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정태춘 '아, 대한민국...' (1990)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시인의 마을]을 시작으로 무려 7장이나 앨범을 발표한 중견가수가 어느 날 비합법음반, 다시 말하여 불법음반을, 그것도 카세트테이프로 유통시킨다. 당시로선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행위였다. ‘떠나가는 배’와 ‘북한강에서’ 등의 여러 히트송을 가지고 있던 이 포크 싱어송라이터는 다른 많은 음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 즉 검열의 통제를 폐해를 몸소 체험해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인의 마을’의 노랫말을 수정 당했고, ‘인사동’ 같은 노래는 아예 발표조차 하지 못했으며, [아, 대한민국…] 역시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음악인의 자존감을 지키고, 음반에 참여한 진보성향 음악인들과 작업하며 동시대의 사회상을 비춰내길 바랐던 정태춘은 기성의 법을 거부하기로 작심한다.
이렇게 심의를 거부하고 갈색 테이프 뭉치에 노래를 담은 음반인 [아, 대한민국…]은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얼굴이 앞뒤를 장식한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함께 역사적인 작품이 된다. 부당하고 부끄러운 음반사전심의제가 한국에서 사라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저항으로 1995년에 사전심의제가 위헌판정을 받고 1996년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1997년, 두 장의 음반과 노래들은 비로소 정식으로 발매됨으로써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은 이러한 사회적 의미뿐만 아니라 음악성 또한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했기에 우리가 다시 이 노래를 불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음반 [아, 대한민국…]과 노래 ‘아,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인 문제해결을 시도한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압축된 혼란과 고통을 물려받은 이 사회의 병과 고통과 비극을 고스란히 햇볕 아래에 드러냈다. 또한 서구의 모던 포크와 달리 낭만성 위주로 치우쳐 있던 한국의 포크라는 저울에 비판정신이란 글자가 새겨진 추를 올려놓았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같은 제목을 가진 두 개의 노래가 잘 알려져 있는데, 둘의 관계는 상징적이다. 1983년에 나온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은 건전가요 모음집에 장재현과의 듀엣으로 불렸다가 차후에 정수라의 솔로음반에 삽입되어 크게 성공했다. 방송은 연일 이 노래를 틀어댔고, 각급학교에선 이 노래를 가르쳤다. 당시 대부분의 음반에 관행처럼 수록해야 했던 건전가요가 한 가수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꼭 좋은 방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회정화위원회의 의뢰로 ‘아! 대한민국’의 가사를 쓴 박건호는, ‘잊혀진 계절’(이용)과 ‘단발머리’․‘모나리자’(조용필) 그리고 ‘빙글빙글’(나미)과 ‘그녀에게 전해주오’(소방차) 등 무수한 히트송을 만든 당대의 작사가였지만, 본의 아니게 정권홍보로 이용된 노래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불명예에 대하여 해명해야만 했다. 반면에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은 완전한 반대편에 섰다. 그리고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과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은 글자 하나와 부호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닐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같은 ‘아’가 어디에선 찬탄의 감탄사로 쓰이고 어디에선 탄식의 표현이 되었고, 말줄임표(…) 하나에 깊은 침묵처럼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줬다.
정교하고 현란한 연주와 단번에 귓바퀴를 타고 넘어 들어가는 자극성이 없어 어떤 이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노래는 엄격했다. 한국사를 관통해버린 산문에 가까운 노랫말과 정태춘 특유의 창법은 그 자체로 대단히 음악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본시 어떤 앎은 불편하고 불쾌를 야기한다. 그런데 그 불편한 진실을 감동으로 승화시킨 ‘아, 대한민국…’은 비어있는 공간이라는 배경이 주제를 강화시켰고, 현실을 음악으로 끌어들이는 주된 기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글자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아, 대한민국…’을 찬찬히 듣고 읽어보는 것보다 더 나은 설명은 있기 힘들다. 생각을 더한다면, 정태춘이 이 노래를 세상에 내놓은 지 22년이 흘렀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이 노래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연표에서 중요한 지점에 놓여졌다. 하지만 이 노래는 과거만을 노래하고 있을까. 다시 한 번, 이 노래가 불려지고 22년이 흘렀음에도….
‘아, 대한민국…’은 음악이 시대와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준다. 음악인이 동시대와 어떻게 싸우고 음악의 자유가 왜 중요한지 말해준다. 그리고 그 자체로 보편성과 생명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스트리아에서 화가 클림트 등이 활동한 빈 분리파의 슬로건도 이것이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자체의 자유를’
세상을 바꾼 노래 소개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글쓴이 | 나도원 (웹진 '백비트' 편집인)
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및 장르분과장, '100비트' 편집위원, [결국, 음악]의 저자. 다양한 매체와 기관에서 다각도의 글을 쓰며 다채로운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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