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정부 전쟁범죄 공식 사과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7. 3. 1. 19:51

본문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공화국(스르프스카) 정부는 2월 28일 지난 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무슬림 및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한 범죄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세르비아계 공화국 정부는 성명에서 "내전 당시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 친구들에게 인종에 관계없이 깊은 사과의 뜻이 전달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비(非)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한 잔혹 행위에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이날 성명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 8천명의 무슬림계 주민이 희생된 스레브레니차사건을 집단 학살로 인정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이 나온 지 이틀 만에 발표된 것이다.


 성명은 또 세르비아계 공화국 정부가 당시 범죄에 가담한 뒤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있는 용의자들을 체포하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세르비아계 정부는 그러나 보스니아 연방 내 인종들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무슬림 및 크로아티아계 지도자들도 이와 비슷한 성명을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부는 오랫동안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 내전 당시 무슬림-크로아티아계 주민들에 대한 범죄행위를 인정하지 않아왔다.


 보스니아 무슬림-크로아티아 정부는 성명에 대해 아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유엔이 ‘안전 지역’으로 선포한 피난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Srebrenica)를 세르비아군이 침공, 약 7500명의 이슬람 교도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1992년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5%, 크로아티아계 18%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고 연방을 이탈하면서 유고 연방은 와해되기 시작, 이어 1992년 세르비아계가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하면서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계간의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다.

 

보스니아의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유고로부터 독립을 원했지만, 세르비아계는 더 이상 연방이 산산히 와해돼 ‘대세르비아’가 무너져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후 벌어진 4년 동안의 보스니아 내전은 25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인구 400만명 가운데 40%가 난민화하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결국 UN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 무력에 의한 중재에 나섰다. 스레브레니차(Srebrenica)는 세르비아 군대가 점령지에 섬처럼 둘러싸인 이슬람계 거주지역이었다. 세르비아 군의 잔학한 인종청소를 막기 위해 UN 평화유지군이 안전지대로 설정, 보호하고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 발발 3년째인 1995년 7월11일, 세르비아계 군총사령관인 락토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가 스레브레니차로 진입. 이후 5일간 이슬람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2차 대전 이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인종청소를 자행한다.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한 믈라디치는 여자들을 차에 태워 이송시키며,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남자 가족들과는 나중에 만나게 해주겠다고 공지했다. 학살을 위해 주민들을 분리하는 학살의 주범, 믈라디치. 그러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믈라디치의 군대는 스레브레니차의 모든 남자들을 60대 분의 대형 트럭에 태워 처형 장소로 압송,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살육을 시작한다.

 

스레브레니차 피난 행렬을 향해 발포하는 세르비아 탱크. 희생자의 대부분은 손발이 묶이고 눈이 가리워진 채 기관총으로 난사당해 죽었고, 시신들은 불도저로 밀어 구덩이에 매장시켰다. 나중에는 총알이 떨어졌는지, 상당수의 희생자들을 그냥 불도저로 밀어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세르비아 군은 학살을 즐겼다. 이들은 점령지로부터 도망가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시키다가 죽였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코와 입술과 귀 등이 잘리는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하지 않으려 자살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피난가는 여성의 아이가 울자 시끄럽다며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이 모는 앞에서) 목을 잘라 죽이기도 했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도록 강제하고 그 장면을 즐기기도 했다.

 

이때의 학살극으로 8천명의 이슬람계 남자들이 살해된 것으로 공식 집계. 그러나 암매장 됐다가 발굴된 주검 수만 2만여구, 아직도 1만 7000여명은 실종상태로 기록됨. 이런 무시무시한 대학살극이 자행됐음에도 유엔 등 국제사회는 학살을 방관하다시피 했다. 스레브레니차에 주둔했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은 100여명에 불과했고, 세르비아의 침공 당시 지원 요청에도 아무런 응답을 보내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을 선별해 넘겨주기까지 했다.

 

2000년 3월 나치전범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유럽에서 처음으로  전범재판 법정에 회부됐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장군 라디슬라프 크르스티치는 유엔이 ‘안전지대’로 정한 이슬람계 도시인 스레브레니차를 95년 7월 세르비아군이 함락시킨 직후 지휘관에 임명돼 이슬람계를 대상으로 한 ‘인종청소작전’을 수행한 혐의를 받았다.

이와 관련해 2001.8.2 유엔 구유고전범법정(ICTY)은 ICTY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95년 스레브레니차에서 여성과 노약자를 추방한 뒤 전쟁 참여가 가능한 연령대의 보스니아 이슬람계 남자 8,000여명을 집단학살했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1995년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사건에 관련된 당시 크르스티치(53)에게 집단학살죄를 적용, 징역 46년형을 선고했다. 유럽에서 전범에게 집단학살죄가 적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이며 ICTY가 집단학살죄를 적용한 것 역시 처음이었다.

또 네덜란드 전쟁기록연구소(NIWD)가 2002년에 정부에 제출한 당시 상황보고서에서 정부가 3만여명의 난민을 지키기 위해 위험 지대에 병력을 파견하면서 수차례의 경고도 무시한 채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병력을 파견,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막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 군이 당시 대학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도 비난을 두려워해 보류하고 있었으며, 유엔 또한 ‘안전지역’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없이 임무를 맡겼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네덜란드 정부는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에 대한 자체 보고서가 나온 후 2002년 4월 16일 내각 총사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