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길'하면 아주 오래된 흑백영화가 생각난다.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였던 앤서니 퀸이 주연으로 나오고 원제가 La Strada The Road, 1954년 작품이다. 여기서는 영화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점점 넓어지고 여기저기 쭉쭉 뻗어가는 '도로'에 대한 짧은 생각이다. 우리나라 전역이 1일 생활권 시대가 됐다고 학교때 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전국의 생활권을 1시간30분대로 앞당긴다는 소식이다. 사통팔달 뻗어가는 도로에 차들이 넘쳐나고, 그 평탄한 길을 이용해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향한다. 처음 길을 뚫을 때 길이 좋으면 시골에서 도회지로 나가는데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시골에 더욱 많이 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는 그 반대였다. 길이 좋으니까 너도 나도 모두 도회지로 나가 살고 이따금 아주 이따금 일이 있을 때나 시골에 왔다가 그마저도 일 끝나면 휑허니 가버린다. 점심먹으러 중국집에 갔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한국일보를 펴들었다. '길'에 대한 황모 논설위원의 칼럼이 눈에 띠었다. 옮겨넣어봤다. 글을 옮기다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다른 사람의 칼럼이 눈에 띠어 보너스로 덧붙였다. 쥔장
[지평선/9월 2일] 사람 길, 화물 길
<한국일보>
지자제 실시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방방곡곡의 길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점이다. 미루나무나 플라타너스 가로수 사이로 버스가 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신작로(新作路)는 물론이고, 벌목을 위해 닦인 산골짜기의 임도(林道)까지 말끔히 포장돼 승용차로 가지 못할 곳이 드물어졌다. 멀쩡한 옛길을 옆에 두고도 새로 넓고 곧은 길을 내고, 조금만 돌아가는 고개에는 어김없이 터널을 뚫어 옛 고갯길을 관광도로로 바꾸었다. 길을 내고 넓히고 펴는 것처럼 내세우기 쉬운 자치단체장의 업적이 흔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경제적 이해까지 얽혔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편하고 빨라진 길은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기보다 해가 되는 예가 많다. 지방 종합병원이나 백화점을 비롯한 고급시장이 겪는 수요 부족이 여간 심각하지 않다. 서울이 지방 소비자까지 끌어당기는 '빨대 효과'는 부가가치가 큰 고급시장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서울의 흡인력은 이미 대전을 넘어 대구에까지 미치고, 접근성이 뛰어난 서울의 종합병원과 백화점에는 지방 소비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방 환자의 서울 유입은 교통 편의를 기준으로 서울지역 종합병원의 선호도 순위가 크게 바뀌고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 유흥업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빨라도 세시간 반은 걸렸던 고향길이 2004년 중부내륙고속도로 해당구간 개통 이후 빠르면 두 시간, 늦어도 두 시간 반으로 가까워졌다. 고향의 친구들이 일과를 마친 후 서울로 달려와 같이 한 잔 하고, 아침에 내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지방 돈이 이렇게 서울로 흘러드는 반면 지방에 떨궈야 할 서울 돈은 줄고 있다. 강원 동해안 지역을 찾는 발길과 현지에서 쓰는 돈이 줄어든 것은 굽이굽이 돌던 고갯길이 터널로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잠시 바닷바람을 쐬고 고개를 넘어와 영서에서 자는 관광객이 많다.
■ 빨라진 길이 지방의 기대를 배반한 것은 어디까지나 길을 그리 만든 사람 탓이다. 길은 사람과 물건을 나른다. 화물 수송이 빨라져 물류 비용이 줄면 지방과 서울 모두에 좋은 효과만 미친다. 적어도 개발독재 시절까지는 화물 수송에 무게중심이 놓였다. 그것이 경부고속철도 이후 사람 쪽으로 너무 기울었다. 2020년까지 전국을 한시간 반으로 묶겠다는 '고속철도망 구축전략'은 그 절정이다. 산업도로까지 승용차가 점령했어도 화물전용도로 하나 없는 실정이다. 나라를 온통 서울과 그 교외로 바꿀 게 아니라면 정말 급한 것은 화물 길이 아닐까.
[육상효 유씨씨/9월 1일] <1Q84>를 읽고서 알게 된 것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밤거리가 두 사람 주위를 야광충으로 수놓은 해류처럼 흘러갔다.','가을비 전선은 태평양 연안에 자리 잡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을 잊고 고독한 상념에 빠진 사람처럼.',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빠져 나갔다. 절망을 알게 된 사람의 잇새로 비어져 나오는 잔혹한 한숨처럼.'
보석처럼 반짝이는 비유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비유에는 사람이 겪은 삶의 모든 경험들이 동원된다. 농부는 세상을 밭갈이의 경험으로 비유하고, 대장장이는 세상을 쇠의 담금질로 비유한다. 비유의 원관념은 보조관념을 통해서 의미의 육체를 얻는다. 그 육체는 영화처럼 시각적인 것이기도 하고, 음악처럼 감정을 움직이는 기호들이기도 하고, 철학자의 책처럼 깊은 상념이기도 하다.
비유는 삶을 이해하는 아름다운 통찰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결국 현실의 모습을 허구의 틀 속에서 재생시키는 것이라면 글 쓰는 작업은 곧 현실이라는 원관념에 적절한 허구의 보조관념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것이다.
하루키의 <1Q84>에는 수천 개의 비유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이제는 노 작가라고 불려도 될 이 작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비유를 더 넓고 깊게 완성시킨다. 커피와 재즈, 유럽 소설 속의 인물들이 비유의 보조관념으로 등장할 때는 비유는 도시적이지만, 혼수상태인 아버지의 뇌 속을 아무도 살지 않고 가구마저 실려나간 빈 집으로 묘사할 때 그의 비유는 고독하다.
그의 비유는 스스로 파악한 일상의 비밀들을 독자들에게 하나하나 해독해 주는 암호이자,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긴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세상이다. 글을 쓰고 싶다면 지금 당장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무엇인가로 비유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겪은 상처들의 총합이다. 소설의 남자 주인공 덴고는 어린 시절 방송사 시청료 징수원인 아버지를 따라 시청료를 받으러 다녔다. 여자 주인공 아오마메는 부모들에 의해 어린 일상을 종교적 계율에 구속시켰다. 둘 다는 이른 독립이라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상처에 응전(應戰)한다.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그 후 두 사람의 자아를 형성시킨다.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우시카와는 못생긴 외모에 의한 상처들로 성장하고, 소도시의 간호사는 사랑의 상처로 오히려 따뜻한 심성을 갖게 된다. 모든 인물들에 작가가 상세한 주석처럼 붙인 어린 시절의 상처들은 성인이 된 인물들을 마치 단정하게 잘라진 두부 조각처럼 다른 조각들로부터 구별해낸다. 중요한 건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빚어내느냐는 것이다.
고독은 선(善)이다. 사람은 고독하다는 작가의 믿음은 이번 소설에서는 더욱 더 확고해진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거의 혼자 자고,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요리해서 밥을 먹는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섬처럼 혼자 사는 인물들의 묘사로 채워져 있다. 고독은 예외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숙명이다. 고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고 담담하다.
사랑에 이르는 남녀의 고독
사람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의 대부분은 혼자 하는 것이다. 독서, 음악, 생각, 공부. 그래서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고독한 순간들은 아름답게 보인다. 이 소설은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에는 사랑에 이르게 되는 두 남녀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이 두 사람 간의 완전하거나, 혹은 아주 강렬한 소통이라면 고독한 인물들일수록 그 사랑의 가능성은 커지는 셈이다. 그러니 고독이 사랑의 재료가 아니라 사랑이 고독의 재료인 셈이다. 고독했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가능성이 있기에 충분히 그리고 기꺼이 고독할 수 있는 것이다.
2010 대한민교 이야기 (0) | 2010.10.05 |
---|---|
자살하기 쉬운 사람, 그런 건 없다 (0) | 2010.10.05 |
제주도에 왜 특급호텔이 늘어나지 않을까 (0) | 2010.08.24 |
‘진실 속의 삶’과 과학적 양심 (0) | 2010.07.16 |
박근혜와 민주당, 만나야 한다 (0) | 2010.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