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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토크 인터뷰를 앞두고 인순이(51·본명 김인순)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던 중 스크롤을 멈춘 건 그의 좌우명을 본 뒤였다. '자수해서 광명찾자'. 대공시절 관공서 간판도 아니고 뭘 자수하고, 어떤 광명을 찾자는 걸까. 더블클릭하니 '거짓말은 또다른 거짓말을 낳기 때문에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는 설명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작년 유명인들의 학력 파동 당시 인터뷰를 자청해 "사실은 고등학교 입학을 못했다"고 '자수'하며 다른 행보를 걸었다. 이 일은 인순이의 좌우명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1978년 희자매로 데뷔한 지 올해로 꼭 30년. 그 동안 앞만 보고 뛰느라 친구가 없다는 그는 "예술의 전당 입성 보다 사실은 친구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한 당면 과제"라며 화통하게 웃었다. ▶예술의 전당은 자존심의 문제 인순이가 명성에 비해 인터뷰에 인색했던 건 자신을 어둡고 '구리게'만 바라보는 굴절된 시각 때문이었다. 혼혈을 극복한 성공한 가수라는 틀에 자신을 짜맞추려는 매스컴의 생리가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열 페이지를 할애하겠다는 잡지의 구애를 뒤로한 것도 그런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포장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쉰이 넘었지만 여전히 박제화를 경계했고, 두려워했다. 인순이가 요즘 새롭게 화제가 된 건 예술의 전당 입성을 놓고 벌어진 설왕설래 때문이다. 인터넷에는 '조용필은 되고 인순이는 왜 안 되냐'는 옹호론과 함께 '왜 굳이 대중 가수가 예술의 전당을 고집하냐'는 반대론까지 다양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올해 예술의 전당 측으로부터 대관신청을 거절당한 인순이는 "2009년을 기약하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왜 예술의 전당입니까. "제 손님들에게 더 좋은 목소리와 음향을 들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조용필 선배가 1999년부터 6년간 그 무대에 서는 걸 객석에서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어요. 나도 저기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언젠가 꼭 저곳에 서겠다고 결심한 거죠." -평소 예술의 전당은 자주 가십니까. 유료관객으로서 말이죠. "네. 얼마 전에도 박정자 선생님이 공연한 '19 그리고 80'을 보고 왔어요. 저요, 예술의 전당 단골입니다.(웃음) 그런데 자꾸 이렇게 그쪽하고 마찰을 빚게 돼서 걱정이에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입장을 막으면 어떡하나. 그땐 변장이라도 해야 하나, 별 걱정을 다 해요." -쟁점의 본질은 인순이씨가 상업 가수라는 것 아닌가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예술의 전당 측이 그건 아니라고 밝혔잖아요. 그 말 듣고 또 희망을 갖게 됐어요. 사실 조용필 선배도 뮤지컬 형식을 빌려 콘서트를 하신 거죠. 이제 전례도 있고, 대중가수라 안 되는 게 아니라면 이제 제가 거부돼야 할 명분이 뭔지 궁금해요. 2009년 수시 대관을 신청했고, 1년 중 공연하는 날 이틀과 장비 설치하는 날 이틀, 이렇게 4일만 빌려달라는 겁니다. 날짜도 못박지 않았고 예술의 전당에서 괜찮다는 날 공연할 겁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거위의 꿈'을 부르며 남들한테는 꿈을 이루라고 했는데 정작 제 꿈도 이루고 싶은 겁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나 야외 무대에서는 공연할 수 있잖아요. "이왕 할 거면 메인 홀에서 하고 싶습니다. 야외 무대는 객석이 무대보다 높아서 제 키가 작아 보여요.(웃음)" 그는 부족한 레퍼토리가 대관신청 불허 이유 중 하나라는 얘기가 나오자 언성이 높아졌다. 최근 '친구여' '거위의 꿈' 등이 인기를 끌었지만 모두 리메이크 곡이었고 인순이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몇 곡 안 된다는 지적에 대해서였다. "해외 뮤지션들은 몇 년에 한번씩 앨범을 내지만 세계 투어 공연까지 다닙니다. 레퍼토리를 내세우는 건 또 하나의 트집을 잡겠다는 것밖에 안 돼요. 물론 예술의 전당에 서려면 당연히 자신의 히트곡이 많아야죠. 남의 노래만 부를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순이가 30년동안 남의 노래만 부른 건 아니잖아요." 내친 김에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더 했다. 인순이와 소속사가 30주년 공연 홍보를 앞두고 예술의 전당 문제를 끌어들였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저도 그 얘기 들었는데 한마디로 기가 막혔어요. 사실 저는 만으로 계산해 작년이 30주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소속사에서 올해가 30주년이고 이 무대를 건너뛸 수 없다고 저를 설득했어요. 나중에 안 건데 제 의견도 묻지 않고 4월 3~4일 세종문화회관 대관 신청도 해놓았더라고요. 인순이는 그렇게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작업(?) 방지용 결혼반지 "본의 아니게 투사가 됐다"는 인순이는 "예술의 전당이 공연을 허락한다 해도 처음 기대처럼 흥겹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높은 진입장벽과 문턱 때문에 기력이 쇠진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 참에 새로 출범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000석짜리 오막집(전용공연장) 하나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인순이씨 공연은 게스트가 없는 걸로도 유명한데 이유가 뭡니까. "원래 대가들은 그래요. 너무 잘난 척인가.(웃음) 사실 게스트를 부르고 싶어도 미안해서 후배들을 못 불러요. 다들 바쁘잖아요. 작년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할 때 와준 DJ DOC와 조PD가 유일한 게스트였죠." -가창력이 뛰어나거나 칭찬해주고 싶은 후배가 있나요. "많죠. 나이 드니까 후배들한테 참 많이 관대해져요. 아무리 못해도 저보다 잘하는 구석이 하나 이상은 꼭 있더라고요.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는 말도 있잖아요." |
![]() 78년 '실버들'이라는 노래로 등장한 희자매의 다른 두 멤버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재희씨는 서울 반포에, 영숙씨는 하와이에서 산다고 했다. 둘다 외국인과 결혼했고, 자신만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을 지키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해 했다. 그는 94년 박경배씨와 화촉을 밝혔고, 중학교 2학년인 딸을 하나 두고 있다. -프로필에 남편이 대학교수로 기재돼 있던대요. "아직 정교수는 아니예요. 경희대 출신인데 외국에서 골프 칼리지를 수료했고, 지금은 모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지요. 골프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과 골프클럽 수리 등 골프에 대한 전반을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92년 강릉으로 가다가 차가 뒤집히는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 사고를 계기로 인생을 돌아보게 됐죠. 이렇게 죽으면 신문 귀퉁이에 부고 기사가 나고 사람들에게 잊혀지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엄청 허무한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누군가를 붙잡고 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때 눈에 띈 게 남편이었죠. 친구들이나 가족과 달리 냉정하고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고 이주일 선배님의 재무 담당이었는데 저보다 네 살 연하였어요." 그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반지는 결혼 반지라고 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누가 작업할까봐 임자 있는 몸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반지를 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인생의 카운셀러가 동반자가 된 거였군요. 남편이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나요. "유치하면서도 감동적이었어요. 어느날 '한 이불을 덮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결혼할 줄 알았으면 제가 만났던 남자 얘기를 안 했을 텐데. 제 비밀을 너무 많이 노출시켰어요.(웃음) 데이트 시절 우리가 자주 불렀던 '아껴둔 우리 사랑을 위해'를 라디오에서 자주 불렀는데 그때마다 세인 아빠가 감명 받았어요." 한국 남자와의 결혼을 자의 반 타의 반 포기하고 살았지만 남편은 그의 이런 생각을 고치게 해준 관제탑 역할을 해줬다. 결혼을 결심한 박씨는 인순이가 TV에 나올 때마다 가족들에게 "저 여자 굉장한 효녀다" "돈도 많이 번다"면서 세뇌(?)를 시켰다고 한다. -만약 시댁의 반대가 심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당연히 안 하죠. 못 하죠. 어릴 때부터 저는 반대하는 결혼은 죽어도 안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 만나면서 제가 반대당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을 고쳐 먹게 됐어요. 고마운 사람이죠." |
▶동생도 까마득히 몰랐던 중졸 학력 -제사도 지냅니까. "그럼요. 우리 시댁 제사가 제가 1년 중 가장 바쁜 9~10월에 몰려있어요. 시부모님한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하고 사는데 이젠 시댁에서 완전히 내놨어요.(웃음) 시댁이 경기도 부평인데 고부갈등 같은 건 애시당초 없었어요. 제 나이도 만만치 않잖아요.(웃음)" -가사일은 잘 합니까. "젬병이죠. 부엌에 얼쩡거리면 어머니가 정신 사납다며 앉아있는 게 도와주는 거래요. 그래도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잖아요. 그래서 설거지 만큼은 꼭 제가 합니다. 인간 식기세척기입니다." -딸 세인 양이 보물 1호겠네요. "저한테는 국보죠. 방학마다 영국과 미국으로 캠프를 한 달씩 보내는데 영어도 잘하고, 공부를 아주 잘해요. 둘째를 하나 더 낳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주시네요. 세인이가 혼자 크는 걸 보면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인순이의 이런 마음은 작년 가을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영향이 컸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2년간 투병한 어머니.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을 앞두고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며 인순이는 태어나서 절망적인 외로움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수술동의서 사인은 사위도 자격이 안 되더라고요. 여동생은 결혼해서 버지니아주에 살아요. 한국에 사인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죠. 우리 딸도 언젠가 그런 일을 겪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미어지는 겁니다. 저, 진짜 생각 많죠?" -이모도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친정 식구가 한 명도 없는 겁니까. "네. 사실 이모는 엄마가 동두천 살 때 친자매처럼 지내신 분이라 친 이모처럼 모셨던 분이에요. 엄마는 의정부 성당 납골당에 모셨고, 이모는 갑갑할 것 같다며 유언으로 산에 뿌려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두 분이 만나면 늘 티격태격 하셨는데 하늘에 가신 엄마가 심심했나 봐요. 아마 두 분 요즘도 고스톱 치면서 많이 다투실 거예요." -그런 결핍이 아이에게 투사되면 자칫 과잉보호로 연결되지 않나요. "맞아요. 그게 문제인데 자꾸 아이가 눈에 밟혀서 냉정하게 대하지 못해요. 같이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이 적으니까 원하는 거 해주면서도 더 해줄 게 없나 찾아보게 돼죠. 중요한 건 밀도있는 시간인데. 영어에 중국어, 가야금 병창까지 가르치는데 힘들어하면 그만두게 해야할까 봐요."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포천 청산중학교 1기 졸업생이에요. 전교생이 60명 쯤 됐나. 소문난 개구쟁이였죠. 교실 짓느라 한탄강 가서 자갈 나르던 기억도 나고, 그때 통일동산이 죄다 밭이었는데 작약 심어서 장날에 약재 팔고 그랬어요. 등굣길에 호미를 차고 다녔고 색이 바랜 교복을 뒤집어 입었는데 '우라까이'라고 불렀죠. 군부대 뒷산에 올라가서 새알 훔쳐다가 후라이 만들어 먹고 개구리, 메뚜기도 잡아먹고 그랬어요. 그런 시골 생활이 제 낙천성을 키웠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건 가정 형편 때문이었나요. "네. 동생이 저보다 열세 살 아래라 갓난아기일 때부터 제가 다 키웠어요. 엄마는 돈 벌러 나가야 했으니까. 작년 제 학력 문제가 언론에 났을 때 동생한테 국제전화가 왔어요. 동생도 제가 고등학교 나온 줄 알고 있었거든요. 자기 때문에 진학 포기한 걸 알고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근데 그때는 저 말고 다 그렇게 살았어요." ▶"엄마한테 있는 돈 다 드리고 싶어요" -본인을 위해 해주고 싶은 선물은 뭡니까. "하루 날잡아서 가라오케에서 놀아보고 싶어요. 제가 사교적이지 못해 연예인 친구가 거의 없거든요. 나이트클럽, 가라오케, 룸살롱도 한번도 안 가봤어요. 유흥업소 행사에서 남들 즐겁게는 했는데 정작 저는 그런 여유를 못 즐겼죠. 4월 3~4일 공연 다음날이 제 생일이거든요. 돈 관리하는 남편한테도 미리 선전포고해놨어요. 그날 하늘이 두쪽나도 공연팀들과 가라오케 간다고요. 너무 기다려져요." -가수협회 부회장 감투도 쓰셨죠. "네. 선·후배들의 문턱을 없애려고 사비를 들여 최희준 선배부터 데뷔 1년차 후배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그날 만큼은 후배들 담배 피우는 것도 못 본 척합니다.(웃음) 가슴에 명찰까지 붙이고 자기 소개도 시켜요. 중견 가수들은 '너희들 엄마는 다 알 거다'라고 말하고, 후배들은 '1~2집은 망했는데 3집은 반응이 좋은 누구입니다' 식으로 소개를 해요." -만약 가수가 안 됐다면 뭘 하고 계실까요? "간호사가 됐을 겁니다.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도 밖에 노출되진 않잖아요." -지금까지 흘린 눈물을 모으면 어느 정도의 양이 될까요. "글쎄요. 한강보단 적겠죠.(웃음) 딸 낳기 전엔 남들 앞에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강하게 보여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세인이 낳고는 만화 영화만 봐도 눈물이 나요. 연속극 볼 땐 딸이 아예 '엄마 또 울 거지'라면서 티슈통을 갖다 줘요. 눈물샘이 고장났나 봐요." -본인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강한 줄 알았어요. 사실 가족들 생계를 책임져야 해 제 인생은 돌볼 여유가 없었어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였죠. 무슨 문제가 닥쳐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면돌파 해야 했어요. 세상을 투쟁하듯 살았어요." -세상이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더 많잖아요.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엄마 돌아가신 날도 그랬어요. 그 당시 '친구여'가 한창 인기 있을 때인데 시청에서 야외 공연 앞두고 임종하라는 급한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수백명이 공들인 공연을 저 때문에 망칠 순 없잖아요. 공연 끝내고 헐레벌떡 귀가해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어한 동두천집에 모셨는데 24시간 만에 눈을 감으시더라고요. 수술동의서 쓴 날도 방송 때문에 부산에 가야 해 차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머니가 하루 환생한다면 뭘 해주실 건가요? "고스톱 치면서 제가 가진 돈을 다 잃어드릴 거예요. 저희 엄마, 돈을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건강하실 때 지방 공연 같이 다녔는데 정작 제 공연은 한번도 본 적이 없으세요. 제가 안쓰럽다면서 차마 못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모 마음이 다 그런가 봐요. 그래서 내리 사랑이라고 하나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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