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가봤죠? 오름에 올라봐요
제주도는 영원한 두 번째 여행지다. 처음 가 보는 사람보다 두 번째 가는 사람이 많고, 두 번째 가는 사람보다 세 번째 가는 사람이 많다.
이토록 제주를 자주 가 봤어도 오름에 오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행사에 돈이 되지 않아서(동네 뒷산인 오름이 여행사에게 커미션을 주지 않으니까) 단체관광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도 있고, 렌터카를 이용한 빠른 여행이 대세가 되면서 오름을 쉬이 지나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제주 여행 2박3일 가운데 하루를 ‘오름 데이’로 잡아보자. 분화구에 물이 찬 오름, 숲이 우거져 산림욕장으로 손색없는 오름, 전형적인 민둥산 오름 등 각양각색의 오름을 체험하는 것이다. 아침 느지막이 길을 나서도 하루 네 곳은 거뜬하다. 제주 서부 금오름에서 동부 용눈이 오름까지 제주 오름을 횡단했다.
굼부리 안에선 바람도 멎는다
⊙ 굼부리가 좋은 오름=오름은 한라산 자락에 흩어진 기생화산이다. 분화구를 갖고 있으며 화산 쇄설물로 이뤄진 지형을 지질학적으로 오름이라고 한다. 오름도 명색이 화산이어서 폭발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한라산 백록담처럼 분화구를 가졌다. 분화구를 제주 말로 ‘굼부리’라고 하는데, 굼부리에 물이 드는 오름은 물찻, 물영아리, 물장오리, 물가마솥밭, 사라, 동수악, 원당, 어승생 그리고 금오름 등이다.
금오름(검은오름)에서 오름 데이를 시작했다. 금오름은 제주 서부가 한눈에 조망되는 해발 428m의 높은 오름이다. 한림읍 금악리 삼거리에서 이시돌 목장 방향 1㎞ 지점의 검은오름 안내판에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른다. 15분쯤 올랐을까. 한라산과 비양도의 중간에 서 있다. 발 밑으로 거대한 굼부리가 펼쳐진다. 해질 적 노을을 예쁘게 비춘다는 금악담은 바짝 말라 황톳빛 흙을 드러냈는데, 하얀 소 두 마리가 좋다고 봄날 새싹을 뜯고 있다.
굼부리 안으로 내려가 보라. 바람이 멎는다. 귀청을 때리는 바람소리도 멎는다. 제주의 자궁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굼부리 북쪽 사면엔 황토굴이 숨었다. 연둣빛 고사리가 굴 입구를 가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훈김이 나온다.
⊙ 숲이 좋은 오름=한림읍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 숲이 훌륭하다는 저지오름을 찾았다. 저지오름은 새오름이라고도 한다. 제주 전통가옥인 샛집을 엮는 새(억새)를 오름에서 걷었다 해서 새오름이다. 그런데 새오름에 새가 없다. 저지리 주민들이 오래전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을 일궈놨기 때문이다.
저지오름은 발 편한 숲길을 숨겨 놨다. 한경면 저지리 마을 뒤편에서 오른다. 숲길의 구조가 재밌다. 저지오름 중턱에서 한 바퀴 돌고, 정상으로 올라가 굼부리에서 한 바퀴 돈다. 각각 1.5㎞, 0.8㎞다. 숲길을 완주하면 저지오름을 두 바퀴 도는 셈이다. 숲길에는 삼나무가 일렬로 섰고, 보리수나무·소나무·닥나무가 빽빽하다. 2005년 산림청, 생명의숲, 유한킴벌리 등이 연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으로 선정됐다.
⊙ 야생이 살아 있는 오름=금오름에서 놓친 굼부리 물은 물찻오름에서 만났다. 물찻오름은 사시사철 ‘물 찬’ 오름으로 최근 들어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물 찬 풍경 못지않게 물찻오름이 좋은 건 천연 원시림 때문이다. 물찻오름 입구에서 오른쪽 오름길을 버리고 직진하면 제주에서 만나기 힘든 한적한 오솔길을 만난다.
오솔길 주변에 노루가 산다. 물찻오름을 두 번 가서 다섯 마리를 봤으니, 노루들이 얼마나 흔한지 알 수 있다. 노루는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칠 뿐 아예 줄행랑을 치진 않는다. 물찻오름에선 그렇게 인간과 자연의 신뢰가 생겼다. 노루를 놀라게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관찰한다.
⊙ 민둥산 오름=제주 최대의 오름 군락인 동부 오름들에서 오름 데이를 마쳤다. 아부, 다랑쉬, 좌보미, 용눈이 오름 등이 봉긋봉긋 솟았다. 구좌읍 용눈이 오름은 잘생긴 민둥산 오름이다. 전형적인 오름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름 전체를 주황빛 억새나 연둣빛 풀밭이 덮고(마치 축구경기장처럼), 오름 중간에는 산담(돌담을 두른 제주 무덤)이 박혔고(살갗에 새긴 문신처럼), 능선은 한없이 부드럽다(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호빵처럼). 신라 왕릉을 좀더 크게 쌓았다면, 아마 용눈이 오름이었을 것이다.
하루 네 개 오름을 올랐는데도 노곤하지 않다. 오름 트레킹이라 해봐야 하나 오르내리는 데 한 시간이면 족하다. 해가 한라산 언저리에 걸릴 즈음 바람이 차가워졌다. 어서 굼부리 안으로 피해야겠다.
땀 뻘뻘 흘리지 않고 뒷산 오르듯
⊙ 오름 찾아가기=제주에는 368개의 오름이 있다. 풍광이 다른 오름들을 묶어야 지루하지 않다. 동네 뒷산이 오름이니, 이런 익명성 탓에 오름 찾기가 쉽지 않다. 렌터카에 부착된 내비게이션에도 대다수 오름은 표시가 안 됐다. 오름오르미들(orumi.net), 오름오름회(ormorm.com)에서 가는 길을 확인한다. <제주의 오름 368>(김승태·한동호 지음, 대동출판사 펴냄)도 도움이 된다.
오름 길은 땀 뻘뻘 흘리는 등산이 아니다. 자연을 즐기는 자세로 뒷산 오르듯 나선다. 간편한 복장과 운동화면 족하다. 일부 오름은 목장으로 사용돼 철문이 길을 가로막는다. 이럴 땐 살짝 둘러 간다. 제주 사람 누구도 사유지라 해서 오름길을 막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