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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박사 석주명과 제주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21. 9. 22.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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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한국의 파브르 나비 박사의 발자취 고스란히

석주명 연구소-옛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시험장
서귀포 토평동에 1940년대 설립…나비 등 연구
서귀포시 올해 근대문화재 신청…재조명 작업 활발

서귀포시 토평사거리 인근에 있는 석주명 연구소 모습. 옛 경성제국대학교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인 이곳에서 석주명 선생이 연구실로 사용했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일제 암흑기에 조선의 나비로 세계를 날며 우리 과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선각자.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지는 열정의 노력가세계적인 나비 박사이자 제주학의 선구자인 석주명 선생(1908~1950)의 발자취는 서귀포시 토평동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서귀포시 토평사거리 인근에 자리한 전()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는 한국의 파브르로 불리는 나비 박사 석주명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옛 경성제국대학교(현 서울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인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석주명 선생이 1943 4월부터 1945 5월까지 2 1개월 동안 연구소장으로 부임하면서다.

석주명

 

▲ 나비 박사 석주명과 제주

평양 출신인 석주명 선생은 일본 가고시마 농림학교에서 곤충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21년 졸업 후 귀국해 모교인 소도고보 교사로 부임하며 본격적으로 나비 연구를 시작했다영국왕립아시아협회 권유에 따라 1940년 우리나라 나비들의 동종이명 총 목록을 작성한 조선산 접류 총목록으로 세계적인 나비 학자로 우뚝 서게 됐다그는 이후 더욱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교사직을 버리고 경성제대의 촉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1943년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파견을 자원했다. 제주도시험장은 194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43 4월부터 1945 5월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며 나비와 곤충은 물론 제주도 방언을 연구하며 제주학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그는 제주도에서 나비를 채집해 제주산 나비류 58종을 학계에 보고했다. 아울러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을 누비며 20년간 75만여 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그의 제주 사랑은 1947 제주도방언집을 시작으로 제주도 자료집까지 여섯 권의 총서로 집대성돼 오늘날 제주학(濟州學)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석주명 선생은 제주도의 언어와 풍속에 우리나라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진정한 한국의 자태를 찾으려면 제주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옛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건물 주변을 살펴보면 선생이 연구실로 사용했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연구소 정문에서 건물에 이르는 동선을 따라 늘어선 소철과 야자수 등도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토평사거리에 있는 석주명 기념비와 흉상

 

 

업적 재조명 움직임 확산

때늦은 감은 있지만 옛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석주명 선생의 흔적을 정리해 그의 업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해 나가는 작업이 시나브로 이뤄지고 있다서귀포시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2003년 토평사거리에 기념비와 흉상을 건립했다영천동 주민들은 70여 년 전 마을의 산과 들, 계곡을 누비며 나비를 채집하며 연구에 매진했던 그의 유업을 이어받기 위해 석주명 나비길을 만들어냈다.

서귀포시는 옛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건물을 석주명 기념관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이는 제주대학교 아열대 농업생명과학연구소 신축 건물이 완공됨에 따라 2018년 1월 연구소 이전이 완료됐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이 건축물에 대한 근대문화재 신청도 하기로 했다다소 인적이 드문 이 일대를 찾아오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사업도 병행 중이다.

서귀포시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총사업비 58억원이 투입되는 영천동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통해 이 일대에 석주명 기념관, 영천공원 등을 조성하고 주거 밀집지역 교통환경 개선, 보행환경 개선 등의 사업을 벌였다서귀포시는 이 사업을 통해 토평사거리 동쪽 일대에 나비 생태원, 나비관, 숲터널, 정원, 주차장 등이 갖춰진 석주명 공원(면적 7878)을 조성하고 공원 북쪽에는 야외공연장, 쉼터, 잔디마당, 주차장을 갖춘 영천문화공원(면적 4386)과 함께 석주명 거리를 조성했다제주학의 선구자인 석주명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후대에 길이 남을 공간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구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 국가등록문화재 지정돼

문화재청은 2020년 6월 서귀포시 토평동 소재구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을 국가등록문화재 제785호로 지정했다. 해당 문화재는 약초를 재배,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시설로 당시 작성된 경성제국대학부속생약연구소시험장배치도를 통해서 건축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며, 건축물의 정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포치에 표현한 마감재의 디테일 등이 특징적이다또한 제주학 연구의 개척자로 알려진 나비박사 석주명선생이 근무(19431945)했던 곳으로서 지역사(인물)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정확한 건축 연도는 당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지만 1930년에서 석주명 선생이 부임한 1943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석주명 선생은 이곳에서 근무하며 나비와 곤충은 물론 제주도 방언을 연구하며 제주학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나비에 대한 그리움을 찾아 떠나다

 

류시화는 조용히 읊조린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석주명은 1943년 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제주도 서귀포 시험장에 파견을 자원했다. 그때까지 제주도는 채집여행이 쉽지 않아 그의 연구에서 취약지구였다. 1945년 5월에 제주도 생활을 접을 때까지 2년여 동안 제주도의 독특한 자연문화에 매료되었다. 그는 곤충채집·방언·인구·고문헌 등을 조사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포괄한 제주도 자체를 연구했다. 지역연구 혹은 융합연구의 개념의 도입이 없던 시절에 석주명은 6권의 제주도총서를 발간하여 제주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제주 방언과 다른 지역 것과 친연관계를 연구하는 것은 나비의 지역적 분포와 친연관계를 밝히는 것과 방법론상으로 동일했다.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재능은 나비 이름을 명명하는 데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현재 상용되고 있는 나비 이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재치 있고 풍부한 감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굴뚝처럼 까맣기 때문에 굴뚝나비, 반투명한 날개를 뽐내기 때문에 모시나비, 험준한 고산에서 살아서 지옥나비, 자연에서 까불대며 나는 모양 때문에 팔랑나비 등으로 명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비 연구에 평생을 바친 석주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석물결나비’라는 이름을 남겼다.

1950년 10월 6일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라는 마지막 외침을 총성 뒤로 남기고서 ‘나비 박사’ 석주명은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한국의 파브르, 위대한 과학자 석주명은 나비로 부활하여 영원히 우리 곁에 있다. 녹음이 짙푸르러가는 7월을 맞으면 석물결나비는 한라산 숲속에서 하얀 꽃을 피워낸 곰의말채나무를 방문한다. 이때 간혹 들려오는 청량한 계곡 물소리에 석물결나비는 숙연해진다. 또한 석물결나비는 자연, 인간, 과학, 문화가 융합된 밝은 미래의 제주도를 설계한다.

석주명은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면서 제자들에게도 그 말을 전했다. “남들이 하지 않은 분야에 10년간 열정을 쏟으면 반드시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되지 않도록 정성껏 가꾸어야 한다.” 석주명은 나비라는 한 분야에 자신의 삶을 투자함으로써 나비와 함께 세상을 향해 날았다. 그 결과 그의 과학정신과 탐구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보람을 선물한다. 석주명과 파브르는 남들이 도전하지 않은 분야를 평생 연구해서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파브르의 곤충기’(부제: 곤충의 본능과 습성에 관한 연구)는 장 앙리 파브르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곤충 관찰 기록을 토대로 10권으로 간행되었다. 이것은 남프랑스를 바탕으로 곤충의 생활을 정확하고 객관적이면서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집필되었다.

정호승은 나비와 꽃과 물을 되씹으면서 자연과 하나임을 표현했다. ‘물은 꽃의 눈물인가/ 꽃은 물의 눈물인가/ 물은 꽃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곤충을 탐구할 때 파브르는 ‘특유의 검정색 모자에 소박한 옷차림으로 종종 길가에 엎드려 곤충을 관찰하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인 취급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석주명은 나비를, 파브르는 곤충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 한다. 미래가 불확실한 요즘 우리도 석주명과 파브르처럼 남들이 가지 않는 독특한 분야에 열정을 투자하면 찬란한 길이 열릴 것이다. 석주명 박사가 둥지를 틀었던 곳, 서귀포시 토평동에 위치한 연구소를 중심으로 정방폭포와 불로장생의 꿈 서복전시관, 쇠소깍 등을 연결하는 일대에 특성화 분야를 개발·투자하면 석주명의 나비효과에 의해 서귀포가, 제주도가 세상을 향해 날 것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우리에게 날아와 희망의 문을 열면서 미소 지을 것이다.

 

<변종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전 제주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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