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달린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 5000m, 1만 m, 마라톤 우승자 에밀 자토벡
가까스로 무더위가 물러가자 이 땅의 마라토너들이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더기로 몰려다니며 가을단풍보다 더 화려한 형형색색으로 신작로를 물들일 것이었다. 기원전 490년, 필리피데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 평원을 홀로 내달렸지만, 현대의 후계자들은 더 이상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병을 이겨내기 위해, 실패를 이겨내기 위해,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아니면 그냥 무엇인가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기꺼이 고행의 길을 간다. 이 땅에 새삼 마라톤의 열풍이 불어닥친 후, 일요일이면 이 땅에는 페르시아 군대의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산지사방을 내달린다. 그들이 왜 그렇게 달리는지 ‘당신이 마라톤을 알아?’라는 책을 통해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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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은 왠지 살면서 좀 더 고통스런 일들을 맞닥뜨렸을 때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마라톤대회에서 번호 달고 뛰게 될 것이란 느낌이 늘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겨울, 나는 충분히 괴로웠다. 일과 삶에서 쌓았던 자신감 대신 회의와 의문이 지나치게 몰려왔고, 이룬 건 없었다. 나는 어느새 서른다섯 살의 고집스런 독신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무의미하던 어느 날, 문득 마라톤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심장 광화문 한복판을 달리는 국제대회였고 때는 무르익은 봄, 3월이었다. 나의 심장도 설레다. 그래. 3월, 봄. 마라톤을 뛰고 나면, 다른 무언가도 시작될 것만 같았다. 나는 비로소 그 먼 거리를 뛰고 싶어졌고 주저 없이 결정했다. 이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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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35세의 방송작가였던 이윤정씨는 2002년 동아국제마라톤에 처녀의 몸으로 처녀 출전, 버스에 강제수거만 되지 말자는 각오로 달려 3시간 52분대에 완주했으며, 그 모습을 본 부모님은 그가 간절히 바라던 독립을 허락했다.
그러나 고통 속에는 고요함이 살아 있다. 맛볼 수 없는 성취감도. 그래, 나는 되지 않는 고시생활로 20대를 얼룩지게 했고, 30대에는 남들처럼 직장생활에 몰두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생각된 40대에 사업을 꿈꾸고 있다. 많은 이들이 나의 거취로 인해 향방이 결정되리라.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그들에 대한 내 약속이기도 하다. 고통이 클수록 성취감도 큰 법! 적어도 내 아이에겐 일그러진 이 얼굴이 아니라 힘차게 뛰어가는 아빠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 삶은 이렇게 희망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40대에 사업이라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 구윤회씨는 부도 위기에 처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의 순간, 마라톤으로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골인 후 스피드 칩을 반납하고 누워 있는 자기에게 누군가가 완주 메달을 찾아다주었을 때,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산모가 산통을 이겨내고 아이를 찾듯 메달을 보여달라고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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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씩 꼴찌들이 노란 얼굴로 기다시피 들어오고 있어요. 얼마나 장한가 생각해보세요. 3시간 반에 뛰는 사람보다 6시간에 뛰는 사람들의 노력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다음 또 다음에도 꼴찌는 서럽고 배 고프고 절름거리며 완주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처절한 고독의 승리자입니다. 꼴찌들 파이팅!
67세의 늦깎이 마라토너 조병주는 경력 3년 만에 메달 20여 개를 목에 걸었고, 그 중 두 번의 풀코스 완주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4시간대를 목표로 달린 2002년 한 마라톤대회에서 어이없게도 5시간 50분에야 거의 꼴찌로 완주하고 나서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으나, 앞으로 더 열심히 달리라는 채찍으로 생각하며 다음 대회를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과연 나이가 더해갈수록 점점 더 짧아지는 기록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0월 7일 파주의 임진각 일원에서는 ‘세계 한인의 날’ 제정 기념을 겸한 통일마라톤대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참가자는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한 1만1000여 명. 그야말로 북새통이었으나, 최근의 추세에 비추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연간 400개에 이르는 각종 마라톤대회가 전국 각처에서 개최되는데, 어지간하면 수천 명에 달하는 것은 보통이며, 소위 ‘메이저급 대회’에는 2만 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린다. 이 날 통일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구구한 사연 역시 여느 마라톤대회와 다르지 않았다.
여자 10㎞ 우승자 임우빈씨(42)는 우유 배달을 하는 냉장트럭을 운전하는 맹렬 직업여성으로, 화성 ‘싱싱축구단’의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는 축구선수이기도 하다. 2남1녀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마라톤대회 네 번째 출전 만에 난생 처음 우승컵을 안았다”며 기뻐했다. 여자 풀코스에서 1위를 차지한 김영희씨(43)는 4년 전만 해도 마라톤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우연히 마라톤 클럽에 가입한 후 이제는 아예 ‘마라톤 전도사’로 변신했다. “마라톤을 하면 힘든 고비를 이겨내고 완주하는 인내력을 배울 수 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결코 굶어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라톤 예찬론이다. 남자 5㎞ 우승자인 류태우씨(28)는 이번 마라톤대회에 출전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두 번의 교통사고를 겪었다. 오른손 손가락이 부러지고 왼쪽 무릎인대가 부분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지난해 10㎞ 우승에 이어 또 다시 시상대에 섰다. 그는 중국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주변 동료들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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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달리는가. 달리는 사람에게 그 질문은 무의미하다. ‘인간기관차’ 자토벡의 말처럼 인간이기에 달릴 수도 있고, 무엇인가에 쫓겨서 아니면 무엇인가를 쫓아서 달릴 수도 있다. 그것이 고통이든 행복이든 달리는 동안만큼은 동일하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달리는 동안 몸은 힘든데도 정신이 맑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신비로운 상태)’는 달리기의 극치다. ‘인생이 마라톤’이듯 ‘마라톤은 인생’이다. 자, 이제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자. 하지만 나는 신발끈을 고쳐 매기에도 이미 숨이 가쁘다.
통일마라톤대회에서 만난 나성배씨(58·회사원) 가족은 단란하기만 한 마라톤 가족이었다. 동갑내기인 부인 엄필남씨와, 역시 동갑내기인 아들 선권(34·회사원)·서수정씨 내외가 각기 하프, 5㎞(수정씨만 아이를 안고) 코스에 도전했고, 모두 완주했다. 손녀 호인이(20개월)가 할아버지의 2시간 15분 주파 목표를 열심히 응원했지만, 이날 나씨의 기록은 애석하게도 2시간 16분이었다. 선권씨가 가장 빠른 2시간 10분, 어머니 엄씨가 2시간 45분에야 골인했는데, 그 이유가 ‘너무 배가 고파 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건강가족 파이팅! |
<뉴스메이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