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가장 무서운 병이 에이즈라면, 중세에는 선페스트였다. 환자 몸이 까맣게 변한다고 해서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이름이 붙은 선페스트는 14세기 유럽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0만명 이상을 사망케 했다. 셔먼 교수는 “중세인들이 선페스트에 보인 반응은 현대인들이 에이즈에 보이는 반응과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고 지적한다. 즉 공포와 근심, 병자에 대한 편견, 잘못된 미신 등 그 질병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종 괴담만 널리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선페스트가 낳은 부산물도 있다. 중세 최초의 소설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1348년 선페스트가 유행했을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선페스트를 피해 시골 별장으로 온 남녀 10명이 제각기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데카메론’의 줄거리다.
흔히 독감이라 불리는 인플루엔자 역시 현재도 치명적인 질병이다. 사실 독감처럼 세계 곳곳에 퍼져 있고, 많은 사망자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전 세계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5000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이는 단일 질병의 유행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례다. 호사가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이유가 독감으로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아프리카 풍토병인 말라리아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적지 않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매년 3억명 이상이 말라리아에 걸리고 그중 300만명이 사망한다. 셔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말라리아였다. 유럽인들은 말라리아 치료약인 키니네를 개발했으며, 그 덕에 말라리아에 희생되지 않고 아프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기가 옮기는 황열병은 주로 선원이 걸리는 병이었다. 열대 지역을 항해하던 선원들은 고열과 근육통을 앓다 죽어가는 수수께끼 같은 병에 시달렸다. ‘황열병(Yellow Fever)’이란 이름은 환자가 발생한 배에 노란 깃발을 달던 선원들의 관습에서 생겨난 것이다. 셔먼 교수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진단을 내린다. 즉 “북반구 사람들은 부지런하지만, 남반구 사람들은 게으르고 느리다는 선입견이 생긴 것은 황열병이 북반구엔 없고 남반구에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황열병을 옮기는 모기는 북반구의 긴 겨울에는 살아남지 못한다.
식물 병인 ‘감자마름병’은 대기근 초래해 신대륙 이주 촉진
유럽 왕실의 유전병이던 혈우병과 포르피린증은 위의 전염병들과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바꿔놓았다. 셔먼 교수는 스페인 내란과 독재자 프랑코의 등장 원인을 혈우병에서 찾는다. 즉 유럽 왕실들의 근친혼으로 왕족이 잇따라 요절했고,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이 사라지면서 내전과 독재자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환각과 망상 등을 불러일으키는 정신병의 일종인 포르피린증은 영국 왕가의 유전병이었다. 포르피린증 환자였던 조지 3세는 광증 때문에 광대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이성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결국 북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영국의 가혹한 통치를 참다 못해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1776년 미국의 13개 주는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사람이 아닌 식물의 질병인 감자마름병은 가장 의외의 선택인 듯싶다. 셔먼 교수는 이 질병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현재의 미국을 탄생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를 덮친 감자마름병은 아일랜드의 식량원인 감자를 초토화했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인들은 결국 너도 나도 신대륙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리고 이들은 이민 100년 만에 아일랜드계 대통령(존 F. 케네디)을 배출할 만큼 미국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다. 아일랜드계는 현재도 미국 민주당을 이끄는 주도세력으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