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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문명이 재발견한 한글의 우수성

한글사랑---------/우리말바루기

by 자청비 2007. 10. 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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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문명이 재발견한 한글의 우수성

 

 

  • 한글 자모는 모두 몇 자일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알고 있는 한글 자모의 수는 24자이다. 이에 비해 컴퓨터 자판의 글쇠는 26개이다. 이 글쇠에는 변환키(shift)로 입력할 수 있는 일곱 글자(쌍자음 5개와 ㅒ,ㅖ)가 추가되어 있으니, 한글 자모는 33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반면에 천지인 방식을 따르는 휴대폰은 글쇠가 10개 밖에 없는데도 일상생활 속의 한국어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휴대폰에 있는 10개 글쇠중 7개의 글쇠는 각각 두 개의 자음을 표시하고 있으므로, 모두 17개의 한글 자모가 글쇠에 표시되어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해 영어 알파벳은 26자, 컴퓨터 글쇠나 휴대폰 글쇠나 모두 동일하다. 아마 휴대폰과 같이 조그만 디지털 기기들이 개발되지 않았으면 한글 자모가 몇 자인지 물어보는 자체가 무척 생뚱맞은 일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디지털 문명은 알파벳이라는 문자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만큼 알파벳 문자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데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글처럼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진 문자 중에서 디지털 문명에 가장 잘 적응하는 문자는 한글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이 디지털 문명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편리한 문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IT(정보기술)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에 충분하다. 타자기 시대에 한글은 한자나 가나와 같은 음절 문자보다 기계화에 유리한 점이 분명 있었지만, ‘음절 모아쓰기’라는 창제 당시의 표기법 때문에 알파벳 타자기의 효율성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한 때 한글 기계화 논쟁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혁신적 정책론으로 한글 풀어쓰기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결국 디지털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음절 모아쓰기를 자동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3벌식이니 4벌식이니 하는 타자기의 표준 논쟁도 해묵은 것이 되어 버렸다. 모음만으로 시작하는 ‘ㅏ’와 같은 음절에 음가가 없는 ‘ㅇ’을 표시하여 ‘아’로 표기하는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표기 방법이 자동 음절 모아쓰기의 핵심 알고리듬이 되어 2벌식 자판을 아무 불편 없이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등장하고부터는 한 글쇠에 3개의 낱글자가 배열되어 있는 알파벳보다 한글 입력 방식의 심리적 효율성이 우월하다는 보고도 있다.

    이와 같이 디지털 문명이 발전하면서 한글의 장점이 오히려 증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한글 창제자의 시대를 앞서가는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발상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 창제 당시 세종대왕은 기본 자음 5자(ㄱ, ㄴ, ㅁ, ㅅ, ㅇ)와 기본 모음 3자(·, ㅡ, ㅣ)를 중심으로 자음은 가획의 원리를 따르고, 모음은 합용의 원리를 따라 이를 조합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 8개의 글쇠로 모든 디지털 기기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한글을 표현할 수 있다. 얼마 전 미국 애플사의 차세대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터치에 한글 입력 기능이 없는 것을 보고 한 네티즌이 곧바로 아이팟용 한글 입력기를 개발하였다는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다. 이 한글입력기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8개의 한글 자모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글 자모의 가변성과 유연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종은 15세기 당시 세계 음운학의 중심 이론인 성운학에 정통한 대학자였다. 중국의 한자음을 정리하기 위해 발전한 성운학은 한 음절을 성과 운의 두 부분으로 분석하였다. 즉 ‘각’이라는 음절을 첫소리인 ‘ㄱ’과 나머지 소리인 ‘ ’으로 나누는 방법이다. 세종은 이와 같은 두 소리 나누기 방법 대신에 ‘각’과 같은 한 음절을 ‘ㄱ+ ㅏ+ㄱ’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방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새로 분석된 마지막 소리는 첫소리와 소리를 내는 방식과 위치가 같은 소리이므로, 글자를 새로 만들 필요 없이 첫소리를 글자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한 음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낱글자의 수를 대폭 줄이면서 1만1172개의 음절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 것은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혁명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가획의 원리와 합용의 원리가 더하여서 한글은 디지털 문명에 매우 적합한 아주 유연한 문자 체계가 될 수 있었다.

    문자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들은 한결같이 한글에 대해 인류의 위대한 지적 성취이며 지적 호사의 극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글 찬양에 대한 이런 극단적 표현들을 통해 어쩌면 한글이 다른 문자들과 달리 실용성 외에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현학적이라는 사실을 아울러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8개의 낱글자로 33개의 글쇠를 만들어내며 다시 1만1172개의 음절을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확장력이나, 발성 기관의 발음 방법을 상형하여 기본 글자를 만들고 ‘ㄱ’과 ‘ㅋ’이나 ‘ㄷ’과 ‘ㅌ’의 관계처럼 발음 방법이 같은 글자들을 형태적으로 유사하게 만든 세종의 상상력은 ‘지적 호사’라는 표현에 어울릴 만하다. 그러나 한글의 특성이 디지털 문명에 더욱 유연하게 적용되면서 한글의 이러한 특성들은 단순한 지적 호사가 아니라 필요 불가결한 장치가 되었다.

    한글이 아무리 우수한 문자라고 하더라도 단지 그 우수성만으로 디지털 문명에서 한글의 지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제반 언어들이 알파벳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알파벳을 가장 단순하게 사용하는 영어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처럼 한글이 디지털 문명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디지털 시대에 맞는 한국어 정책이 적극 지원되어야 한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1989년 개정안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데, 디지털 문명에 맞는 글쓰기 규범이 될 수 있도록 규정을 간소화하고 전자 편집에 맞는 규정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글 전용 문제와 같은 낡은 주제에 연연해하지 말고 글로벌 시대에 맞게 한글과 다른 문자와의 혼용 표기에 대한 규정도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유산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책임이다.

 <고창수 한성대 한국어문학부 교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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