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유전무죄, 무전유죄

세상보기---------/조리혹은부조리

by 자청비 2007. 9. 12. 22:41

본문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1988년 서울올림픽의 뜨거웠던 열기로 우리 사회가 들떠 있을 때 교도소를 탈옥한뒤 인질극을 벌였던 지강헌 일당들이 우리 사회에 내던진 말이다. 요즘 재벌그룹 회장들의 잇단 집행유예 판결을 보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절실하게 실감한다. 다름아닌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횡령사건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 때문이다.

 

생활고에 찌들리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한순간 돈의 유혹을 못이기고 돈 몇천원을 몇차례 훔쳤다가 꼼짝없이 상습범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한다. 또 평범한 회사원이 회사돈 몇천만원을 횡령했다가 징역형을 언도받고 수년동안 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숱하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무려 회사돈을 무려 797억원이나 횡령했으나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횡령금액으로만 봤을 때 다른 사람의 사례에 비춰본다면 무기징역감이다. 그런데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이지만 그나마 실형이라서 재벌들의 부도덕을 질타할 수 있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선고였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2심에서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 그리고 법조항에도 없는 그야말로 사회봉사명령을 선고받았다.

 

판사는 많은 비난이 예상됐지만 나름대로 많은 고심끝에 국가경제를 위해, 그리고 재력있는 사람은 재력으로 봉사하게 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판단해 그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법부가 재벌그룹에 얼마나 약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판결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고방식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 확인해준 판결이기도 하다.

 

그동안 숱한 판사들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에게 동정은 가지만 법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늘어놓았다. 그런데 이번 정 회장에 대한 판결에서는 "현대차가 위험하다, 혹은 국가경제를 위해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등의 말을 늘어놓으며 '법대로'라는 금과옥조를 내던져 버렸다.

 

하지만 국가 경제와 현대차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정 회장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놓았어야 했다. 비자금을 조성해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면서 권력과 유착한뒤 통제받지 않는 황제 경영으로 자신은 막대한 호사를 누리면서 회사와 국가경제에는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천민자본주의를 이 사회에서 완전히 걷어내야 올바르고 제대로된 경제강국을 만들 수 있다.

 

정 회장에 대한 판결로 시끌시끌하던 차에 웃기는 판결이 하나 더 추가됐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사건에 대한 2심판결이다. 1심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던 터였다. 그러나 2심판결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이었다.

 

힘없는 서민이라면 족히 3년정도의 실형을 살만한 범죄라고 한다.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쇠파이프와 전기 충격기로 무장하고 여러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렸던 보복 범죄였다. 김 회장은 직접 권투실력을 발휘해 '아구통을 돌리기도' 한데다 범죄은폐를 위해 조직적 로비로 수사를 막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법부는  "부정(父情) 운운…" 하며 자유를 주었다.

 

"김 회장의 2심 판결이 있는 날"이라고 보도하는 아침 뉴스를 보면서 '이제 곧 풀려날텐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예상이 제발 틀려주길 바랬다. 그러나 그날 오후 판결뉴스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실없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대법원 정문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본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천으로 눈을 가렸다. 저울은 분쟁을 공평하게 해결하는 것이요, 칼은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엄정하게 한다는 의미요, 눈을 가린 것은 눈에 보이는 선입견이나 주관을 배제하고 누구에게든지 공평무사하게 대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리지도 않았고 칼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정이래 사법부는 권력과 재벌의 눈치를 보면서 힘없고 권력에서 소외된 서민에게만 '법대로'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웃기는 세상을 누가 공평하다고 할 것인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정녕코 이것이 우리 사회의 참모습인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