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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를 반대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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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20. 11. 11.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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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조사관의 어이없는 죽음

오마이뉴스 2020.11.10.

 

[청죽통한사④] 김철호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 <편집자말>

[한지수 안치용 노수빈]

 

  반민특별재판부의 재판 광경  ⓒ 자료사진

 
반민특위는 일제 강점기 34년 11개월 동안 반민족 행위를 일삼았던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1948년에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이다. 48년 당시 제헌 국회는 친일파 처벌법 제정을 서둘렀고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법안 초안을 만들었는데, 이에 김웅진·김상돈·노일환·김명동 등 소장파 의원들이 적극적이었다.

반면 김준연 등 한민당 계열 의원들은 '거리에서 우는 사람은 배고프고 옷이 없어 우는 것이지 친일파들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며 친일청산에 미적거리는 태도를 취했다. 정부도 비슷한 입장이었으나 국회가 이미 반민법을 103대 6표로 통과시킨 뒤라 어쩔 수 없이 이를 9월 22일 대한민국 법령 제3호로 공포했다.

 

해방과 친일청산

반민법이 공포된 이후 반민특위는 중앙위원회 외에 전국 9개 도에 지역 조사부를 두었다. 중앙에서 전국의 독립운동가 출신들 위주로 특위에 적합한 인물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때 경남에서는 통영에서 태어난 김철호가 물망에 올랐다.

1901년 통영에서 태어난 김철호는 1925년 서울 협성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그해 중국으로 떠나 광둥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대학 재학 중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 출판부 책임자로 일하던 그는 1927년 10월 의열단의 밀명을 받고 극비리에 귀국했다.

김철호는 고향인 통영에서 비밀 결사를 위해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해 지하활동을 벌였고, 1929년 11월에는 '의열단 사건'의 주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다. 그와 동료들이 조선박람회 개최를 기회로 일제 주요 인물 암살과 주요 기관 파괴를 위해 공작하던 중 발각되어 서응호·윤충식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것이다. 김철호는 12월 7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에 김철호는 고향인 통영에서 충신과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이력으로 보나 해방 후의 행보로 보나, 그는 특위 위원으로 흠이 없는 인물이었다. 조국을 위해 일하며 '나라의 땀방울이 되겠다'는 김철호의 의지는 국한(國汗)이라는 그의 호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었다. 친일파 청산 정국이 시작되고 나서 그는 바로 반민특위의 경남 조사부 조사원으로 임명되고 부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
 

▲ 반민특위 조사관 임명장 반민특위 경남조사부 김철호 조사관의 임명장(1949.2.1.) ⓒ 정운현

 
1949년 1월 경남 조사부의 조직 구성이 끝나자 김철호를 비롯한 조사원들은 부산 경남도청 내에 사무실을 두고 본격적인 수사를 위한 예비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는 조선총독부 관보와 신문 등 일제 강점기의 각종 출판물과 제보된 고발 내용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김철호는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하고 일제 헌병과 친일 경찰을 집중 수사했다.

한편 이 시기에 반민특위 중앙 위원들과 반민특위 산하 특별경찰대(특경대) 또한 전국의 유명 친일파들을 우선적으로 검거하기 위해 경남에 내려와 있어 김철호는 이들과 교류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 간부 및 친일 경찰 3명을 체포한 그들은 임무를 마친 뒤 김철호와 동료들에게 활동 내용과 방법, 수사 방향을 공유했다. 예비 조사 기간을 거친 뒤 경남 조사부가 본격적인 체포 단계에 들어서면서 경남 일대에서 친일파 처단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가 고양되었다.

이러한 김철호 등의 움직임이나 민중의 열기와는 상반되게 친일 청산이란 민족적 과업에 이승만 정부는 일관되게 탐탁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지금 국회에서 이 문제(친일 청산)로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으니 지금은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오."

반민법 공포에 앞서 9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 말이다. 친일파와 미군정을 등에 업은 그는 친일파 처벌 논의를 '선동' 혹은 대한민국의 분란과 분열로 이해했다. 당시 대통령과 제헌 국회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었다. 반민법 제정 시기와 방식, 판결 기관 등 무엇에 관해서든 양자의 입장 차이는 매우 컸다. 그 격차는 끝까지 줄일 수 없었으나 반민법 공포 이전에는 어떤 법도 통과시키지 않을 듯한 국회의 강경한 기세에 밀려 정부는 최종 서명을 했고 1948년 9월 22일 반민법을 법령 제3호로 공포했다.

반민법 공포 이후에도 대통령의 '담화 정치'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는 이틀 후에 "반민자 처단은 민의, 법운영은 보복보다 개과천선토록 하라"라는 담화문을 냈다. 정부는 여론을 고려하여 반민법을 수용하면서도, 그 해석에서 정부의 입장을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친일파 반격의 징조

대통령의 연이은 강도 높은 발언과 함께 반민특위에 대한 친일 세력의 공세가 점차 노골화되었다. 한창 조사와 수사에 몰두하던 2월 김철호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책동을 체감하게 된다. 친일파를 옹호하거나 관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연판장들이 나돌았고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다.

친일파들은 '반공 국민대회'를 열어 "반민법은 일제 강점기 반장이나 동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온 국민을 친일의 그물로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라며 "이런 민족 분열의 법을 만든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공산당 프락치"라고 악을 쓰고 질렀다. 친일파들에게 반공이란 생존의 유일한 무기였다. 빨갱이 프레임을 이용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을뿐더러 반민특위를 무력화하는 데에도 더없이 유용했다.

연판장을 돌리고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반민법 위반으로 체포하고 적극적으로 반동 움직임에 대처했지만 친일파들은 조사관에게 살해 위협을 담은 협박장을 보내는 등 물러서지 않았다. 이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소란이 끊이지 않은 데 이어 심지어 중앙에서는 암살 모의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

친일 경찰로 악명 높던 최난수·홍택희·노덕술 등이 모의하여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시켜 반민특위 의원들을 암살하게 한 후 이들을 공산당의 프락치로 조작해서 북한으로 넘어가려다 사살당한 것처럼 꾸미려 했던 것이다. 실행 전에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불안해진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들은 김철호는 암살이 미수에 그친 것에 안도하면서도 친일파의 반동 강도에 놀랐지만 설마 그들의 공세에 반민특위가 무너지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반민특위 청사 ⓒ 자료사진

   
5월이 되고 경남 조사부는 부와 군으로 파견을 가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활동하는 중이었다. 철저한 조사가 우선인 것은 여전했고 조사 외에도 할 일은 넘쳐났다. 김철호는 조사를 병행하면서 피의자를 체포하고 영장 청구를 위해 중앙에 오가며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다.

체포 직후 모든 조사를 마치고 20일 안에 송치 여부를 정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동료 조사관은 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슬픔을 삭힐 시간조차 허락지 않을 만큼 모두가 오직 조사와 검거에만 몰두했고, 그 결과 중순 이후에 피의자 30여 명에 대한 파면 신청을 제출하고 중앙에 15명의 영장을 청구하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6월은 달랐다. 수십 명을 잡아내던 전 달에 비해 이 달의 성과는 체포 인원이 단 4명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해졌다. 김철호도 동료들도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중앙에서 벌어지는 일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고, 불미스러운 사건이 이상하리만큼 연달아 발생했다. 이른바 '6월 공세'가 시작됐다.

 

반민특위에 날린 치명타

6월 공세는 6월 본부 습격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사건까지가 해당된다. 발단은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이 반민특위 위협 목적의 대중 시위를 조직하던 것이 드러나 반민특위에 체포된 사건이었다.

얼마 뒤 6월 6일 한밤중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와 대통령의 묵인 하에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40명의 무장경찰들이 반민특위 본부에 들이닥쳤는데, 이것이 반민특위 본부 습격사건이다. 습격 당시 무장 경찰들이 특위 위원과 특경대원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체포 및 고문을 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친일경찰에 대한) 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자신이 직접 특경대 해산을 명령한 것'이라며 습격자들을 옹호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반민특위 활동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의회가 대립하다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이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 불리는, 49년 5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반민특위에 열성적이던 소장파 의원들을 포함한 국회의원 15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친일 청산에 앞장섰던 의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반민특위에 실질적인 타격을 날린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과 날카롭게 각을 세우던 의회와 특위는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본부 습격 후 20일 만인 6월 26일 친일 청산의 버팀목이던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것이다. 암살범은 배후에 친일파를 둔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였다. 특위를 비롯하여 그와 뜻을 함께하던 이들에게 그날은, 분단과 친일을 극복한 하나의 독립된 자주 국가를 꿈꾸던 희망과 의지가 좌절되고 마는 순간이었다.
 

  백범 김구 장례행렬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6월 공세 끝에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반민특위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결국 1949년 7월 1일 곽상훈 의원 등 친 이승만 의원 21명은 반민특위 활동 기간을 그해 8월까지로 제한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는 7월 6일 통과되었고 다음날인 7월 7일 반민특위 조사위원은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일련의 파동이 몰아친 후 김철호를 비롯한 경남 조사부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친일파를 모조리 발본색원하여 처단하려던 그들의 의지도 투지도 처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들을 더욱 무너뜨리는 것은 특위를 향한 위협이 조직의 해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말로써의 위협은 곧 그들의 몸으로 다가왔다. 예고장에 그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어처구니없게도 조사관의 집에 친일파가 침입하여 살해 위협을 가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김철호와 동료들은 시한이 만료되기 직전까지 끝없는 수사와 체포를 이어갔고, 그 결과 전국 9개 도 조사관 중 경남 조사부가 가장 뛰어난 성과를 냈다. 그러나 건수들을 정리해 중앙위원회로 전달하던 중 아슬아슬하던 활동 기간이 다 되어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결국 김철호는 일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통영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통영으로 돌아간 김철호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 남는다.

 

전쟁 발발, 반민특위원의 말로

반민특위의 해체 이후 한반도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충돌이 더 격화하였다. 매국과 애국을 가르는 기준이 '친일파냐 아니냐' 에서 '좌익이냐 아니냐'로 바뀌었다. 정부의 비호 아래 가해진 친일파의 연이은 반격에 반민특위에 몸담은 김철호는 이념상 오히려 우익에 가까웠음에도 한순간에 좌익분자로 찍히고 말았다. 그리고 6월 25일 그렇게 빨갱이가 된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고 친일파가 더욱 득세한 시기, 전쟁은 저들에게 빨갱이의 탈을 씌워 전쟁통에 싹쓸이하고자 하였다.

특위 출신 낙인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든 불안 속에 지내던 김철호는 8월의 어느 밤 자던 중에 부산스러운 인기척을 느꼈다. 눈을 뜨자 눈부신 라이트가 비치고 7명가량의 거구들의 서슬 퍼런 눈빛이 보였다.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방 밖으로, 집 밖으로 끌려 나오는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김철호의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철호가 사라지고 진상 또한 사라졌다. 부위원장이 끌려간 뒤 바다에 수장되었다, 어떤 조사관은 납북되어 숙청당했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말이 나돌았다. 진실은 알 수 없었으나 소문마다 '빨갱이'라는 단어만큼은 분명한 한가지라도 되는 양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반민특위 재판 기록 원본 ⓒ 정운현

 
김철호의 실종과 죽음, 그 배후가 좀 더 선명해진 것은 한국일보 전 논설위원 이승호가 통영 읍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해지면서부터다. 이승호의 회고록 <대지에 비가 내린다>에는 경남 특위 부위원장 K와 친일파 S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K의 초등학교 동창인 S는 언젠가 자신을 체포하러 온 K의 앞에 무릎을 꿇고, '차마 왜놈들을 거역하지 못했'다며 호소했다. K는 처자식을 봐서 살려 달라 애원하는 S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의는 선의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상황이 역전되자 S를 비롯한 그 지역 친일파들은 K를 빨갱이로 몰아갔다. 경남근현대사연구회는 이를 사실일 것으로 판단했고 여기서 K는 김철호, S는 서병두라고 설명했다. 당시 통영 헌병대 문관이던 이판석 또한 서병두와 지역의 대표 친일파들이 김철호를 모함하여 죽게 했다고 증언했다. 실패한 반민특위와 살아남은 친일파, 반공 이데올로기와 낙인, 그리고 갑작스러운 조사관의 죽음까지. 조각들을 맞춰줄 실마리는 1950년 한국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 못내 자명한 것이었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은 한마디로 '고여 있는 정치 집단'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공직을 가졌던 이들이 국정 운영의 기술자로 불리며 이미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49년, 경무에서부터 사찰 과장까지, 경찰 주요 부서에는 꼭 친일 전력의 경찰이 두루 포진했다.

아직 군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해방 직후의 남한에서 경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반대파에 대항할 기반과 여건이 불안정한 우파에게는 경찰 조직의 선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해방을 맞은 민족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장의 치안 유지에 골몰했다. 미군정과 이해가 맞은 한민당은 미군정 기간 경찰력을 상당 부분 장악했고, 남한 내의 권력 수단을 실질적으로 독점했다.

여기에 오랜 해외 생활로 인지도는 높았지만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이 손을 잡으면서 이 세력의 꼭대기에 섰다. 그는 '친일파 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하는 것이고 정부를 수립한 후 조치하는 것이 순서'라며 일단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무조건 뭉쳐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친일파는 기사회생하여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주류가 된다.
 

  일본군 출신 김창룡 육군 특무대장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 전쟁기념관

 
활동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1949년 8월 31일 공식 해체의 순간까지, 반민특위가 다룬 사건은 682건이었다. 이는 전체 7천여 건의 조사 대상 중에서 10%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408건의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221건만이 기소되었고 총 체포 인원은 305명이었다. 재판부의 판결이 내려진 사건은 40건에 불과하였는데, 거기엔 무죄 6건, 형 면제 2건이 포함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친일행위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친일파 처단의 실패는 친일파 자체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고 국가에 위협이 되는 불순분자들을 처리한다는 명목 하에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누가 진짜 빨갱이인지도 모를 민간인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김철호 같은 반민특위 조사원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친일파의 모함으로 빨갱이가 되었고 일제의 개를 잡으려다 그 이빨에 물려 죽었다. 민족을 팔아넘긴 친일파가 유일하게 영웅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반민특위가 체포한 305인의 친일 혐의자는 1950년 봄까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 한지수: 경희대학교 철학과 4학년 재학. 매체 미학에 관심이 많으며 미와 지속가능성이 양립하는 문화를 지향한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1. 김지형, 「[나의 아버지 반민특위 조사관 김철호]친일파 잡던 아버지, 친일파의 역공에 당하신 게 사실이라면」, 『민족21』, 2003.07. 2. 김지형, 「[못 다한 이야기 나의 아버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김정욱 선생: 이승만, 한밤중에 아버지 찾아와 담판 깨진 후 반민특위 습격사건 터져」, 『민족21』, 2003.07. 3. 허종, 「반민특위 경상남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5, 564-596. 2003. 4. 서희경, 「이승만의 정치 리더십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45(2), 51-71. 2011. 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한민족문화대백과, 20.10.26 조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6&docId=556458&categoryId=46626&mobile 6. "사료로 배우는 민주화 운동", 20.4.25 조회. https://contents.kdemo.or.kr/sub01/sub01_06.html, 7. 이주영, '기록 위해 30년 뛰었지만…끝내지 못한 '반민특위'', 17.9.7,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7799 8. 장슬기,"'살살 하자' 말 안 들으니 총 들고 찾아와 감투 제안, 16.8.15,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mod=news&act=articleView&idxno=13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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