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 되기 전 궁궐 모습 첫 공개
전각들이 꽉 들어차 '정부청사'를 이뤘던 경복궁 근정전 주변, 일제가 품계석을 없애고 화단으로 만들어버린 창덕궁 정전 인정전, 지금과 달리 몸체가 받침돌 안에 맞춤하게 들어가 있는 앙부일구(세종 때 만든 해시계)….
창덕궁에 있는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845호)는 받침돌 위에 놓여 있어 몸체를 그대로 볼 수 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까. 국립중앙박물관이 27일 처음 공개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유리 원판(지금의 필름) 사진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앙부일구는 원래 받침돌에 박힌 형태여서 몸체를 다 볼 수 없었고 받침돌 옆면에 빗물이 빠지는 구멍이 있었다. 앙부일구와 받침돌이 한 세트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받침돌을 찾을 수 없다.
경복궁 자경전(보물 809호) 꽃담의 꽃무늬가 8개가 아니라 원래 9개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덕수궁으로 옮기기 전 창경궁에 있던 자격루를 비롯해 1929년 궁성이 파괴되기 전의 경복궁 동쪽 궁성과 건춘문도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의 붕괴 장면이 담긴 사진도 있다. 당시 신문은 이 문이 옆을 지나가는 전차의 진동 때문에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현재 영추문은 1975년 원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40m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졌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일행이 1922년 고국을 방문한 모습, 일제가 건청궁에 조선 총독부박물관을 짓기 위해 신도(일본 고유의 민족종교) 복장을 하고 지진제(토목공사를 할 때 땅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올리던 사진도 함께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날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 3만8000여 장 중 조선 궁궐의 모습을 담은 희귀 사진 등 500여 점을 공개했다. 유리원판은 감광제를 바른 유리판으로 셀룰로이드 롤필름이 발명되기 전까지 사진필름으로 쓰였다. 이 사진자료들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1909년∼1945년 사이 우리나라의 고적·민속·인물 등 다양한 내용을 촬영, 보관해왔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해 오던 것을 광복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게 됐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일제가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고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을 없애는 등 궁궐을 훼손하거나 파괴하기 전의 원형이 담겨 있다. 왕조시대에 궁궐은 나라의 상징이자 심장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일제는 민족정기를 훼손하기 위해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건청궁을 철거해 총독부 박물관을 건립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일제강점기가 창덕궁 인정전과 덕수궁 중화전 앞마당에 깐 박석을 없애고 화초를 심는 사진이 눈에 띈다. 이곳 마당은 문무고관들이 국왕에게 조하(임금의 즉위를 비롯한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서 임금에게 하례하던 의식)를 올리던 조선의 품격을 상징하는 곳이었는데 일제가 훼손한 것이다.
이 사진자료는 또한 과거사에 대한 논쟁이 불거질 때 확실한 증거자료로 논점을 정리하는 역할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광화문 현판이다. 어떤 글씨로 복원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던 2005년초, 박물관은 1916년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을 내놓아 글자를 판독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궁(宮)-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궁궐사진' 기획전을 28일부터 내년 2월 10일까지 연다. 국립박물관은 97년부터 유리원판을 정리해왔으며 이번에 궁 관련 사진들로 첫 전시를 열고 앞으로 매년 주제별로 사진 자료들을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신문 간추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