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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3은 돌아왔는데…

한라의메아리-----/주저리주저리

by 자청비 2008. 4. 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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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교외에 나갔다가 밭담 사이로 유채꽃과 동백꽃이 어울려 피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란 유채꽃과 빨간 동백꽃의 조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60년전 제주의 모습은 어땠을까 불현듯 떠오른다. 1948년 4월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그 해 4월 3일 새벽 무장대가 남한단독 선거 반대 및 통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파출소를 습격하면서 4·3은 시작됐다. 애꿎은 주민들이 밤에는 폭도에, 낮에는 군경에 시달렸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주민들이 예비검속이라는 이유로 끌려간뒤 돌아오지 않았다. 4·3이 완전 끝날 때까지 정부 추산 3만여명(일부 학자는 8만여명으로 주장)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가 30만여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0% 이상이 희생된 셈이다.


당시 애꿎은 주민들은 이유도 모른채 이리 밀리고 저리 쫓겨다니다가 끝내는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은 가슴속 한을 풀어내지도 못한채 숨죽여 살아야 했다….  단독 정부는 4·3의 진상을 외면했고,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사정부는 4·3을 좌익 불순분자에 의한 폭동·반란으로 규정해 4·3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의 4·3은 어둠 속의 역사로 흘러갔다.


제주의 4·3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빛을 보기 시작했다. 4·3특별법이 제정됨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4·3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 실태 조사 등이 비로소 시작됐다. 이유도 모른채 끌려가서 다른 지방 형무소에서 처형당했던 혼백들도 찾아내 위로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진상조사결과 펴낸 보고서는 '국가공권력에 의해 막대한 주민희생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4·3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던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도 했다. 이로써 피해 진상 조사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조사 등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또 집단 학살당한 뒤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했던 곳에 대한 유해발굴과 시신찾기 작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올해 4·3 60주년을 맞아 국내 다른 지방 형무소 등에서 억울하게 숨진 혼백들을 모셔오는 작업도 진행됐다. 그동안 추진돼 오던 4·3평화공원도 문을 열고 해원(解怨) 방사탑도 건립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다. 그동안 4·3 진상 규명과 유가족 피해보상 등을 위해 설립된 총리실 산하 4·3위원회가 기구축소라는 명분하에 해체위기에 처해 있다. 보수우익단체들은 '4·3 은 좌익의 폭동'이라며 4·3 추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도록 요구하고 나섰다. 또 보수우익단체들이 펴낸 역사책은 '4·3은 남한 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좌익들의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나섰다.

 

4·3이 다시 왜곡될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4·3은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이며 한국 민주화의 척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제주의 4·3은 풀어야 할 과제가 아직도 산적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들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동란 다음으로 가장 뼈아픈 역사인 4·3에 대해 계속 왜곡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한국현대사가 여전히 질곡의 세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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