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는 다 안다고 착각…국어 못하면 영어실력 안늘어”
[한겨레]
'발달'과 '발전'을 차이를 말이나 글로 정확하게 설명하라고 하면 정확하게 해내는 이가 얼마나 될까. 발달과 발전은 모두 높은 수준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만, 일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을 뜻할 때는 발전이라고 써야 하고 사람의 신체·지능·감정 등이 성장할 때는 발달이라고 써야 한다. 그런데 영어로는 'devlopment'라는 단어 하나로 쓴다. 반대로 영어로는 뚜렷이 나눠 쓰는 데 비해 우리말로는 구분이 어려운 어휘도 있다. '붙이다'와 '부치다'처럼 볼 때마다 헷갈리는 단어도 있지만, 어른들도 엄밀히 구별해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지훈 한국언어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최근 이런 내용을 담은 < 국어를 영어와 함께 잡아라 > (삼성출판사)는 책을 냈다. 영어 어휘가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국어 어휘 실력을 늘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책이다. 그는 현재 중학생 응시자가 급증하고 있는 국어능력인증시험의 문제를 감수하고 계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새 정부 들어 '영어교육 이상 열풍'이 불고 있는 지금, 국어 교육의 현주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다.
토익은 엄청 공부하면서 국어 문법공부는 등한시…말 안되는 '비문' 많이 써
입시·입사 언어학습 치중…뜻 파악·표현력 강화하는 언어교육 설 자리 없어져
모국어 체계적 공부 없인 외국어 실력 크게 안늘어…국어 단어장부터 만들라
― 어휘에 관한 책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 국어교육에서 어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인가?
=그렇다. 어휘 실력이 없으면 언어 능력을 높일 수 없다. 표현력과 사고력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데 학생들의 국어 어휘 실력이 무척 낮다. 실제로 교과서에 나오는 어휘의 정확한 뜻을 모르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확하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는 능력은 언어학습에서 기본이다.
― 국어 능력에 대한 인증시험을 주관하고 있는데, 어휘 능력을 비롯해 학생들의 평균적인 국어 실력 수준은 어떤가?
=초ㆍ중ㆍ고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이 대학생들의 국어 실력도 기대 이하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들이 가끔 메일을 보내오는 경우가 있는데 기본이 안 돼 있는 경우가 많다.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 '비문'에 대한 감각도 없다. 보고서를 봐도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읽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자신들은 의사소통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심각한 수준이다.
―국어 실력과 영어 실력을 비교해 본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영어는 어릴 때부터 강조해서 그런지 체계적으로 배운다. 그에 비해 국어는 일상에서 쓰는 것이어서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 체계적으로 학습하려 하지 않는다. 국어 공부를 하면서 사전을 보거나 단어장을 만드는 학생은 없다. 특별히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생들에게 국어 문법을 가르치려면 영어 문법과 비교해야 알아듣는다. 토익이나 토플은 엄청나게 공부하면서 국어 문법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 요즘 학생들은 이전 시대에 비해 공교육에다 사교육의 혜택까지 받고 있어 절대적인 학습량은 늘었는데도 국어 실력이 더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회적 배경이 있다고 보나?
=국어나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입시나 입사에 있기 때문이다. 원활한 의사소통에 중점을 두는 '언어 학습'의 관점에서 이뤄져야 언어 능력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데 그것을 강조하면 현장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입시나 입사가 목적이다 보니 전반적인 실력은 떨어지는데도 문제풀이는 잘한다. 기형적이다. 문제풀이를 위한 유형별 학습에만 몰두한 결과다. 의미 파악이나 표현력에 치중하는 언어 교육이 없다. 여기에 더해서 언어를 쓸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이 없다. 이전에는 편지를 쓸 기회라도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이뤄지는 교육에서 말하기와 글쓰기의 비중은 높지 않다. 학교에서 말하기, 글쓰기를 못하니까 인터넷에서 하는데 인터넷 댓글이라는 것이 감정을 배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지한 글쓰기와는 사뭇 다르다. 또 읽는 책의 절대적 분량도 이전 세대에 비해 적은 것 같다.
― 새 정부는 영어 교육 강화에 치중하고 있다. 당분간 영어 우위의 교육 패턴은 여전할 것 같다.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국어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의 태도도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국어를 우위에 둘 것인가, 영어를 우위를 둘 것인가 하는 시각에서 보면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이런 이분법적 접근은 둘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모르는 소치다. 사실 국어나 영어는 '언어 학습'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둘을 통합적으로 봐야 한다. 모국어의 수준이 높지 않으면 외국어의 수준이 높아질 수 없다. 모국어의 체계가 뇌 속에 발달해 있지 않으면 다른 나라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외국어고에 다니는 학생의 번역을 본 적이 있는데 국어 실력이 떨어지다 보니까 우리말로 제대로 연결이 안 됐다. 단어의 나열 수준이라면 제대로 된 언어 구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렇다면 국어 교육과 영어 교육의 비중을 어떻게 둬야 하나?
=영어는 생활이나 경쟁력 그 자체로 생각하면서 국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반대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국어든 영어든 어릴 때부터 이것을 공부하는 이유를 학생 스스로가 분명히 느끼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원활한 의사소통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교육을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살거나 거기에 오래 머물면서 공부할 목적이 아니라면 국어 중심의 언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영어의 경우에는 교육의 목적을 좀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상회화 수준의 언어 교육이라면 중학교,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 교육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영어 광풍'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치중할 필요가 없다.
― 국어 교육의 방향도 변화해야 국어 실력을 제대로 높일 수 있을 것 같은데.
= 입시 위주의 교육 과정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수법을 바꾸기 어렵다고 본다. 교사들이 학생과 언어로써 소통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 말이든 글이든 소통의 기회가 늘어야 실제 언어 학습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 언어 학습의 경우에는 가정의 구실도 중요하다. 학교에서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와의 언어적 소통은 언어 능력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자기주도적 언어 학습의 가장 중요한 장은 가정이다.
―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실용적인 국어 교육을 소개해 달라.
=국어 단어장을 만들라고 하고 싶다. 영어는 사전도 활용하고, 단어장도 만들고, 오답노트까지 만들지만 국어 공부를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우리 아이가 며칠 전 '체감'이라는 단어의 뜻을 물어왔다. 부모가 선뜻 설명하기 어렵다. 같이 사전을 찾아보고 기록하도록 하는 게 좋다. 예문도 만들어 보게 해야 한다. 사전에 나오는 예문 가운데는 부적절한 것도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쓰는 예문을 쓰도록 해야 한다. 비슷한 말이나 반대말을 조사하게 하는 것도 좋다. 개그 프로그램을 함께 보다가 나오는 단어를 적게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