는 이문열 씨는 중세시대 성직자인가?
[기고] 공평한 담론 참여 구조가 그리도 혐오스러운가

<프레시안>

 

소설가 이문열 씨는 지난 3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터넷이 집단지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집단 최면이다. 심하게 말하면 집단 사기, 집단 선동이다"라고 네티즌을 원색 비난했다. 이 씨의 주장에 대해 미국 시라큐스대 한종우 교수(정치학)가 반론을 보내 왔다. 한 교수는 <오바마의 대선과 노무현의 대선, 그리고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근간)라는 책에서 한국과 미국의 인터넷 문화를 비교 분석하는 등 사이버 공간에서의 담론 참여에 대해 연구해 왔다. <편집자>

 

한종우 美시라큐스대 정치학 교수

 

인터넷이 집단지성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집단사기라는 비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기술이 초래한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해 한국사회에서는 그 동안 말이 많았다. 2000년 총선에서의 낙선운동, 2002년 효순·미선 사건으로 인한 반미 촛불시위와 대통령 선거, 2008년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 그리고 미네르바 구속사건은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개인에 대한 비방과 출처를 가늠키 어려운 인터넷 괴담 등 비공식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예들도 허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정보통신 기술이 만들어 낸 사이버 공간과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온 "네트워크화(networked)"된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서의 행위의 본질을 사기성으로 간주한다면 인터넷 이전의 통신 기술에 기초한 그 어떠한 담론 구조도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집필중인 글에 관한 인터뷰가 곁들여진 기사를 통해 매우 짧게 언급된 인터넷 공간과 그 공간의 담론구조에 대한 이문열 씨의 비판이기에 침소봉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인터넷 공간이 각 사회 구성원이 담론에 공평히 참여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너무 단순화된, 그리고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염두에 둔 지적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물론 새로운 공적 영역이 희망만큼이나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무력감에 대한 한 개인의 사적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어떤 정치결사체도 구성원의 공평한 담론 참여를 보장한 적은 없기 때문에 비판의 적실성이 문제되는 것이다.

 

구성원이 비교적 공평히 담론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유사한 예를 역사 속에서 찾는다면 아마도 토크빌이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발견한 자발적인 지역시민 참여활동이 될 것 같다. 참여자의 수와 공간이 제한된 미국 지역사회에서 자발적으로 토론과 행동에 참여하는 시민운동은 유럽의 구제도하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신선한 미국적 정치참여 현상이었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 풀뿌리 지역 참여활동도 이제는 상징적인 가치만을 전국적으로 공유하며 개인 수표를 끊어 정기적으로 회비나 납부하는 명목적인 회원과 이 돈으로 중앙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전국화/관료화된 중앙집권적 로비단체로 전락하고 만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지역주민들의 공고했던 유대관계는 희석되었고 시민운동은 전국화와 전문화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공평한 담론 구조에의 참여라 본다면 이는 이제 멸종위기의 동물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현대사회의 전문화·거대화 경향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정치공동체의 본질 자체가 구성원간의 제한된 유대관계에 기초한 공동체의식이 추상적으로 확장 투영된 상징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지리와 언어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던 왕조에 의해 통치당하다가, 민족에 근거한 공동체의식이 형성되면서 충성심과 소속 유대감이 공고화된 정치체제의 탄생을 근대 민족국가로 정의하자. 그러나 과연 그 정치 공동체 내의 각 개인들이 친밀히 알고 있는 믿을만한 동료 시민의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전체 인구 중 극소수에 불구할 것이다. 이렇게 근대국가 구성원들의 유대관계 자체가 극히 제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공고한 정치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정치체제의 상징화 과정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정보통신 기술과 이로 인해 형성되는 공적 영역이다.

 

일반적으로 정보통신 기술은 정보의 생산과 교환, 저장 그리고 출력에 관계된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필자는 이를 "관계의 기술(Relationship Technology)"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디지털 기술도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현재의 인터넷 이전에 비쥬얼 전신 기술이(optical telegraph) 존재했고 모르스의 전신기술로 전세계를 연결했던 19세기의 빅토리안 인터넷이 있었다. 1995년 미국 인터넷이 상업화에 성공하기 이전인 1980년 초에도 프랑스의 미니텔이라는 정보통신 네트워크가 있었다. 모두 인류사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진법의 원리, 즉 디지털 방식을 전기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이 정치체제와 그 담론구조인 공적 영역에 항상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다. 왕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이 사적 관계를 통해 중세를 통치했다면, 근대사회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가 이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대치했고 결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사회의 담론구조가 된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신흥 권력세력과 함께 기존의 담론구조 변혁을 저변에서 주도하게 되며 이에 기초한 정치세력과 권력의 역학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예를 들자면 구텐베르그의 인쇄술과 자본주의가 연합된 인쇄 자본주의(printing capitalism)의 발전으로 성경은 각 지방 언어로 출간되었고 이로 인한 변화를 기초로 중세를 지배하던 가톨릭 교리에 정면 도전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 고위 성직자들은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에 힘입어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을 사탄이 조종하는 집단사기 행각이라고 했을 법 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지워준 짝을 거부하고 다른 지역에 위치한 주례에게 전신을 통해 결혼식을 하게 됨으로써 가부장적 권위에도 도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터넷 공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갑론을박은 결국 기존의 담론구조에 입각한 정치세력과 새롭게 떠오른 네트워크화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정치세력간의 충돌로서 당연한 결과이다. 여기서 관계의 기술로서 정보통신 기술이 초래하는 변화의 힘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정보통신 기술은 선과 악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미 빅토리안 인터넷 당시 해커가 등장했고 1984년 시작된 프랑스의 미니텔 역시 포르노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당대 최고의 작가가 지적하듯 인터넷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처리 속도가 엄청나고 참여자가 합성하여 창출하는 네트워크 효과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중세 당시 100년간 처리되었던 양의 정보가 오늘날에는 하루에 소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 미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오바마 후보에게 뒤지고 있던 힐러리 상원의원이 1964년 밥 케네디 후보도 유세 중간 피살되었다며 아직 후보 사퇴 의사가 없다고 했다가 인터넷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켜 당일 오후에 사과해야만 했다. 빛의 속도로 네트워크화된 공적 영역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업화 시대의 일방적인 매스 미디어 시대의 공적 영역과 정보화 시대의 "네트워크 화"된 공적 영역의 본질적인 차이점이다.

 

필자가 2002년 한국의 대선, 2008년 소고기 재수입 파동과 촛불시위에 관해 출간한 두 편의 논문에서도 지적했다시피 모든 매체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창출하는 파급효과는 산업화 시대에 개별적으로 존재해왔던 공적 영역의 그것과 비교하기 힘들다. 물론 그 영향력은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판단의 기준은 항상 상대적이고, 종국적으로는 이로 인한 권력구조와 체계의 변화에서 오는 각 개인과 조직의 철저한 계산에 의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 공동체가 기초하고 있는 최소한의 이념적 가치기반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무정부적 파괴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대중매체와 담론구조가 우리 사회 구성원의 공평한 담론 구조 참여를 보장했는가? "대중사회 정치학"의 저자 윌리엄 콘하우저가 지적했듯이 구성원의 원자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된 대중사회에서 대중매체는 교묘히 구성원의 담론 참여를 차단해왔다. 소수 엘리트들이 대중 매체의 공적 영역을 철저히 통제함으로써(gate-keeping force) 유교의 위계적 정치문화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의 젊은 목소리와 소시민, 그리고 약자들이 정치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에 훨씬 더 다양한 견해가 표출될 수 있는 진일보한 민주적 담론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이젠 이동전화와 홈페이지만 있다면 길을 걸으면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멀티미디어 정보와 함께 송출할 수 있는 개인의 방송국 소유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하바드대 아마티아 센 교수의 정의대로 민주주의를 "요구의 체계"(demanding system)라고 한다면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이 창출해 내고 있는 네트워크화된 공적 영역은 아마도 가장 민주적인 "관계의 기술"이 되는 것이다.

 

범죄와 사기는 사회가 기초한 담론 공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 심성과 사회성의 본질적인 문제다. 악명을 떨쳤던 매도프의 6조 원에 달하는 사기 사건이야 말로 서로를 잘 아는 부호들이 얼굴을 맞대며 구축한 소위 신뢰할 만한 인간관계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는가? 미국의 패권을 흔드는데 치명적인 역할을 한 월남전 역시 통킹만 사건의 조작으로 시작되었는데 그것도 인터넷 전의 대중사회에서 대중매체에 의한 일방적인 정치조작 아니었던가?

 

신뢰의 추락과 정치조작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인류사회와 정치 공동체의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 내는 변화에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다. 지적한 대로 급속도로 근거 없는 소문이 퍼져 정치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졌다. 정보화 시대 민주주의에 경종을 울릴 만하다. 특히 한국사회가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의 정보화를 선도하고 있으며,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1990년대의 시민사회운동화로 연결되며 1990년 후반에 진행된 정보화와 맞물려 폭발적인 힘을 창출해 내고 있는 우리의 시민사회에 대한 정확하고 지혜로운 현실 인식이 절실한 때이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부작용, 특히 정치적 문제들은 그 책임을 그 공간에서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소수에게 돌리기보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사회분열과 대결을 조장하며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 시스템과 지도자들에게 돌려야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유권자들의 투표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 역시 지난 대선에서 정보통신기술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정치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간의 명암이 분명하게 갈렸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의료보험 개혁안 통과에 트위터를 적절히 사용해 대선 중에 일구어낸 자신의 지지세력을 지속적으로 유지 동원하고 있다. 트위터를 의보개혁에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올 6월 이후의 트위터 데이터를 분석한 필자의 잠정적 결론이다.

 

미국의 인터넷 그리고 사이버 공간이라 해서 문제가 없겠는가? 그렇지만 정당과 정치권 그리고 지도자들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기에 새로운 디지털 공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목소리들은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성숙한 사회적 담론 구조와 정치 기능이 제 역할을 수행한다면 관계의 기술로서의 네트워크화된 공적 영역은 정보화시대의 민주화를 선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그런 잠재력에 있어서 세계를 리드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정보화 시대의 민주주의를 리드할 세계적인 이정표를 세울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친 당파성으로 인해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과학성이 결여될 때 그 주장은 공명에 그칠뿐 아니라 상호 대립과 분열만 조장되지 않겠는가?

 


'인터넷이 집단사기?' 한종우 美교수 이문열 비판

<뉴시스>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정보화 시대의 민주주의를 리드할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한 재미 정치학자가 소설가 이문열 씨가 제기한 '인터넷 집단사기론'에 대한 반박의 글을 써 관심을 끌고 있다. 이문열 씨는 지난 3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터넷이 집단지성 이라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집단최면이다. 심하게 말하면 집단사기, 집단선동이다"라고 네티즌의 댓글 문화를 강도 높게 비난한 바 있다.

 

이에 시라큐스대 한종우 교수는 14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인터넷 담론의 공적 영역의 가치를 옹호했다. 반론이라기보다는 대안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리는 한 교수의 글은 '이문열 씨가 제기한 문제는 너무 단순화되고 이상적인 정치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형성되는 담론구조의 유익과 문제점을 균형 있게 비판하고 개선을 위한 대안들이 그야말로 공평하게 제시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이문열씨와 같은 한국최고의 지성들이 역할을 담당할 때라는 것이다.

 

한종우 교수는 "인터넷이 집단지성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집단사기라는 비판에도 동의할 수 없다"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인터넷 괴담이 문제를 일으킨다 해도 정보통신 기술이 만들어낸 사이버 공간과 네트워크화된 공적 영역 에서의 전반적인 행위를 사기성으로 간주한다면 너무 일방적이며, 인터넷 이전의 통신기술에 기초한 어떠한 담론 구조도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강조했다.

 

2002년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와 함께 시라큐스대와 북한 김책공대의 학술교류의 물꼬를 튼 한종우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새로운 네트워크 IT' 등 주목할만한 논문이 있고 '오바마의 대선과 노무현의 대선, 그리고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근간)라는 책에서 한국과 미국의 인터넷문화를 비교 분석하는 등 사이버공간에서의 담론참여에 대해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미국의 숙원사업인 의료보험개혁을 위해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이 적극적으로 활용한 트위터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지난 대선기간 중 결집된 오바마 지지자들의 사이버 공간참여와 개혁안 통과 간의 인과관계를 정치학적으로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다음은 한종우 교수와의 일문일답.

-이문열 씨의 인터넷문화 비판에 대한 반박의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개인적으로 이문열씨의 소설의 애독자이다. 그런데 길지 않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넷 담론구조에 대한 작가의 견해가 강하게 표출되면서 이 분야 강의와 연구 출판을 계속해온 학자로서 이렇게 제기된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담론구조는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변화시키는 장기적 요인이 되고 있으며 이 분야에서 한국의 정보화와 시민사회가 모델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비방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인터넷 괴담 등 비공식적으로 사회문제화되는 예들이 허다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해도 정보통신기술이 만들어낸 사이버 공간과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온 ‘네트워크화(Networked)’된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서의 행위를 사기로 간주하는 일방적인 견해는 문제가 있고 인터넷 이전의 통신기술에 기초한 그 어떠한 담론구조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집필중인 글에 관한 인터뷰에서 짧게 언급된 인터넷공간의 담론구조에 대한 비판이 선정적으로 부각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공간이 각 사회 구성원이 담론에 공평히 참여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작가의 비판은 너무 단순화되고 이상적인 정치공동체를 염두에 둔 지적이다. 현실적으로 그 어떤 정치결사체도 구성원의 공평한 담론 참여를 보장한 적이 없다. 인터넷 담론을 연구한 학자로서 비판의 적실성(的實性)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문제가 심각한건 사실 아닌가.

"동의한다. 당대 최고의 작가가 지적하듯 인터넷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중세 당시 100년간 처리된 양의 정보가 오늘날에는 하루에 소화되고 있다. 모든 매체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창출하는 파급효과는 산업화 시대에 개별적으로 존재한 공적 영역의 그것과 비교조차 하기 힘들다. 그 영향력은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판단의 기준은 항상 상대적이고 한 공동체의 가치기준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 아닌 한 각 개인과 조직의 철저한 계산에 의할 수밖에 없다. 최소의 비용으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오늘의 정보화 사회는 더욱 다양한 견해가 표출될 수 있는 진일보한 민주적 담론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범죄와 사기는 사회가 기초한 담론공간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심성과 사회성의 본질적인 문제다. 메이도프의 6조원 사기사건은 서로를 잘 아는 부호들이 얼굴을 맞대며 신뢰할만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나?

 

전세계적인 정치질서판도를 바꿨던 월남전의 경우도 그렇다. 미국의 패권을 흔드는 치명타가 된 월남전은 통킹만 사건의 조작으로 시작됐지만 인터넷시대 이전의 대중매체에 의한 일방적인 정치조작 아니었나?” 오바마 대통령의 의보개혁에 효과적으로 이용된 트위터 데이터의 흐름을 네트웤 분석의 시점에서 연구해 본 결과 소수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트윗의 흐름을 주도한 경향을 발견하였다. 작가가 지적한 불균등한 참여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 공간이 기대했던 이상적 담론구조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하나. 이를 두고 일방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매체라는 지적은 제기되지 않았다. 핵심은 이러한 매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이용되느냐이고 이러한 새로운 담론구조를 포용하는 사회와 정치권의 순기능의 여부와 그 성숙 정도에 있는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이 정치체제와 담론구조인 공적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는데.

"정보통신기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관계의 기술(Relationship Technology)’이라고 강의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디지털기술도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블로그의 전신으로 동굴벽화를 주장하기도 하며, 전기의 흐름을 이용한 모르스의 전신기술 이전에 ‘비주얼 전실기술(Optical Telegraph)’이 존재했고 모르스의 전신기술이 인류사회의 첫 인터넷이라 불리고 있는 빅토리안 인터넷을 만들어냈다. 또 1995년 WWW이 상업화에 성공하기 전인 1980년 초에도 프랑스의 미니텔이라는 정보통신 네트워크가 있었다.

 

인터넷 공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갑론을박은 결국 기존의 담론구조에 입각한 정치세력과 새롭게 떠오른 네트워크화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정치세력간의 충돌이다. 역사발전과정 상 당연한 결과이며 이를 어떻게 정치발전의 기회로 인식하느냐가 부분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 처방이 아쉬운 것이다. 이미 빅토리안 인터넷 당시 해커가 등장했고 프랑스의 미니텔 역시 포르노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벼룩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 있나?"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낸 변화에 그럼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작가가 지적한대로 근거없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정치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정보화시대가 민주주의를 훼손할 위험성은 고도의 정보 테크놀로지를 대중들이 향유하는 한국사회에서 높아진다. 그러나 한국은 전 세계의 정보화를 선도하고 있으며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90년대의 시민사회운동으로 연결되어 90년대 후반에 진행된 정보화와 맞물려 폭발적인 힘을 창출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의 부작용, 특히 정치적인 문제들은 해당공간의 정보통제자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 사회분열과 대결을 조장하며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시스템과 지도자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유권자들의 투표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도 지난 대선에서 정보통신기술이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최근 트위터 열풍 등 사이버공간의 위력이 큰 반면 상대적으로 문제는 적다. 그 이유를 뭐라고 보나.

"미국의 사이버 공간이라고 문제가 없겠는가? 하지만 정당과 정치권 그리고 지도자들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디지털 공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목소리들은 오래 가지 않는 것이다. 성숙한 사회적 담론 구조와 정치기능이 제 역할을 수행한다면 '관계의 기술'로서의 네트워크화된 공적 영역은 정보화시대의 민주화를 선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그런 잠재력에 있어서 세계를 리드하고 있다.

 

미국이 인터넷을 추진한 이유 중의 하나는 글로벌 상업네트워크를 통해 경제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우리만이 갖고 있는 정보화와 시민사회운동의 활력을 이용하여 정보화 시대의 민주주의를 선도할 뭐 이런 웅장한 구상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나?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정보화 시대의 민주주의를 리드할 세계적인 이정표를 세울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친 당파성으로 인해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과학성이 결여될 때 그 주장은 공감을 얻기는 커녕 상호 대립과 분열만 조장될 것이다."

<이 기사 주소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etc&oid=003&aid=0003345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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