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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서울의 상징 '숭례문'

세상보기---------/조리혹은부조리

by 자청비 2008. 3. 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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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랜드마크 1448~2008

 
<한겨레21>
 


조선·대한민국 일그러진 시대 흐름과 한몸
… 임진왜란 백골의 산은 ‘모던의 상징’으로



우리가 흔히 남대문이라고 부르는 숭례문의 역사는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의 어그러진 시대 흐름과 한몸이다. 궁궐과 종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나라의 가장 큰길(국중대도)인 남대문로의 기점이며, 서울역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서울의 상징이다. 조선 임금들의 바깥 행차와 피난이 시작됐던 곳, 그래서 숭례문을 벗어나면 서울을 떠났다고 했다. 서울 도심의 나들목이자 예를 받들었던 통치 질서의 관문으로서 문의 자태는 의연했고, 이 땅의 영원한 파수대와 같은 인상을 국민에게 아로새겼다.

복받은 건물, 괴이한 변고를 몰고다닌 문

숱한 병란을 견딘 꼿꼿한 자태 때문일까. 선조들은 묵향의 기록에 숱한 남대문 사적을 남겼지만, 그 자태를 그림으로 기록할 필요성은 거의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

1629년 화가 이기룡이 원로 관리들의 계 모임 잔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인 <남지기로회도>(서울대 소장)에 남대문 누각이 처음 묘사되고 있다. 전서 글씨의 제목 아래 남대문 밖 남지 연못과 수양버들, 전각 안에서 음식상 받는 관리들이 보이고 바로 아래에 조그맣게 남대문의 누각과 성곽이 있다. 이후 조선 말까지 한양 땅을 그린 ‘수선전도’ 같은 지도의 기호 외에 남대문을 상세히 묘사한 회화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숭례문이 서울의 상징이자 관문이 된 것은 전적으로 태조를 도운 개국공신 정도전(1342~98)의 업적이다. 원래 도성 터를 잡을 때 남쪽의 관악산 화기가 워낙 강해 화기를 직통으로 받는 ‘북 궁궐 남 정문’ 구도의 도시계획에는 태조나 측근인 무학대사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중국의 왕도처럼 남문으로 정문을 트자는 주장을 밀어붙였다. 유교적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개념 가운데 남쪽이자 불을 뜻하는 예를 골라, 예를 받드는 문이라는 뜻의 ‘숭례문’을 이름으로 지었다. 건물을 처음 닦은 것은 태조 7년인 1398년이었다.

남대문의 또 다른 공로자는 한글을 창제한 15세기 초의 세종이다. 세종은 태조 때 만든 원래 남대문의 지세가 낮아 도성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풍수적 기능을 못한다는 판단에 따라 인왕산 자락의 지맥과 목멱산 자락의 지맥을 잇는 구실을 하면서 관악산 화기를 막는 방벽 기능을 하도록 땅을 돋워 올렸다. 그 위에 대문을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지금 숭례문의 탄생 기점으로 삼는 세종 30년인 1448년의 일이다. 새로 돋움한 땅 위에 지었다가 지반이 다져지면서 건물이 내려앉자 성종 10년인 1479년 다시 개수하게 되는데, 이 건물이 현 숭례문의 실제 원형이 되는 셈이다.

숭례문은 원나라에서 전래된 다폿집(받침 장식인 포가 주기둥 머리 외에 기둥들 사이에도 있는 전통집 형식) 양식에 우아한 처마선과 장식이 절제된 얼개를 자랑했다. 임진왜란 전의 유일한 건축물이자 불타지 않았던 ‘복받은 건물’로 흔히 이야기한다. 하지만 조선 초부터 문은 숱한 정쟁과 괴이한 변고들을 몰고 다녔다. 서울대 규장각의 신병주 학예사는 “예치로 대변되는 왕조의 국정 이념이 직접 반영된 상징물이어서 정치적 의미가 훨씬 컸다”고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13년인 1413년 노루가 숭례문으로 뛰어 들어오는 불길한 사건이 일어나 재앙을 물리치는 제사를 문에서 벌이자는 논란이 있었으나 치르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의 추진 공약인 운하를 숭례문 앞까지 뚫자는 제안도 있어 흥미롭다. 태종 13년 좌정승 하윤 등이 용산 한강변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띄우자고 청하지만, 모래땅이고 인력 동원도 어렵다는 이유로 실행하지 않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중종 26년(1531)에는 숭례문 안에서 여자아기의 주검이 발견돼 조정에 떠들썩한 논란이 일었으나 끝내 범인을 찾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 때 이후로 원각사터에 방치된 종(오늘날 보신각종이란 설이 있다)을 내걸어 시간을 알렸다가 명종 18년인 1563년에는 불자였던 여걸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에게 압력을 넣어 왕실 기관인 내수사로 종을 빼돌린 것이 정쟁거리가 되었다.

공포 정치의 산실이자 극진한 사대의 공간

임진왜란 때 숭례문은 학살장이 된다. 왜군들이 부역에 응하지 않는 백성들을 죽여 주검을 문 앞에 쌓아 백골이 산이 되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일본군을 치러 온 명나라 응원군에게 문은 극진한 사대의 공간이었다. 명나라 원군을 부른 선조 임금은 수시로 문 밖 사신 숙소인 모화관과 관우사당에 들러 중국 사절과 장수들을 위문하고, 제례를 올렸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숭례문으로 들어왔는데, 임금이 예복을 입고 문을 나가 인근 모화관에서 칙사를 전송하고 환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618년 광해군 때는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을 몰락시킨 숭례문 흉서 사건이 터진다. 숭례문에 ‘임금을 쫓고 대장군이 온다’는 흉서가 붙었는데, 이를 붙인 역모자로 허균이 지목돼 능지처참당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그 광해군을 내쫓고 왕이 된 인조도 남대문과 악연을 간직한 왕이다. 1624년인 무장 이괄의 난 당시 피난을 떠나면서 누각에 올라 난민들의 노략질에 불타는 왕궁을 착잡한 심정으로 봐야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강화 가는 길이 끊겨 엄동설한에 운명의 남한산성행을 정한 곳도 숭례문 누각이었다. 흉년이 한창이던 인조 24년(1646)에는 숭례문이 저절로 닫히는 이변이 일어나 형조판서 조경이 임금에게 허물을 반성하라는 상소를 하기도 한다. 당쟁이 들끓던 숙종 32년인 1706년에는 숭례문 밖의 못인 남지(오늘날 대우센터 빌딩 터로 임란 뒤 말라버렸다)의 물이 붉으락푸르락 끓어 물고기가 죽었다.

18세기 초·중반 영조 시대에는 남대문이 거의 공포정치를 방불할 정도로 군주의 권위를 무시무시하게 과시했던 공간이 된다. 다혈질인 영조는 그의 정치적 반대파나 역모를 꾀한 인사들을 남대문 앞 마당으로 끌고 와 능지처참하거나 목을 베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갑옷 차림으로 숭례문 전각에 앉아 신하들을 도열하게 한 뒤 죄인을 국문하고 술을 마시며 처형 장면을 지켜보았다고 전한다.

1907년에는 일제의 군대 해산에 항거한 군인들의 항쟁이 문 주변에서 펼쳐졌다.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 부대와 울분에 찬 구한국군이 민중의 지원을 받으며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그것은 본격적인 숭례문 수난사의 서막이었다. 일왕으로는 유일하게 조선을 찾은 당시 태자 다이쇼의 입경길을 닦기 위해 문을 철거하려는 공작을 통감부에서 추진했던 것. 그러나 민심을 우려한 통감부는 대신 남북 성벽을 모조리 헐어 문의 수족을 자른다. 하지만 남대문은 일제시대 경성에서 일본인들의 거점인 남촌 부근이었기 때문에 도시계획의 핵심으로 재편됐다. 누각을 넘어 서쪽 경성역, 동쪽의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으로 빠지는 남대문로 사이에는 초가집을 헐고 일인 금융가, 백화점, 잡화점 등 근대 건축물군이 형성된다. 이후 숭례문 권역은 새 근대와 전근대의 비참이 대조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작가 박태원은 1934년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세태 소설에서 비루한 ‘남대문 지게꾼’의 둥지였던 숭례문과 ‘모던의 상징’ 서울역사를 오가면서 근대, 전근대의 풍경을 번갈아 대조하고 있다.

1907년 본격적인 수난사 서막

“…구보는 남대문을 안에서 밖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어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거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그 모양이 맥없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港口)와 친하여야 한다….”


숭례문에는 해방의 열광과 더불어 나라를 해방시킨 4대 강국의 플래카드가 물결친다. 뒤이은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인민군의 포격에 기와가 깨지고 석축의 상단 부분이 파괴됐지만, 자태를 오롯이 지켜냈다. 1950년대 중·후반 자유당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 후보의 대형 사진이 어색하게 내걸렸던 남대문은 1960년 자유당 독재를 깨부순 4월 혁명 당시 환희에 찬 청년 학생들이 계엄군의 셔먼 탱크를 타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한국전쟁 피해를 전면 보수하는 중수공사는 1961년에 착공돼 63년 5월14일에 끝난다. 당시 <대한뉴스>는 “1년10개월 만에 열린 준공식이 가랑비 속에 치러졌고, 이조시대 문무관 300여 명의 가장행렬이 펼쳐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부 문화재 애호가들은 부재를 덜어내고 교체하면서 문의 원형이 다소 왜곡되고,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하는 현판의 편액 글씨도 개칠됐다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더 큰 아쉬움은 문이 62년 국보 1호로 공식 지정되면서 울타리와 도로에 둘러싸여 도심의 섬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태평로, 남대문로, 소월길 등의 도로로 둘러싸인 채 교차로 장식 정도로 기능이 축소되고, 이런 상황이 40여 년간 계속됐다. 물론 그 사이에도 남대문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 유신 쿠데타의 탱크 행렬, 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 시위대가 모는 버스에 전경이 깔려죽는 참극을 다 지켜보았다. 87년 6월 항쟁 때는 노동자, 시민, 학생들이 남대문 석축 등을 들락날락하면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가투’를 했다.

2005년 5월 이명박 서울시장은 숭례문 잔디광장을 개방하고 다음해 누각을 제외한 홍예문까지 개방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었던 숭례문이 1세기 만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자랑했다. 불과 2년 사이 문은 국내외 관객의 나들이 명소가 된다. 2005년 감사원이 국보 지정을 재검토하면서 국보 1호를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 문의 가치가 쟁점으로 번지기도 했다. 2005년 문 부근 지표 발굴 결과 땅 밑 1.7m 지점에 원래 박석과 기단 벽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훨씬 거대하고 장중한 문이었음이 드러났다. 중구청이 뒤이어 잘린 성벽과 원래 지표면 복원을 추진해온 상황에서 숭례문은 방화범의 일격을 받았다.

지표면 복원 추진하던 중 일격을 받다

남대문 누각은 고승이 화장되는 다비식처럼 가득한 잿빛 연기 속에 사라졌다. 열반이었을까. 일본 교토의 세계적 문화유산인 긴카쿠지(금각사)의 금각 방화 사건을 바탕으로 거장 미시마 유키오는 소설 <금각사>를 썼다. 소설에서 금각의 미를 질투하는 승려 미조구치는 방화 전 이렇게 독백한다.

“…금각을 불태운다면… 교육적 효과는 각별하겠지. …단지 그냥 지속돼왔던, 550년 동안이나… 계속 (건물이)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지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

서울시민, 한국인들은 미조구치의 독백처럼 숭례문을 서울 공간의 당연한 전제로, 공기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미조구치가 말한 불안이 바야흐로 우리 사회에 시작되려고 한다. 많은 시민들이 타버린 숭례문 앞에서 묵념하고 절을 올리는 건 그런 불안과 공허를 견디기 힘든 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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