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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예술의 전당 고집하는 이유?"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8. 3. 1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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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 “예술의 전당 고집하는 이유?”
JES | 기사제공 :
 
취중토크 인터뷰를 앞두고 인순이(51·본명 김인순)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던 중 스크롤을 멈춘 건 그의 좌우명을 본 뒤였다.

'자수해서 광명찾자'. 대공시절 관공서 간판도 아니고 뭘 자수하고, 어떤 광명을 찾자는 걸까. 더블클릭하니 '거짓말은 또다른 거짓말을 낳기 때문에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는 설명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작년 유명인들의 학력 파동 당시 인터뷰를 자청해 "사실은 고등학교 입학을 못했다"고 '자수'하며 다른 행보를 걸었다. 이 일은 인순이의 좌우명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1978년 희자매로 데뷔한 지 올해로 꼭 30년. 그 동안 앞만 보고 뛰느라 친구가 없다는 그는 "예술의 전당 입성 보다 사실은 친구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한 당면 과제"라며 화통하게 웃었다.




▶예술의 전당은 자존심의 문제

인순이가 명성에 비해 인터뷰에 인색했던 건 자신을 어둡고 '구리게'만 바라보는 굴절된 시각 때문이었다. 혼혈을 극복한 성공한 가수라는 틀에 자신을 짜맞추려는 매스컴의 생리가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열 페이지를 할애하겠다는 잡지의 구애를 뒤로한 것도 그런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포장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쉰이 넘었지만 여전히 박제화를 경계했고, 두려워했다.

인순이가 요즘 새롭게 화제가 된 건 예술의 전당 입성을 놓고 벌어진 설왕설래 때문이다. 인터넷에는 '조용필은 되고 인순이는 왜 안 되냐'는 옹호론과 함께 '왜 굳이 대중 가수가 예술의 전당을 고집하냐'는 반대론까지 다양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올해 예술의 전당 측으로부터 대관신청을 거절당한 인순이는 "2009년을 기약하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왜 예술의 전당입니까.

"제 손님들에게 더 좋은 목소리와 음향을 들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조용필 선배가 1999년부터 6년간 그 무대에 서는 걸 객석에서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어요. 나도 저기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언젠가 꼭 저곳에 서겠다고 결심한 거죠."

-평소 예술의 전당은 자주 가십니까. 유료관객으로서 말이죠.

"네. 얼마 전에도 박정자 선생님이 공연한 '19 그리고 80'을 보고 왔어요. 저요, 예술의 전당 단골입니다.(웃음) 그런데 자꾸 이렇게 그쪽하고 마찰을 빚게 돼서 걱정이에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입장을 막으면 어떡하나. 그땐 변장이라도 해야 하나, 별 걱정을 다 해요."

-쟁점의 본질은 인순이씨가 상업 가수라는 것 아닌가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예술의 전당 측이 그건 아니라고 밝혔잖아요. 그 말 듣고 또 희망을 갖게 됐어요. 사실 조용필 선배도 뮤지컬 형식을 빌려 콘서트를 하신 거죠. 이제 전례도 있고, 대중가수라 안 되는 게 아니라면 이제 제가 거부돼야 할 명분이 뭔지 궁금해요. 2009년 수시 대관을 신청했고, 1년 중 공연하는 날 이틀과 장비 설치하는 날 이틀, 이렇게 4일만 빌려달라는 겁니다. 날짜도 못박지 않았고 예술의 전당에서 괜찮다는 날 공연할 겁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거위의 꿈'을 부르며 남들한테는 꿈을 이루라고 했는데 정작 제 꿈도 이루고 싶은 겁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나 야외 무대에서는 공연할 수 있잖아요.

"이왕 할 거면 메인 홀에서 하고 싶습니다. 야외 무대는 객석이 무대보다 높아서 제 키가 작아 보여요.(웃음)"

그는 부족한 레퍼토리가 대관신청 불허 이유 중 하나라는 얘기가 나오자 언성이 높아졌다. 최근 '친구여' '거위의 꿈' 등이 인기를 끌었지만 모두 리메이크 곡이었고 인순이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몇 곡 안 된다는 지적에 대해서였다.

"해외 뮤지션들은 몇 년에 한번씩 앨범을 내지만 세계 투어 공연까지 다닙니다. 레퍼토리를 내세우는 건 또 하나의 트집을 잡겠다는 것밖에 안 돼요. 물론 예술의 전당에 서려면 당연히 자신의 히트곡이 많아야죠. 남의 노래만 부를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순이가 30년동안 남의 노래만 부른 건 아니잖아요."

내친 김에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더 했다. 인순이와 소속사가 30주년 공연 홍보를 앞두고 예술의 전당 문제를 끌어들였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저도 그 얘기 들었는데 한마디로 기가 막혔어요. 사실 저는 만으로 계산해 작년이 30주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소속사에서 올해가 30주년이고 이 무대를 건너뛸 수 없다고 저를 설득했어요. 나중에 안 건데 제 의견도 묻지 않고 4월 3~4일 세종문화회관 대관 신청도 해놓았더라고요. 인순이는 그렇게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작업(?) 방지용 결혼반지

"본의 아니게 투사가 됐다"는 인순이는 "예술의 전당이 공연을 허락한다 해도 처음 기대처럼 흥겹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높은 진입장벽과 문턱 때문에 기력이 쇠진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 참에 새로 출범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000석짜리 오막집(전용공연장) 하나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인순이씨 공연은 게스트가 없는 걸로도 유명한데 이유가 뭡니까.

"원래 대가들은 그래요. 너무 잘난 척인가.(웃음) 사실 게스트를 부르고 싶어도 미안해서 후배들을 못 불러요. 다들 바쁘잖아요. 작년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할 때 와준 DJ DOC와 조PD가 유일한 게스트였죠."

-가창력이 뛰어나거나 칭찬해주고 싶은 후배가 있나요.

"많죠. 나이 드니까 후배들한테 참 많이 관대해져요. 아무리 못해도 저보다 잘하는 구석이 하나 이상은 꼭 있더라고요.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는 말도 있잖아요."

 

“한때 한국남자와 결혼 포기”





78년 '실버들'이라는 노래로 등장한 희자매의 다른 두 멤버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재희씨는 서울 반포에, 영숙씨는 하와이에서 산다고 했다. 둘다 외국인과 결혼했고, 자신만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을 지키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해 했다. 그는 94년 박경배씨와 화촉을 밝혔고, 중학교 2학년인 딸을 하나 두고 있다.

-프로필에 남편이 대학교수로 기재돼 있던대요.

"아직 정교수는 아니예요. 경희대 출신인데 외국에서 골프 칼리지를 수료했고, 지금은 모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지요. 골프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과 골프클럽 수리 등 골프에 대한 전반을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92년 강릉으로 가다가 차가 뒤집히는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 사고를 계기로 인생을 돌아보게 됐죠. 이렇게 죽으면 신문 귀퉁이에 부고 기사가 나고 사람들에게 잊혀지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엄청 허무한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누군가를 붙잡고 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때 눈에 띈 게 남편이었죠. 친구들이나 가족과 달리 냉정하고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고 이주일 선배님의 재무 담당이었는데 저보다 네 살 연하였어요."

그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반지는 결혼 반지라고 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누가 작업할까봐 임자 있는 몸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반지를 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인생의 카운셀러가 동반자가 된 거였군요. 남편이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나요.

"유치하면서도 감동적이었어요. 어느날 '한 이불을 덮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결혼할 줄 알았으면 제가 만났던 남자 얘기를 안 했을 텐데. 제 비밀을 너무 많이 노출시켰어요.(웃음) 데이트 시절 우리가 자주 불렀던 '아껴둔 우리 사랑을 위해'를 라디오에서 자주 불렀는데 그때마다 세인 아빠가 감명 받았어요."

한국 남자와의 결혼을 자의 반 타의 반 포기하고 살았지만 남편은 그의 이런 생각을 고치게 해준 관제탑 역할을 해줬다. 결혼을 결심한 박씨는 인순이가 TV에 나올 때마다 가족들에게 "저 여자 굉장한 효녀다" "돈도 많이 번다"면서 세뇌(?)를 시켰다고 한다.

-만약 시댁의 반대가 심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당연히 안 하죠. 못 하죠. 어릴 때부터 저는 반대하는 결혼은 죽어도 안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 만나면서 제가 반대당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을 고쳐 먹게 됐어요. 고마운 사람이죠."

 

 

 

“‘강하다’는 편견일뿐…저도 눈물 많은 여자랍니다"


▶동생도 까마득히 몰랐던 중졸 학력

-제사도 지냅니까.

"그럼요. 우리 시댁 제사가 제가 1년 중 가장 바쁜 9~10월에 몰려있어요. 시부모님한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하고 사는데 이젠 시댁에서 완전히 내놨어요.(웃음) 시댁이 경기도 부평인데 고부갈등 같은 건 애시당초 없었어요. 제 나이도 만만치 않잖아요.(웃음)"

-가사일은 잘 합니까.

"젬병이죠. 부엌에 얼쩡거리면 어머니가 정신 사납다며 앉아있는 게 도와주는 거래요. 그래도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잖아요. 그래서 설거지 만큼은 꼭 제가 합니다. 인간 식기세척기입니다."

-딸 세인 양이 보물 1호겠네요.

"저한테는 국보죠. 방학마다 영국과 미국으로 캠프를 한 달씩 보내는데 영어도 잘하고, 공부를 아주 잘해요. 둘째를 하나 더 낳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주시네요. 세인이가 혼자 크는 걸 보면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인순이의 이런 마음은 작년 가을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영향이 컸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2년간 투병한 어머니.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을 앞두고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며 인순이는 태어나서 절망적인 외로움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수술동의서 사인은 사위도 자격이 안 되더라고요. 여동생은 결혼해서 버지니아주에 살아요. 한국에 사인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죠. 우리 딸도 언젠가 그런 일을 겪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미어지는 겁니다. 저, 진짜 생각 많죠?"

-이모도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친정 식구가 한 명도 없는 겁니까.

"네. 사실 이모는 엄마가 동두천 살 때 친자매처럼 지내신 분이라 친 이모처럼 모셨던 분이에요. 엄마는 의정부 성당 납골당에 모셨고, 이모는 갑갑할 것 같다며 유언으로 산에 뿌려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두 분이 만나면 늘 티격태격 하셨는데 하늘에 가신 엄마가 심심했나 봐요. 아마 두 분 요즘도 고스톱 치면서 많이 다투실 거예요."

-그런 결핍이 아이에게 투사되면 자칫 과잉보호로 연결되지 않나요.

"맞아요. 그게 문제인데 자꾸 아이가 눈에 밟혀서 냉정하게 대하지 못해요. 같이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이 적으니까 원하는 거 해주면서도 더 해줄 게 없나 찾아보게 돼죠. 중요한 건 밀도있는 시간인데. 영어에 중국어, 가야금 병창까지 가르치는데 힘들어하면 그만두게 해야할까 봐요."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포천 청산중학교 1기 졸업생이에요. 전교생이 60명 쯤 됐나. 소문난 개구쟁이였죠. 교실 짓느라 한탄강 가서 자갈 나르던 기억도 나고, 그때 통일동산이 죄다 밭이었는데 작약 심어서 장날에 약재 팔고 그랬어요. 등굣길에 호미를 차고 다녔고 색이 바랜 교복을 뒤집어 입었는데 '우라까이'라고 불렀죠. 군부대 뒷산에 올라가서 새알 훔쳐다가 후라이 만들어 먹고 개구리, 메뚜기도 잡아먹고 그랬어요. 그런 시골 생활이 제 낙천성을 키웠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건 가정 형편 때문이었나요.

"네. 동생이 저보다 열세 살 아래라 갓난아기일 때부터 제가 다 키웠어요. 엄마는 돈 벌러 나가야 했으니까. 작년 제 학력 문제가 언론에 났을 때 동생한테 국제전화가 왔어요. 동생도 제가 고등학교 나온 줄 알고 있었거든요. 자기 때문에 진학 포기한 걸 알고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근데 그때는 저 말고 다 그렇게 살았어요."



▶"엄마한테 있는 돈 다 드리고 싶어요"

-본인을 위해 해주고 싶은 선물은 뭡니까.

"하루 날잡아서 가라오케에서 놀아보고 싶어요. 제가 사교적이지 못해 연예인 친구가 거의 없거든요. 나이트클럽, 가라오케, 룸살롱도 한번도 안 가봤어요. 유흥업소 행사에서 남들 즐겁게는 했는데 정작 저는 그런 여유를 못 즐겼죠. 4월 3~4일 공연 다음날이 제 생일이거든요. 돈 관리하는 남편한테도 미리 선전포고해놨어요. 그날 하늘이 두쪽나도 공연팀들과 가라오케 간다고요. 너무 기다려져요."

-가수협회 부회장 감투도 쓰셨죠.

"네. 선·후배들의 문턱을 없애려고 사비를 들여 최희준 선배부터 데뷔 1년차 후배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그날 만큼은 후배들 담배 피우는 것도 못 본 척합니다.(웃음) 가슴에 명찰까지 붙이고 자기 소개도 시켜요. 중견 가수들은 '너희들 엄마는 다 알 거다'라고 말하고, 후배들은 '1~2집은 망했는데 3집은 반응이 좋은 누구입니다' 식으로 소개를 해요."

-만약 가수가 안 됐다면 뭘 하고 계실까요?

"간호사가 됐을 겁니다.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도 밖에 노출되진 않잖아요."

-지금까지 흘린 눈물을 모으면 어느 정도의 양이 될까요.

"글쎄요. 한강보단 적겠죠.(웃음) 딸 낳기 전엔 남들 앞에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강하게 보여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세인이 낳고는 만화 영화만 봐도 눈물이 나요. 연속극 볼 땐 딸이 아예 '엄마 또 울 거지'라면서 티슈통을 갖다 줘요. 눈물샘이 고장났나 봐요."

-본인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강한 줄 알았어요. 사실 가족들 생계를 책임져야 해 제 인생은 돌볼 여유가 없었어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였죠. 무슨 문제가 닥쳐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면돌파 해야 했어요. 세상을 투쟁하듯 살았어요."

-세상이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더 많잖아요.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엄마 돌아가신 날도 그랬어요. 그 당시 '친구여'가 한창 인기 있을 때인데 시청에서 야외 공연 앞두고 임종하라는 급한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수백명이 공들인 공연을 저 때문에 망칠 순 없잖아요. 공연 끝내고 헐레벌떡 귀가해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어한 동두천집에 모셨는데 24시간 만에 눈을 감으시더라고요. 수술동의서 쓴 날도 방송 때문에 부산에 가야 해 차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머니가 하루 환생한다면 뭘 해주실 건가요?

"고스톱 치면서 제가 가진 돈을 다 잃어드릴 거예요. 저희 엄마, 돈을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건강하실 때 지방 공연 같이 다녔는데 정작 제 공연은 한번도 본 적이 없으세요. 제가 안쓰럽다면서 차마 못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모 마음이 다 그런가 봐요. 그래서 내리 사랑이라고 하나 봐요."

 

 

“가수는 몸매보다 노래” 인순이 다이어트 포기

 
<스포츠동아>
 




예뻐지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갖는 욕심이다. 늘 무대에서 대중과 만나는 가수라면 더욱 절실할 수 있는 바람이다.

그런데 올 해로 노래 인생 30년을 맞은 가수 인순이는 그런 욕심을 과감히 버렸다. 인순이는 최근 정규 앨범 발매와 전국 투어를 앞두고 체중 감량을 시도했다가 가창력에 영향을 미치자 바로 포기했다.

늘 당당한 자신감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 그녀는 전에 더 늦기 전에 누드를 찍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친 바 있다. 그래서 새 앨범을 발표하고 전국투어를 나설 때 좀 더 새로운 모습으로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에 2월 초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체중 감량에 들어간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노래를 부를 때 힘이 딸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그녀는 앨범 준비와 전국 투어 준비를 병행하다가 “더 이상 살을 빼지 않겠다”며 다이어트 종식 선언을 했다.

인순이 소속사 ‘지앤지프’의 노선애 과장은 “노래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준비가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평소 공연 이틀 전부터는 목 관리를 위해 가족과 이야기도 거의 나누지 않는다는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이처럼 인순이에게는 늘 노래가 먼저였다. 지난 해 발매한 디지털싱글 ‘거위의 꿈’이 종전의 히트를 쳤을 때도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수없이 쏟아졌지만 인순이는 정중히 거절했다. 정치권에 발을 담그면 대중이 바라보는 ‘가수 인순이’의 모습이 혹 변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순이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대중 앞에는 오지의 마을도 가리지 않았다. 대학수능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위해 작은 교단에 앞에 섰고, 몸이 불편한 장애우들을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는 4월 3일부터 시작하는 전국 투어 콘서트에도 인순이는 같은 마음이다. 인순이는 전국 투어 기자간담회 후 가진 개별 인터뷰에서 “무대 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큰 공연장이 없어서 못하지만 문화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작은 마을에 가서 노래 부르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현재 인순이는 집 앞 피트니스 센터에서 전담 트레이너와 함께 장기간 진행될 전국투어를 대비해 체력을 기르는데 집중하고 있다. 앨범 발매와 더불어 데뷔 30주년 기념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는 인순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체력이기 때문이다.

비록 다이어트로 아름다운 몸을 가꿀 기회를 포기했지만 대신 젊은 사람 못지않은 강한 체력으로 무대를 휘어잡을 예정이다.

인순이는 전국 투어를 앞두고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이번 콘서트는 30년 세월을 돌아보기보다 앞으로 더 달려 나가겠다는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

언제 어디서나 노래하는, 노래하고 싶은 인순이. 그녀가 30년이라는 세월을 최고의 디바로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늘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싶은 그의 바람과 열정 덕분은 아니었을까.

 

‘활화산’인순이 연민은 없다 … 또 변신이다

 
<중앙일보>
 


[중앙일보 정현목.김성룡] 인순이(본명 김인순·51)가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1978년 여성 3인조 희자매 멤버로 ‘실버들’을 들고나온 게 가수인생의 시작이었다.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 때문에 늘 ‘혼혈’이라는 편견이 따라붙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그가 데뷔할 때만 해도 혼혈은 ‘낙인’과 같았다. 하지만 인순이는 ‘버려지고 찢긴 남루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다. 또 그 꿈을 믿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디바로 우뚝 섰다. 많은 이를 감동시킨 ‘거위의 꿈’은 그의 삶 자체였다. 13일 서울 도곡동 사무실에서 인순이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거듭나게 만든 노래로 조PD와 함께 부른 ‘친구여’를 꼽았다. ‘거위의 꿈’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내 이름 뒤에 연민과 동정이 따라붙는 게 싫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인순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인순이가 다음달 3, 4일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시작으로 데뷔 30주년 전국 투어(총 20여 회)에 나선다. 5월 15일에는 대중가수 최초의 금강산 공연도 예정돼 있다. 이번 투어와 함께 4년 만에 내놓을 정규앨범의 타이틀은 ‘레전드(전설)’다.

-스스로를 전설이라고 생각하나.

“외국 가수들의 공연에 ‘레전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게 부러웠다. 지금 내가 전설이라는 게 아니다. 전설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아직 모자란 게 많다. 인순이에게 또 다른 꿈과 길을 제시해주는 타이틀이다 .”

-인순이 하면 인간승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 아직도 혼혈의 설움을 극복한 가수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 뒤에 항상 연민과 동정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 그것을 넘어서고 싶다. 역동적이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가수인데, 인간 승리의 이미지가 자꾸 그걸 짓누른다. 날 있는 그대로 화려하게 봐달라. 그래야 내 안의 화려하고, 가끔은 선정적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 미모의 가수, 정열의 가수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웃음)

-최근 ‘인순이는 예쁘다’는 드라마가 화제였다.

“김현주가 ‘거위의 꿈’ 1절을 다 부르는 게 아주 좋았다. 처음에는 왜 내 이름을 갖다 붙였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냥 드라마더라. 난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을 사랑한다. 내 미소는 100만 불짜리다. 넉넉한 복코도 마음에 든다. 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난 예쁘다.”

-‘거위의 꿈’이 큰 감동을 줬다.

“느린 노래를 거의 안 불렀었다. 안 그래도 슬픈 배경이 있는데, 노래까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2년 전 콘서트 마무리 곡으로 쓰려고 ‘거위의 꿈’을 찾아내 방송에서 한번 불렀는데, 대박이 났다. 후배 가수나 관객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얘기하듯 노래하고, 노래하듯 얘기했다. 그것이 화제가 돼서 사람들이 ‘거위의 꿈’을 부르는 인순이를 자꾸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싱글 앨범으로 내놓았다.”

-왜 반향이 컸을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려움 때문이 아닐까. 취업·진학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뿐만 아니라, 꿈을 포기해야 될 상황에 놓인 40, 50대가 노래를 들으며 속으로 많이 울었다. 인순이는 이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다고 박수를 쳐주셨고, ‘나도 인순이처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친구여’는 ‘결코 늙지 않는’ 인순이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라는 곡 이전에는 패티 김 선배처럼 대형 가수가 되고 싶었다. 프로듀서 박진영이 그 방향을 틀어놨다. ‘또’라는 노래로 인순이 안에 있던 알앤비와 솔 감각을 끄집어냈다. 그게 도화선이 됐다. 이후 후배들 노래에 관심을 가졌고, 조PD와 ‘친구여’를 불렀다. 솔의 느낌이 더 강한 노래였다. 작곡가 박근태가 나를 또 한번 재발견해준 것이다. 원래는 녹음만 하려 했다. 그런데 방송 몇 번 해보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 노래가 젊은데 내 나이를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핫팬티·탱크톱도 입고 머리도 부풀렸다. 조PD와 20살 차이가 나는 내 나이를 잊고 노래했다. 내가 고집을 부리면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없다. 나를 이끄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어도 상관없다. 이번 앨범도 젊은 작곡가(이현승)와 작업하고 있다.”

-‘열린 음악회’가 디바 인순이를 각인시켰다.

“80년대 후반부터 6, 7년간 슬럼프가 있었다. 대학가요제 출신 등 아카데믹한 배경의 가수들에게 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던 때였다. TV를 꼼꼼히 모니터했다. ‘내가 나가면 이렇게 할 텐데’라며 무대를 구상했다. ‘열린 음악회’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기회가 주어져 ‘라밤바’ ‘님은 먼 곳엷 등을 부르고 들어가는데 거센 앙코르 요청에 사회자까지 당황할 정도였다. 더 이상 부를 악보가 없어 무반주로 ‘사설 난봉갗 ‘창부 타령’을 불렀는데, 그게 또 대박이 났다. 그후 ‘열린 음악회’에 격주로 나갔다. 행운이었다. 레퍼토리가 고갈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며 10년 이상을 끌었다. ‘열린 음악회’에서 트로트를 처음 부른 가수도 나였다. ‘열린 음악회’는 슬럼프에 빠진 인순이를 일으켜 세워줬다. 무대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됐다.”

-관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일품이다.

“아저씨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처음에는 팔짱을 끼고, 시큰둥하게 공연을 본다. 그런데 나중에는 여성들보다 먼저 일어나 춤을 춘다. 나도 관객도 함께 춤추고 놀면서 정신을 잃는 것 같다. 무대에 오를 때 뭔가 ‘훅’하고 내 몸을 감싸는 기운을 느낀 적이 있다. 움찔할 정도였다. 그게 ‘기’라고 생각한다. 관객의 기를 받아서 그걸 노래로 돌려드린다. 인순이를 보며 에너지가 솟도록 해드리고 싶다.”

-최근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12일 부시 전 대통령 앞에서 노래했다. 자리에 초청받은 유일한 가수였다. 살짝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로 긴장됐으나 양국 어르신들로부터 ‘역시 인순이야’라는 칭찬을 들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민가수라는 말을 들었다.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예전에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도 ‘한국인들이 당신을 아주 사랑해주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고 느낀 순간이었다. 어린 나이에 내 인생을 선택했다. 엄마와 살면서 이 땅에 뼈를 묻겠다고 했다. 환경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보고 싶었다. 그런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내 운명에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번 콘서트에서 보여줄 것은.

“패션만큼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줄 것이다. ‘실버들’이란 트로트곡으로 데뷔했기 때문에 트로트 무대로 시작하지 않을까. 팬층이 넓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올드(old)하지만 촌스럽지 않게, 영(young)하지만 주책 맞지 않게. 그리고 도전은 확실히 해야 한다. 그게 대중이 내게 원하는 거다. 참으로 어렵다. 어쩌겠나. 내 스스로 선택한 굴레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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