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80년간 과거 숨기고 산 '전설의 女가수'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8. 10. 28. 09:45

본문

 

황성옛터

 

 

<한국일보>

 

80년간 과거 숨기고 산 '전설의 女가수'

 

18세에 '황성옛터' 부른 이애리수 생존 확인

1932년 음반판매 5만장 기록한 첫 '국민가수'
"가수 발설 안된다" 조건 대학생과 부부의 緣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白壽 앞두고도 건강해

글=정홍택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1932년 빅타레코드에서 발매한‘황성옛터’ 음반

(왼쪽 사진)과 음반 발매 당시의 이애리수. 

 

결혼과 함께 모습을 감춰 이미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던 ‘황성옛터’ 의 가수 이애리수 여사. 한창

활동할 당시 모습(왼쪽)과 고령이어서 휠체어에 의지해 지내고 있지만, 병원에서 “110세까지 사시

겠다”고 진단할 만큼 정정한 현재 모습.

 

1928년 가을, 극단 취성좌(聚星座ㆍ후에 조선연극사로 개칭)의 공연이 열리던 서울 종로의 단성사. 공연 중간 소위 '막간(幕間) 무대'에 앳된 모습의 여가수가 등장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나라 잃은 설움을 에둘러 표현한 구슬픈 곡조의 노래는 이내 객석을 뒤흔들었다. 숨죽인 흐느낌은 어느새 통곡으로 번졌고, 가수도 목이 메어 '노래 반, 울음 반'의 무대가 이어졌다. 놀란 일제 순사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중단시켰고, 작사가 왕평, 작곡가 전수린을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이 종로경찰서로 붙들려 가 밤샘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이자 80년 지난 지금도 국민 애창곡으로 사랑 받는 '황성옛터'(발표 당시 '荒城의 跡')는 그렇게 대중에 첫 선을 보였다. 당시 노래를 부른 배우 겸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의 나이는 불과 열 여덟이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중 결혼과 함께 모습을 감춰 이미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던 이애리수(98) 여사가 정정하게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1일 경기 일산 백석마을의 한 요양원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녀는 맏아들 배두영(71)씨와 딸들, 외손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느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녀를 돌보는 간병사는 "하루 세 끼 죽을 드시는데 한 그릇씩 모두 비운다"고 귀뜸했다.

그녀는 "신문사에서 뵈러 왔다"는 아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황성옛터' 부르던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몰라"라고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닫았다. 워낙 고령이라 대화가 어렵기도 했지만, 옛 추억을 마음대로 떠올릴 수 없는 아픔을 지닌 탓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개성 출신으로 9세 때 극단에 들어가 배우 겸 막간 가수로 활동했다. 빼어난 노래솜씨와 미모로 인기가 있었던 그녀는 '황성옛터'를 통해 일약 '국민 가수'로 떠올랐다.

1932년 빅타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황성옛터'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렸다. 지금의 인구비례로 따지면 500만장 정도이니, 경이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레코드 업계에 '조선 유행가 취입 붐'까지 몰고 왔던 그녀의 삶은 22세 때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재학생 배동필씨를 만나며 격랑에 휩싸였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동반자살을 기도했다.

부친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 그녀가 가수 출신임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부의 연을 허락했다.

그 후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 2남7녀를 낳고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에만 충실했다. 과거와 독하게 인연을 끊고는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 맏아들조차도 "어머니가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대학(연세대) 다닐 때 처음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대중매체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하며 500여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피곤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달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담당의사가 "본인이 일부러 식음을 끊지 않는 한 110세까지 충분히 사시겠다"고 진단했다고 한다. 또 1년 전부터 무슨 연유인지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있다고 한다.

'황성옛터'가 세상에 나온 지 꼭 80년이 지난 2008년 가을, 사랑을 좇아 화려했던 과거를 미련 없이 버린 채 그 긴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온 전설 속 여가수와의 만남은 만감을 불러 일으켰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겠다고 인사를 했을 때, 얼굴을 돌려 말없이 쳐다보던 커다란 두 눈이 가슴에 와 박혔다.

 

<가사>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느린 3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작곡된 한국 최초의 가요곡. 1932년 최초의 취입레코드 라벨에 인쇄되었던 곡명은 <황성의 적(跡)>이었다. 영천출신의 시인 왕평(王平)이 노랫말을 짓고, 개성출신의 작곡가
전수린(全壽麟)이 곡을 붙이고, 배우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가 애잔하게 부른 황성옛터’는 지금도 사랑받는 ‘민족가요’이다.
전수린이 1928년 고향 송도(松都)에서 고려의 옛 궁터를 보고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작곡하였다. 전수린의 첫 작품으로 신파극단 취성좌(聚聖座)의 서울 단성사(團成社) 공연 때 여배우 이애리수가 막간무대에 등장하여 이 노래를 불러 크게 유행하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