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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7. 8. 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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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국제분쟁전문기자 김재명 박사
               <-손숙의 아주특별한 인터뷰>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戰爭史)라는 말이 있습니다. 뺏고 빼앗기고 방어하고 피 흘리면서, 인류는 발전해 왔다고요.

중국이나 인도, 페르시아 등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역사를 봐도, 그리스 로마시대를 거친 유럽 역사를 봐도 전쟁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한 켠에서는 숱한 전쟁이 이어지고 있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전쟁 없는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전쟁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 들어 있는 듯하다고요!

이렇듯, 전쟁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목숨 걸고 싸우는 소수자와 약자가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국제분쟁전문가 김재명 기자인데요.

세계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보고 느낀, 전쟁의 참담한 모습…그 갈등과 폭력의 현장 속에서의 고민들… 국제정치학 박사이자 분쟁전문 기자인 김재명 씨 모시고 7월 2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지뢰 하나 심는데 1달러, 제거는 몇 배가 들어

▶ 전쟁터를 찾아 다니려면 체력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나이에 비해서 건강한 편이에요. 저희 집에서 산이 가까워서 아침마다 가려고 하는데 술 먹고 늦게 잘 때는 못 가요.

▶ 국내에 몇 분 안 되는 국제분쟁전문가이신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국가를 다니셨죠?

대충 꼽아보면 20개 국가입니다. 전쟁이라는 개념규정이 양쪽이 대치전선을 이루고 총칼이나 대포를 쐈느냐, 또는 내전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성격이 다르겠지만 분쟁지역인 곳을 20군데 다녔습니다.

▶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97년부터예요. 중앙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여름방학, 겨울방학 등 방학 때마다 틈틈이 다녔어요.

▶ 어떤 나라들을 다녀오셨는지 기억이 나세요?

처음 간 곳은 캄보디아인데 97년에 갔어요. 물론 그 전에 중앙일보 기자 시절에도 몇 군데 다녔지만 프로페셔널 하다고 말씀 드리기는 어렵고, 97년도에 캐나다 오타와의 대인지뢰를 금지하는 국제적인 이슈가 있었을 때 캄보디아도 다녀왔죠. 캄보디아도 지뢰 때문에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어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했으니까요. 지뢰 하나를 심으려면 1달러지만 제거하는 데는 몇 배가 듭니다. 그 후에도 한 번 더 갔었고 발칸반도의 코소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중동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과 가자지구에는 여러 번 갔었어요. 또 이라크는 미국이 침공한 뒤에도 갔었고 아프가니스탄도 침공 뒤에 갔었죠. 그리고 지구상의 가장 오랜 분쟁지역 중 하나라고 하는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영토분쟁 지역인 카슈미르, 인도네시아 옆의 호주 북쪽의 작은 나라인 동아시아의 동티모르, 반란군들이 도끼로 손목을 쳐서 끔찍한 보도사진들이 많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을 겁니다. 그 외에도 남미 쪽의 볼리비아, 페루, 쿠바, 그런 곳을 다녔습니다.

▶ 가실 때는 같이 가시나요, 아니면 혼자 움직이시나요?

주로 혼자 가서 거기서 통역을 구하고, 아무래도 발이 있어야 하니까 운전기사를 구하고, 제가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는 1인 다역을 했습니다.

▶ 현재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신가요?

인터넷 매체인 프레시안의 기획위원이고 외부적으로는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성공회대학교와 국민대학교에서 국제분쟁 내전 관련한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다른 나라에도 국제분쟁전문기자들이 많이 있나요?

한국은 아무래도 제도권 언론에 소속된 기자들이 사진기자하고 짝을 이루어서 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 외에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있는데 대우도 좀 낮지요. 유럽이나 일본 같은 경우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제도가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뭔가 중요한 특종을 해 왔을 때 언론사에서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주고 삽니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고 갈 때마다 언론사 쪽과 사전에 합의를 해요. 대충 이런 정도의 취재경비가 들 것 같다, 그러면 언론사에서 플러스알파를 해서 취재 비용과 경비를 보조해 주죠. 그런 다음에 제가 현지에 가서 어쩔 때는 은행에서 카드로 현금을 빼기도 하고 그런 상황입니다.

◇ 세계 17군데가 전쟁 중...전쟁이 없었다면 숨쉬고 있을 생명들

▶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이 없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지구 어디에서는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지금 전쟁이 진행중인 곳 중에 가장 큰 곳은 이라크인가요?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라크 전쟁의 경우는 2003년 5월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주요전투는 끝났다고 선언했을 때, 이라크 주둔 미군의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이라크 상황이 안정될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4년 동안 거의 3천5백 명이 넘는 많은 미군 전사자가 생겼고 더구나 가슴 아픈 것은 이라크의 민간인들이 죽었는데 작게는 7만3천 명 정도에요. 그 숫자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살아있을 귀한 목숨들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는 17개 정도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일반인들이 잘 모릅니다. 전쟁의 정의를 1년에 사망자가 1천 명이면 전쟁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17개 정도의 지역에서 1년에 1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죽는다는 거죠.흔히 세계는 평화롭고 분쟁이라고 하면 이라크 정도, 아프가니스탄 정도, 아프리카 오지에서 부족간의 싸움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통계숫자에 잡히는 것은 1년에 엄청난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가고 있는 거죠.그러면 거기서 980명이 죽으면 전쟁이 아니냐? 전쟁이죠. 500명이 죽어도 전쟁은 전쟁이에요. 왜냐하면 500명이 전쟁이 안 일어났으면 살아있을 목숨이니까요. 그런데 워낙 전쟁의 개념을 사회과학자들은 정의하는 걸 좋아하잖아요. 전쟁의 개념을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 1천 명인데 1년에 17군데에서 벌어진다는 겁니다.

▶ 최근에 다녀오신 곳은 어디인가요?

올 초에 한 달 가까이 이란, 시리아, 레바논 3개국을 돌아보았습니다. 이란은 미국이 이란의 핵에너지 개발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서 논란이 일었죠. 미국의 강경파들은 이란을 제한적으로 폭격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란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겠다, 이를 테면 석유라는 것은 유한한 자원이고 앞으로 50년 되면 바닥이 나니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제2의 석유부국이잖아요. 이란이 석유부국이라고 하더라도 50년쯤 뒤에는 이란의 석유가 바닥을 칠 것으로 보고, 그렇다면 이란이 ‘다음 국가 에너지는 뭐가 되겠느냐, 핵에너지를 대체에너지로 개발하려고 한다’는 것이 이란의 입장이지만, 미국은 ‘그건 믿기 어렵다, 너희들도 북한처럼 핵무기를 만들려고 하는 것 아니냐’, 그래서 강경파들은 이란을 공격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와요.제가 가서 그곳의 긴장상태를 취재했어요.레바논은 작년에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1천3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죠.

◇ 웰 컴 투 이스라엘? 공항 심문만 30분

▶ 전쟁지역에서는 외신기자나 분쟁전문기자들이 오는 것을 싫어하는 나라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곳에는 취재허가증을 가져야만 들어갈 수 있나요?

일반적으로 허가증이라고 하는 것은 문서니까, 있으면 검문소 같은 곳에서 당신이 여기서 뭘 하느냐 할 때 보여주면 편의를 봐줄 수는 있죠. 하지만 그것이 취재하는 데 암행어사 마패처럼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종잇조각이죠.

그런데 제가 몇 군데 갔을 때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감추고 싶은 부분들을, 해외의 기자들이 와서 사진 찍고 보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지역들이 여러 곳 있어요. 이를 테면 이스라엘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1967년 육일전쟁 이후로 점령하고 있어요. 올해로 40년째인데 결국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어떤 한 국가가 언어와 종교가 다른 국가를, 동의해 주지 않는 거대한 민족 집단을 무력으로 누르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가 그곳이거든요. 그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유혈의 본질이죠.그래서 이스라엘의 공항에 내리면 ‘이스라엘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써 있지만 공항에 들어가면 보안요원들이 당신은 왜 왔느냐? 취재차 왔다고 하면 어딜 가려고 하느냐? 누구를 만나려고 하느냐? 이러면서 심문이 최소한 30분 이상 벌어지는데 30분 동안 인내심을 갖지 못하고 화를 내면 작은 방으로 데려가서 거기서 더욱 오랜 심문을 받아야 해요. 한두 번 그런 일을 겪으면서 오로지 도를 닦는 수준으로 인내를 가져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2004년도에 KBS 일요스페셜 팀과 같이 제가 코디네이터로 숟가락 하나만 들고 갔어요. 제가 먼저 출발했는데 방송사 팀이 나와야 할 시간보다 2시간이 지났는데 안 나오는 거예요. 비행기를 놓쳤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서로 이메일 주고받고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고 마중을 갔는데 결국 2시간 뒤에 나오더라고요.다들 피곤한 상태에요. 비행기로 여행을 오래한 상태니까 TV 기자재 들고 빨리 공항을 빠져 나와서 담배라도 피고 싶은데 거기에 붙잡혔어요. 처음에 물어볼 때 왜 이렇게 우리를 잡아두느냐? 우리는 스파이 행위를 하러 온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항의를 했던 모양이에요.그러니까 당신들 옆에 앉아있으라고 하고는 자기들 볼 일 보면서 1시간 이상을 방치해뒀다고 해요. 그런 것이 이스라엘의 입국정책에 가려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외부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국가적인 정책 때문에, 외신 기자들이 이스라엘에 가면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 취재 제한은 공습, 학살을 숨기기 위한 장치

▶ 이라크 전쟁은 어땠나요?

이라크에 갔을 때도 이라크 주둔 미군 사령부에 가서 미 군정청에서 발행하는 프레스카드를 받아서 취재를 하더라도 취재가 상당히 제한이 되어 있어요. 이를 테면 팔루자 같은 곳은 바그다드 서부의 서쪽으로 30km되는 저항세력의 본거지 중의 하나인데요. 그런 곳을 취재하려고 하면 물론 위험하기 때문에 취재기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측면도 있지만, 거기에 들어갈 경우에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이 팔루자에 가한 여러 공습, 학살 등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검문소에서 딱 막아섭니다.

▶ 그런 건 이라크군이 하나요, 미군이 하나요?

합동으로 하는데 처음에는 이라크군이 막아서다가, ‘당신들이 내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난 가서 일을 하겠다’고 하면 어딘가로 전화해서 바로 1분 안에 미군이 와서는 처음에는 취재기자의 안전을 걱정하는 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도 가겠다고 하면 ‘내가 있는 한 당신은 못 간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결론은 미군의 통제아래 있는 지역은 아무리 미 군정청에서 허가를 받았다고 해도 못 간다는 거겠죠.이건 예를 들었지만 전 세계 지역 어디든 편안하게 스키 타듯이 계획한 대로 취재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 아브그에브 감옥에서 이라크 수감자 학대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 곳에서 여러 가지 많은 사건을 접하셨다면서요?

제가 이라크에 도착해서 다음 날 아브그에브 감옥을 가봤습니다. 팔루자와 바그다드 중심부의 중간쯤에 있는 바그다드 서쪽 외곽지역에 있는데요, 아브그에브 감옥은 사담 후세인 집권 시기에는 우리나라 박정희 유신체제 때 남산 지하 고문실처럼 정치범들이 많은 고통을 받던 곳입니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는 반미 저항세력의 사람들이 갇혔고 구체적인 현장 체포자가 아니라 용의자들, 혐의자들까지 도매급으로 많이 잡혀갔어요.

앞에서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아들 또는 남편을 언제 보았는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가? 물어봤어요. 그 사람들은 몇 달 동안 보지 못하다가 모처럼 날짜를 통보 받았다고 해요. 그 전까지는 연락도 안 되고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라크의 법무부 관련한 곳에서 당신은 언제 만나러 와도 좋다고 해서 온 거예요.

제가 지금도 눈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노모(老母)에요. 노모가 며느리와 둘이 앉아서 아들 또는 남편을 기다리는데 통역을 데리고 그분들한테 가서 ‘어떻게 해서 남편과 아들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물어봤어요.대부분 이라크 날씨가 햇볕이 강하고 땡볕인데 그늘이 따로 없고 면회소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죠. 그 사람들 말이 다 사실이냐고 물으면 검증할 길은 없지만, 그 사람들의 표정이나 말로는 ‘우리 아들은 미국이 말하는 것처럼 테러리스트가 아니다’예요. 다만 나름대로 동조를 했거나 반미 저항세력의 친구였거나 아무튼 곁가지의 사람들, 이라크의 민초라고 해야겠죠. 그런 사람들의 가족들이 와서 면회를 기다리는데 없어도 될 전쟁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 저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그 사람들이 남편이나 아들의 사진을 가져와서 저한테 보여주면서 이 사람들이 내 동생이다, 남편이다, 너무 억울하다고 울기도 했습니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데, 그동안의 문명이나 문화가 파괴되는 것도 보셨을 것 같아요.

제가 이라크에 갔다가 나왔을 때, 김선일씨가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제가 있는 동안에도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았어요. 바그다드 남부의 나자프라고 시아파 성지 같은 몇 군데, 아니면 이라크 남부의 낫시리아라고 한국군 주둔부대인 서희제마부대가 있던 곳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제 통역이나 운전기사가 굉장히 몸을 사렸어요.왜냐하면 우리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반미 저항세력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 당시 일본기자들도 몇 명 납치돼서 죽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외신기자들이나 유엔 관계자들이 타고 다니는 하얀 사륜구동차를 타지 않고, 일부러 눈에 안 띄게 아주 낡은 자동차로 다녀서 행동반경에 제약이 있었어요.이라크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건물들, 관공서, 파괴돼서 버려진 이라크군의 탱크들, 포탄이 쓰레기처럼 쌓여있는 것들, 그런 모습은 봤지만 이라크의 고대 문명의 유적들이 미군의 공습에 파괴되는 것은 못 봤습니다.

TV에서 박물관이 도둑맞았다고 해서 저도 그곳에 가봤는데 그때는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어요. 이라크 사람들이 나름대로 선조들의 문명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중국 사람들이 중화문명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요. 또 올해 초에 이란에 갔을 때 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자부심처럼 이라크 사람들도 ‘우리가 한때는 문명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피 속에 흐른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런 이라크의 자존심을 미국이 합리적이거나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침범해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시아파, 수니파 할 것 없이 반미 감정이 깊다는데 저도 놀랐습니다.

◇ 나치에게 배운 민족이기주의,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해

 

▶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말 가슴이 아팠거나 속상하신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에 40년 동안 점령을 당한 팔레스타인을 여러 군데 다니면서, 억압 받는 현지 사람들의 좌절, 분노를 이해할 수 있는 현장들을 여럿 봤어요. 팔레스타인 북부에 제닌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의 한 동네를 가니까 완전히 이스라엘의 중장비, 불도저에 의해서 한 마을이 초토화가 되어 있었어요. 그 이유를 알아보니까 이스라엘군 탱크가 그 마을의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과 교전을 벌이다가 길거리에 심어놓은 대전차 지뢰를 탱크가 건드리는 바람에 이스라엘 병사 5명이 죽었다고 해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을 깔아뭉개서 그라운드 제로를 만들어버렸어요.

우리는 일제시대 때 선조들이 당했던 여러 고통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진기를 들이대는 게 미안할 때도 있어요. 그때 일본 사진기자하고 같이 갔는데 냉정하게 사진을 찍더라고요. 그 일본인한테 ‘당신은 낮에 보니까 상당히 쿨하더라. 내가 개인적으로 성향이 다른 건가? 좋게 말하면 감정이 풍부하고 나쁘게 말하면 정서가 불안한 스타일인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은 굉장히 냉정하고 차분한 스타일인 것 같다’고 했더니, 자기도 기분이 안 좋을 때는 화도 내고 슬픈 일을 보면 눈물도 흘린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그럼 낮에 어땠냐고 물으니까 ‘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찍는다’고 말해요. 그래서 우리 둘이 역사적으로 억압당했던 민족과 아닌 민족간의 차이가 아닐까 애매한 결론을 낸 적이 있어요.

▶ 독일의 나치에게 학살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왜 그런 일을 하는 걸까요?

팔레스타인의 지식인들이든 거리의 사람들이든 흔히 하는 말들이 이스라엘이 역사로부터 배운 것이 무엇인가?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교훈을 배운다는 거죠. 나치의 학살로 600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을 역사의 거울로 삼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거기서 배운 것은 나치로부터 나쁜 것만 배우고 교훈을 배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쁜 것이라는 것은 문화와 언어와 정서, 종교가 다른 타 민족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을 배웠다는 거죠. 민족끼리 공존하며 작은 지역에서 어울려 사는 조화로운 다민족 사회를 이루는 지혜를 배운 것이 아니라, 내 민족만 살겠다고 타민족을 누르는 민족이기주의를 나치한테 배운 겁니다.팔레스타인 지식인은 나름대로 정리된 말을 하고 보통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대로 이야기를 하지만,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바로는 나치는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주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치의 만행으로부터 교훈을 받지 않았다는 거죠.

이스라엘에도 평화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으로 한 뿌리다, 지금은 말도 다르고 정서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지만 한쪽은 억압자, 다른 한쪽은 피억업자로 언제까지 해결 없는 싸움을 할 것인가? 이럴 게 아니라 서로 평화와 공존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스라엘의 평화주의자들이 합니다.그래서 이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평화주의자들, 팔레스타인에도 총을 잡고 싸우겠다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쪽에 인정해 줄 것은 인정해 주면서 우리도 같이 공존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둘이 같이 공동으로 평화모임도 갖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곤 하죠. 그런데 그럴 때 지나가는 사람들 중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수의 평화주의자들을 향해서 침을 뱉습니다. 배신자라고 그러고요. 상황이 좋을 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유혈 전쟁이 잠잠할 때는 거부반응이 적지만 한쪽에서 자살폭탄테러 등이 일어날 때는 소수의 평화주의자들이 설 자리가 아무래도 좁겠죠.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한국도 ‘피의 억압’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안중근, 윤봉길 같은 의사들이 나왔어요. 팔레스타인의 큰 저항세력의 줄기가 하마스와 파타인데 그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저항의 명분이나 논리가 그 반대편 이스라엘에서 보면 테러의 논리죠. 그런데 사회과학적으로 테러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을 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사람들이 다 존경하는 선각자이자 훌륭한 지도자였죠. 그래서 우리는 안중근 의사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영어로 하면 코리안 테러리스트겠죠. 따라서 테러리스트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겁니다. A국의 테러리스트는 B국의 자유전사이고 애국자다, 이런 부분을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식인들은 인정을 합니다.왜냐하면 이스라엘 건국의 지도자들도 과거에 영국 사령부에 대해서 테러도 많이 하고 테러를 전술적인 개념으로 썼으니까요.제가 안타까운 것은 언론이 외신부나 국제부라는 이름으로 방송이나 신문에서,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생각 없이 쓰는 테러의 개념을 그대로 써서 ‘이라크 테러분자들이 미군을 공격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라크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반미 저항세력, 레지스탕스라는 개념으로 써야지 저항세력을 무조건 테러리스트라고 도매급으로 넘기는 것은 우리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우리도 피억압의 역사적인 경험이 있으니까요.

◇ 강간도 조직적인 전술로 이용될 수 있어

▶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조직적인 강간이 이루어졌다고 하던데요.

조직적인 강간전술입니다. 어떤 한 마을의 사람들을 쫓아내서 인종청소를 하자면 총으로 다 쏴 죽일 수는 없으니까, 마을의 집에 들어가서 부녀자들을 성폭행 하는 거죠. 그러면 보스니아의 경우에는 서로 간에, 교전상대국 간에, 상대 집단 간에, 그러니까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인 무슬림계가 서로 성폭행범죄를 저질렀는데 더 많이 저지른 쪽은 세르비아 쪽이죠.세르비아 쪽에서 무슬림 여성들을 강간하고 임신시키고 그럴 경우에, 종교를 따질 것도 없이 여자가 성폭행을 당할 경우에는 수치심을 느끼잖아요. 또 그 집안에서는 가문의 불명예로 여기고 따라서 그 동네를 떠나게 되죠. 그런 소문들이 퍼지게 되고.이것이 정확하게 테러죠.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게 해서 스스로 저항을 멈추고 도망치도록 하는 것이 테러 아니겠어요? 그래서 보스니아에서는 많은 무슬림 여성들이 성폭행 전술의 피해자가 되었죠.

보스니아 내전은 1990년대 전반기에 3년 8개월 동안 벌어진 유혈투쟁인데, 그런 똑같은 양상이 1999년에 코소보에 가니까 똑같은 벌어졌어요. 코소보 인구의 90%가 알바니아계 사람들 즉 무슬림이고, 10%가 세르비아계에요. 그런데 10%가 90%를 지배하는 겁니다. 종주국이 전 유고연방의 정치 중심인 벨그라드인데 세르비아계가 장악을 하고 있는 거죠. 코소보 인구가 한 200만 명 정도 되는데, 그 중의 90%인 알바니아인 무슬림들이 자치를 요구하니까 그걸 저지하는 과정에서 유혈투쟁이 벌어지고 결국 1만 명이 죽었어요.저는 나토의 공습이 78일 동안 있고 나서 나토군이 들어갈 때 나토군 탱크와 함께 코소보에 들어가서 보니까 현장이 그렇더라고요. 여성들이 강간이나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 등은 숨기잖아요. 그걸 유엔에서 NGO 여성단체들이 사람들의 심리치료나 카운슬링을 하면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들을 전해 들었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극악한 범죄들 가운데 여성들만이 당할 수 있는 범죄가 성폭력 범죄 아니겠어요. 그런 것들이 하나의 전술로서 이용되는 거죠.

▶ 그러면 강간이나 성폭행으로 인해서 생기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요?

보스니아 내전 같은 경우에는 많은 여성들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 경우에는 본인이 키우기도 하고 입양도 보내요. 어차피 태어난 목숨이니까요. 제가 본 다큐멘터리에 나온 여성 한 분은 아이를 키우더라고요. 그 과정을 증언하는데 마음이 아팠어요.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여성은 피해자이고 폭력을 가하는 군인은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데, 전쟁의 큰 틀에서 보면 그런 가해자인 병사도 희생자입니다. 요즘 현대 전쟁은 얼굴을 서로 보고 하는 전쟁이 아니잖아요. 전쟁에 동원되는 병사는 적개심에 불타서 혹은 내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으로 혹은 의무감으로 전선에 배치된 젊은이일 뿐입니다.그런 젊은이들이 큰 전쟁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정신질환도 앓게 됩니다.

◇ 납치, 마약, 손목절단... 세심한 치유과정 필요해…

▶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내전도 직접 취재하셨는데, 소년병을 만나보신 적도 있으신가요?

그 소년병도 희생양이죠. 처음에는 평범한 소년이었다가 반군에 7,8살에 납치되어서 군사훈련도 받고 여자어린아이는 허드렛일도 하고 밤에는 성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요. 전쟁을 할 때는 마약을 먹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겁니다. 거기는 마약이 흔하더라고요.반군들 쪽에 취재를 갔을 때도 반군이나 아이들도 마약을 조금씩 갖고 있어요. 반군들은 전략적으로 아이들을 이용해요. 납치된 아이들을 세뇌시켜서 자기 살던 마을을 공격하도록 만들어요. 그러면 그런 아이를 본 부모나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서 그 아이가 마을로 갈 수 없도록 만드는 거죠.

▶ 그 아이들은 자신이 그런 끔찍한 일들을 하는지 모르는 건가요?

알지요. 알지만 당시에는 그 끔찍한 일을 저질러요. 나중에는 그 기억이 강한 내성으로 머릿속에 남게 되죠. 세심한 치유과정이 필요합니다.

▶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못 돌아간다면 그 아이들은 어디로 가나요?

제가 시에라리온에 갔을 때는 전 반란군 출신의 소년병들이 고아원 같은 곳에 모여 있었어요. 그 아이들을 보살피는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님이 아프리카 선교만 30년을 하셨는데, 그분 말씀이 아이들은 아이들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전쟁의 상처를 금방 잊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체계적인 카운슬링을 통해서 나름대로 정서를 어루만져주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제가 갔을 때도 한쪽 구석에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있는 몇 명의 아이들을 봤어요. 신부님 말씀이 저런 아이들이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라고 하시더군요.

▶ 손목은 왜 절단하는 겁니까?

반군들이 정부를 지지하도록 투표한 손을 자르겠다는 거죠. 손이 없으면 투표도 못할 것이다, 굉장히 무지막지한 발상이죠. 제가 가서 놀란 것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손목을 잘린 사람들이 정확한 집계로서는 3천 명인데,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내전기간 동안에 손목을 자르나? 누가 이런 전술을 심었나 했더니, 원래는 시에라리온도 피해자였던 거예요. 벨기에가 2차 세계대전 전에 콩고를 지배했는데, 1960년에 독립을 했거든요. 콩고나 벨기에 이런 조그만 나라가 아프리카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었어요. 그 작은 나라가 거대한 식민지를 유지, 관리하려니까 공포전술을 편 거예요. 벨기에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콩고무장 세력들을 잡으면 손목을 잘랐답니다. 성기도 자르고요. 그러니까 식민지적인 유산인 거죠.

◇ 전쟁은 집단 이기의 충돌에서 빚어져

▶ 전쟁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아까도 잠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전쟁지역을 많이 다니면 인간에 대한 환멸 같은 걸 느끼실 것 같아요.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현대전쟁의 이해, 국제질서의 이해, 국제분쟁 내전 따라잡기 등을 강의해요. 주로 유혈투쟁과 전쟁, 국제분쟁, 내전 등의 용어가 많이 나오는 과목들을 강의 하면서 제가 질문을 던져요. 우리 인간이 왜 전쟁을 하는가, 교재나 참고서를 보지 말고 생각해 보자. 인간이 악해서 전쟁을 하는가, 무자비해서 전쟁을 하는가, 인간의 품성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이럴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이 전쟁을 하기에 적합한 공격적인 심성이기 때문에 인간의 탐욕 때문에 전쟁을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기들을 학생들이 하죠. 수업에 자주 빠지고 학기말 시험에 전쟁을 왜 하느냐고 쓰라고 하면 인간의 욕심에 대해서 장황하게 씁니다. 그것은 전쟁의 극히 일부 요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의 연구자들, 국제정치학자들의 일반적인 결론이죠. 그 결론을 잠시 옮긴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공격적인 본성은 아주 소수의 이유일 따름입니다.

전쟁을 하는 것은 결국, 특히 현대전쟁에서는 국가, 민족 이런 큰 정치적인 집단과 집단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해서 빚어지는 것입니다.따라서 특정 개인 즉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처럼 정치 지도자의 공격적인 성향이 전쟁의 원인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게 전쟁의 전부는 아닙니다. 독일이라는 국가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당시 그 뒤의 상황, 일본 제국주의라는 이름 아래 일어난 일본의 침략적인 구조, 그것이 전쟁을 일으킨 주요원인이지, 일본 개개인이 모두 전쟁광이라거나 나치가 다 전쟁광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맞을 수 있지만 정확한 진단은 아닙니다.

▶ 생명의 위협을 느끼신 적은 없으셨어요?

몇 번 있었는데 제가 전선에서 대포와 미사일이 오가는 대치국면에서 위험을 느낀 것은 아니고, 분쟁지역이라는 것이 지뢰밭을 걸어가듯 도처에 위험요소들이 상존해 있죠. 이라크 같은 경우는 차량폭탄 테러라는 불특정다수를 노린 위험도 있고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이스라엘군 검문소의 초병들, 군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일부 군사들이 함부로 총을 쏘기도 하고요. 매우 분개했던 게 물론 위협사격이기는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총격으로 위협을 당한 적이 2번 있었어요.지중해 해변을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는 세계최대의 감옥입니다. 이스라엘이 둘러싸서 130만 명의 인구가 오밀조밀하게 살고 있는 지역인데, 거기를 이스라엘군이 반납하기 전에 그 곳에서 총격 위협을 당했습니다. 2002년, 2004년 두 번을 겪은 일이에요.가자지구 중부에 ‘칸 유니스’라는 난민 수용소가 있어요. 팔레스타인 저항세력과 이스라엘군은 항상 총격전을 벌이는데 이스라엘군이 시야를 좋게 한다고 그쪽 주변의 건물들을 불도저로 다 뭉개버렸어요. 집을 잃은 아녀자들과 함께 가서 사진을 찍으면 한 100m 정도 떨어진 이스라엘군 초소에서 총을 쏴요. 그러면 우린 놀라서 현장을 떠나야 합니다.그게 2002년도에도 있었는데 2004년도에 KBS팀과 그곳에 갔을 때, 내가 2년 전에 이런 일을 겪었다는 말을 하는 순간 총격이 또 있었어요. 그래서 KBS팀에서 방영할 때 그 총소리를 상황을 설명하면서 방영했어요. 그런 것은 아무리 이스라엘군이 나름대로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총질해서는 안 되겠죠.

▶ 가족들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저는 죽음이라는 것은 운이 없으면 길거리 가다가 공사 중인 건물 낙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우리에게는 좋은 말이 있잖아요. “인명은 제천이다.” 처음에는 보험도 들고 했죠. 혹시나 내가 불상사를 당하면 남은 가족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겠거니 생각하고 보험도 들었는데 거듭되니까 인명은 제천이더라고요.

▶ 든든한 보호막인 신문사를 그만두고 왜 분쟁전문 기자가 되셨어요?

제가 중앙일보에 다닐 때 주로 한국현대사, 특히 8.15 이후 3년 동안의 해방 기간에 민족통일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흔히 현대사 연구자들이 말하는 중간파라고 말하는 사람들, 좌우남북협상파, 통일파죠.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니까 어차피 한국도 분쟁지역 중의 하나잖아요. 남북이 서로 170만 명의 군대가 마주하고 있고. 그렇다면 분단극복을 위해서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거울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제 관심 분야를 남북통일이라는 현대사적인 관심에서 요즘의 분단극복으로 넓힌 셈이죠.

▶ 생활은 되시나요?

나름대로 원고도 열심히 쓰고 강의도 하고 인쇄도 조금 있고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습니다.

◇ 평화는 기원이 아닌 몸으로 얻어내는 것

▶ “전쟁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목숨 걸고 싸우는 소수자와 약자가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역사적인 여러 경험들을 보면 힘은 약하지만 강국을 이긴 여러 사례들이 있죠. 우선 20세기에 알제리아가 프랑스로부터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8년 동안,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알제리아가 독립을 했잖아요. 독립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 사람들도 죽었죠.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양심으로 알제리아를 더 이상 식민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고, 여론의 압력으로 알제리아가 이겼죠. 또 베트남 등 이런 사례들을 보면 힘을 가진 강국이 항상 힘으로 결판을 낼 수는 없는 정치적인 압력이 작용합니다. 제 책 제목이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인데 여기서 평화라는 것은 로마의 평화입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로마 시대의 기원 200년 동안 전쟁이 별로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것을 로마의 평화라고 이야기하지만, 가만히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로마의 평화라고 하는 것은 로마 사람들의 평화이지 로마에 복속된 소수민족들,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평화라고 했겠는가 하는 말이죠.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미국의 평화, 또는 19세기의 영국의 평화를 말하는데 식민지였던 사람들, 인도나 파키스탄 사람들은 영국의 평화의 수혜자인가? 그건 결코 아니겠지요. 그래서 평화를 말할 때 강국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또 다른 측면은 평화는 기원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쟁취해야죠.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평화가 오기를 기도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몸으로 얻어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어디 가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중동을 한 번 더 가려고 비행기표를 예약했는데, 올 여름에는 책상에 바짝 앉아서 책을 쓰는 것으로 하고 겨울철 추울 때, 겨울 방학이 되면 다시 한번 다녀오려고 합니다.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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