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방동규 “요즘세상 의리가 없어 서운해”
경향신문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꼭 엉뚱하기는/ 천장에 매달린/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입심좋아/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와/ 와 웃음터진다.”
10여년 전에 발표된 연작시 만인보에서 고은 시인은 방동규씨(73)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땅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천장을 받치고 서 있어야 할 대들보가 천장에 매달린 형국이라니 방씨의 인생이 그만큼 기묘했다는 얘기일 거다. 게다가 힘깨나 쓴다고 하고 거기에 입심도 좋다고 하니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배추’라는 별명이나 소설가 황석영, 재야운동가 백기완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 중 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진 방씨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이부영·김태홍 전 국회의원, 작가 구중서 등 수많은 재야세력과 교분을 쌓고 민주화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다. 그도 1973년 강원도에서 노느메기밭을 일구며 공동체생활을 꿈꾸다 재야인사들을 접촉한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로 복역하고, 86년에는 또다시 ‘말’지 사건에 휘말린 김태홍 전 의원을 숨겨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정작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흔한 ‘명함’ 하나가 없다. 다만 그는 몸으로 세상을 살아왔을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으로 통했고 서른 되던 해에는 파독 광부생활을, 70~80년대 중동 아랍에미리트 현장을 누볐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헬스클럽 강사로 활동했고 일흔에는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일했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에 최고령자로 참석해서 입상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전국대회 출전이다.
남들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두고 ‘한 번쯤 풍운아처럼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는 “당신들이 내 ‘구라’를 들으면서 웃는 것을 보면 나는 아주 환장할 노릇이야. 평범한 게 좋은 거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특히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다. 머리가 하얗게 센 칠순 노인이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지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의리 하나로 살아온 그는 요즘 자본이 근본이 되는 세상이 서운하다고 했다. “의리나 사람이 근본이 되어야지 세상이 좋은 건데 요새는 자본이 근본이고 재산이 근본이 아닙니까. ‘자본’이 어떻게 ‘주의(主義)’가 되지요? 의리고 뭐고 없고 이기는 놈이 장땡이고 이기려다보니 모략하고 배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결과 잘된 놈은 잘된 놈들끼리만 모이고 안된 놈은 사그라지는 것 아닙니까.” 세속의 틀과 이기심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배추의 파란만장 일대기가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배추
-이름보다 ‘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별명을 얻게 됐습니까.
“배추는 배추장수의 약자예요. 아 왜 유명한 사람이 되면 단축하잖아요. 두 글자로. 나도 유명해지니까 짧아졌더라고요. 6·25 뒤에 대부분 학교가 폭격으로 부서져 종합학교라는 것을 운영했어요. 여러 학교가 한군데 모여서 공부했지요. 내가 다니던 경신은 대광, 정신여고 등과 함께 인사동 정동교회 쪽에 있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여학생과 한방에서 같이 공부하니까 모양도 내고 면도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뭐 집이 가난해지면서 교복도 못 사입고 베잠방이 한복 반바지에 조끼 같은 민소매 옷 하나 걸치고 다녔죠. 운동은 그때부터 좋아해서 민소매 입어야 몸이 나타나니까. 신발도 그때는 게다짝이라고 했는데 나무판에 못 쓰게 된 타이어 같은 것 못 박아서 찍찍 끌고 다니고, 밀짚모자까지 썼어요. 그러니 배추장수 같다고 여학생들이 붙여준 거예요. 게다가 어렸을 때였지만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한마디로 불량학생이죠.”
-싸움을 조금 하신 정도가 아니라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이라고 불리시잖습니까.
“몇 년 전인가 보니까 학생들 싸우는 영화가 한참 유행하더구먼요? <말죽거리 잔혹사>던가? 참 잘 싸우더라고. 17 대 1로 싸워서도 이기고. 그런데 나는 진짜 17 대 1로 싸워봤어요. 영화에서는 이기던데 난 졌지. 아 도대체 17명을 어떻게 이기느냐고. 저쪽도 날고 기는 놈들인데. 그래서 병원에 한 두어 달 입원했었죠. 요새는 괜히는 안 싸우잖아요. 이해관계가 있다든지 시비가 있다든지 해야 싸우는데 예전에는 그런 것 없이 괜히 싸웠어요. 그때는 전화도 없으니까 상대편에서 쪽지를 들고 나와요. ‘나 영등포 아무개인데, 너 요즘 좀 잘나가더라? 한 수 겨뤄보자’라는 식이죠. 그럼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붙는 거예요. 보통 장소는 지금의 창경궁이었는데 전쟁 때 창경원에 넣어뒀던 동물들이 없어져서 아주 휑했지요. ‘코끼리 앞에서 보자’ 하면 널찍한 코끼리 우리 앞에서 붙는 거죠. 방법은 천하 없어도 1 대 1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힘은 세지만 싸움을 특별히 잘한다고 볼 수 없거든요. 계속 약한 상대들만 걸린 거예요. 그러다보니 내가 이미 센 놈이 되어 있더라고요. 삼국지에서도 보면 자기 나라에서 얌전히 왕 노릇하면 되는데 꼭 옆 나라를 치고 망신당하잖아요? 동네에서 골목대장 하면 유명해질 텐데 제가 유명하다고 하니까 도전했다가 번번이 깨지더라고요. 저는 그러니까 도전자를 계속 받아주면서 센 사람이 되어버린 거죠. 커닝해서 한 번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밤새워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격이지.”
-전쟁 때문에 가난해졌지만 그 이전에는 개성에서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걸로 압니다.
“내가 학벌이 화려한 게 그 당시 유치원을 다녔어요. 개성 주민이 10만명이었는데 개성백화점 하는 사장이 3륜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 집에는 승용차가 한 대 있었죠. 컨버터블 카. 원산만 근처 송전이라는 곳에 우리 별장도 있어서 차 타고 1년에 한 번씩 놀러 갔어요. 우리가 부자가 된 것은 할아버지 덕분이죠.”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됐습니까.
“증조부는 아주 망종이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그때까지만 해도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대요. 할아버지가 아버지인 증조부에 이를 갈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신 것이죠. 할아버지께서 어느날 ‘돈 벌어 오마’라는 말만 남기고 황해도 신천의 운수회사인 부잣집으로 종살이를 하러 갔죠. 개성에는 특별한 관습이 있는데 객지에 나가면 10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죠. 10년이 넘어 돌아오면 개성 시내의 가장 큰 다리인 야다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했어요. 지방색이 강한 것이죠. 할아버지는 9년 만에 돌아왔어요. 5층 건물을 지을 만큼 큰돈을 들고 오셨죠. 그리고 그 건물에 편리화라고 지금으로 치면 구두 공장을 만드셨고 밀짚모자 공장도 했어요. 또 정미소도 했고요. 그렇게 악착같이 모으신 거지요. 저는 그래서 어렸을 적에 항상 구두만 신고 다니고 잡곡밥을 먹은 적이 없어요.”
-어린 시절 부유했다면 돈이나 부에 대한 집착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아 보이십니다.
“저요? 왜 그런 생각을 안 하겠어요. 어떨 때는 나도 노년을 보내려면 최소한 1억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돈을 벌 기회가 생기면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면서 잘 안 됩디다. 최근에도 어떤 사람과 동업을 해볼까 했는데 돈하고 관계가 되면 절대로 더불어 살아지지가 않더이다. 주종관계가 생기고요.”
백기완과의 숙명적 만남과 조선의 3대 구라
-선생님은 재야의 여러 친구분을 역사를 통해 지켜봐 오셨습니다. 처음 그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백기완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이지요?
“그게 19세 때예요. 내 친구가 ‘머리 좋은 너 같은 놈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서 자기 친구 하나를 소개해 줬어요. 그 친구가 당시 백기완하고 친했죠. 그 아이들이 당시 이승만 자유당 때 부패하고 엉망진창이니까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산에 나무 심는 운동도 하고 그랬어요. 겨울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운동을 하고요. 그때 백기완을 처음 만났죠. 참, 내가 보기에는 사람 같지도 않더이다. 바싹 마른 것이. 내가 그때는 힘을 엉뚱한 데 쏟으면서 유명해질 때라 백기완이도 나를 알더라고요.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앉은 채로 올려다보며 ‘네가 배추냐?’ 하더니 ‘너 주먹 한 번에 몇 명이나 쓰러뜨릴 수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한 10명이야 자신 있지’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아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귓방망이’를 때린단 말이야. ‘남자가 주먹을 들면 3000만이 울고 웃고 해야지 넌 10명이 뭐냐. 조자룡보다 못하잖아. 조자룡은 10만 대군을 물리쳤는데’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참 가소롭고 북어대가리 같은 게 내 따귀를 때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그런데 그렇게 맞고 한 일주일을 잠을 못 자겠는 겁니다. 그 말이 자꾸 머리를 맴돌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백기완 똘마니가 됐지. 에이, 그때 그냥 백기완이 몇 대 때리고 나왔어야 내가 지금 조폭 두목이라도 하고 빌딩이라도 갖고 있을 텐데 하하.”
“백기완 만나 평생 가난해…‘주먹’했다면 빌딩이라도 가졌을 걸”
방동규씨는 “재야운동 하는 사람들 안만났으면 지금쯤 조폭 두목이라도 하면서 빌딩 한 채라도 가지고 있었을 텐테”라고 농담을 하며 허허 웃었다. 하지만 그는 “후회는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앞에 다가온 도전은 보디빌딩 전국대회다.
-‘백기완’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인생이 많이 달라졌나 봅니다.
“그 후로부터는 사회가 어떻게 하면 잘살아지는 건가. 전쟁 이후니까 길거리에 가난한 사람들이 오죽 많겠어요? 길거리에. 그런 걸 가슴 아파하기 시작했어요. 나도 배고픈데 나도 잘못된 거지요. 사회 현실에 눈뜨고 싸움 잘 안 하고 책도 보고 꼴값을 하는 거야 이게. 주먹 계통에서는 ‘배추가 돌았다’는 말도 나왔대요.”
-친구가 큰 영향을 끼치고 삶까지 변화시키는 것을 보니까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요새 사람들이 의리가 없어요. 사람이 근본이 되어야지 세상이 좋은 건데 자본과 재산이 근본이 아닙니까? ‘재산이 근본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지면 잡아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그런데 무슨 주의라고 하는 게 ‘자본’이 ‘주의(主義)’가 된다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는 거지. 그렇게 되면 의리도 없고 경쟁에서 이기는 놈이 장땡이고 이기려니 모략하고 배신하고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럼 잘된 놈은 잘된 놈끼리 모이고 안된 놈은 사그라지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정치판에서 날뛰는 사람들 중에도 한동안 감옥에 같이 있었던 애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그쪽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씁쓸하신가요.
“백기완이는 나와 안 맞는 면도 있어요. 두목이라는 것은 안아줘야 하는 것인데 조금만 잘못해도 소리소리 지르고 호되게 하니까 머리 큰 사람들이 그걸 견뎌내겠어요? 그래도 요즘 씁쓸한 건 노나라 때(노무현 정권 당시) 만세 부르던 아이들이 민주투사라고 날뛰었잖아요. 그 아이들이 백기완 사무실을 거쳐간 아이들이거든요. 거의 대부분이 그래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반독재 운동을 한 사람들을 민주 인사로 안다고. 물론 반독재도 좋아요. 그렇지만 ‘민(民)’이 ‘주(主)’가 되는 운동을 한 게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보니까 민주가 진짜 뭔지 모르죠. 민주를 안 하잖아. 못 했잖아. 하고 싶어도 민주가 뭔지 모르니까요.”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재야운동의 흐름을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셨습니다. 자서전에는 백기완 선생이 정치권에 발을 들였을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점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거예요. 당시에 저에 대해서 백기완의 경호실장, 경호대장이라고 소문이 나긴 했는데 저는 기완이 근처에 가질 못했어요. 백기완이 사직공원에서 대통령 민중 후보 수락 연설을 할 때였는데 저는 반대했어요. ‘네가 할 때가 아니다. 도저히 터지지 않으면 안 될 때 나가자. 학생들 몇몇 만세 부른다고 너 찍는 거 아니다’라고. 그런데 그때 나가더라고요. 그 이후로 나는 접근조차 어려워지고요. 학생들, 시민사회 단체 사람들이 되기도 전부터 모여들었죠. 그런데 몇 표 못 받고 망조가 드니까 내가 다시 사무실 드나들게 되고 결국 뒤처리를 했지요. 다 백기완을 떠났죠. 도리어 주먹 쓰고 싸우던 불량자 의리보다 (그들의 의리가) 더 엉성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죠. 의리나 우정을 얘기하면 지능이 낮은 것으로 치죠. 근데 그건 백기완이뿐 아니라 누구나 그렇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조선의 3대 구라’로 유명해진 것도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해 재야 쪽 인사들과 어울리면서부터 아닙니까.
“깡패니 싸움 잘하느니 하는 게 사실 언짢은 일이라도 그걸 갖지 못한 사람들은 동경을 하나봐요. 황석영이나 백기완이나 다른 국회의원들도 자기가 없는 것을 가진 나를 과대포장해서 만들어 놓고 나를 잘 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말을 잘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 바람에 내가 유명해진 것 같아. 황석영과 백기완과 나를 3대 구라라고 하는데 스타일이나 이야기 내용부터가 다르지요. 황석영이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인생파 구라니까요.”
어머니 그리고 노느메기 공동체
-64년 독일에 광부로 가서 일했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한 것입니까.
“우리 어머니가 사위가 쏜 총에 맞았어요. 둘째 동생이 남편하고 헤어졌는데 그때 승강이 때문에 그랬죠. 사실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우연히 시험을 보게 된 것이었는데 어머니가 출국 예정일 바로 전날 그런 일을 당하시니까 난리도 아니었어요. 동생들도 어머니가 이런 상황인데 가면 되겠느냐고. 그런데도 그냥 돈 벌러 가겠다고 했어요. ‘어머니 제발 살아계시라’ 속으로 기도를 하면서 떠났죠. 계속 한국에서의 일들이 떠오르고 오버랩되고 했지만 열심히 일했어요. 술도 끊었죠. 주말에 일을 하면 휴일수당까지 주기 때문에 자청했고, 또 야간에 일하면 야간수당도 붙어서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한 달에 400달러 벌었는데 그때 보통 다른 사람들은 120달러를 벌었죠. 집에 돈을 악착같이 부쳤는데 그 돈으로 도곡동에 국민주택인가 13평짜리 아파트를 샀어요. 어머니도 다행히 기적처럼 깨어나셔서 안정이 되어갔죠.”
-광부 생활이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 무연탄 공장은 넓은 탄광에 들어가서 캐는데 거기는 탄층이 얕기 때문에 누워서 일을 해야 해요. 삽자루를 짧게 잘라서 힘을 주려니 그게 지렛대 원리가 작용할 수 있어요? 무조건 힘을 써야 하는 일이죠. 또 무릎으로 서서 지탱하는 일이 많은데 거의 기어다니는 거예요. 힘들죠. 독일에서는 탄광 천장을 받치는 쇠기둥이 있는데 나올 때 광부가 그걸 가지고 나오면 개당 10달러씩 쳐줘요. 왜냐면 그 받침대가 100달러 정도로 비쌌는데 광부가 그것을 가지고 나오다가 갱이 무너져서 다치거나 죽을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목숨 걸고 비싼 걸 건져오면 수당을 준 것이죠. 그날도 그걸 메고 나오려는데 천장이 내려앉은 거예요.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나면 산 거고 안 깨어나면 죽은 거였는데 눈이 떠지더라고. 그런데 기억이 없는 거예요. 어머니 이름, 내 이름, 여기가 어디인지 등 다 알고는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는 거야. 나와 무관한 것 같고 괴롭고 그랬어요.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네덜란드인 동료가 기억이 돌아오도록 이것저것 얘기도 해주고 그랬나봐요. 보름 만에 돌아왔어요.”
-3년의 광부생활을 마치고 또 바로 프랑스 파리로 가셨습니다. 별다른 계획이나 생활 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때 군사정권이니까 억압적인 분위기지만 외국은 자유스럽잖아요. 게다가 내가 독일에서 3년째 되던 해에 동백림 사건이 있었어요.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죠. 그리고 집에 갈까 했는데 베트남 전쟁이 터졌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프랑스에 가서 공부 좀 하고 들어가자는 생각이 들었죠. 접시닦이 하면서 불어 공부를 했지요. 돌아와서는 ‘살롱 드 방’이라는 양장점을 차렸는데 인기도 꽤 있었어요.”
-돌아와서 바로 노느메기밭을 일구러 강원도로 떠났습니다.
“자급자족해서 삭막하고 각박해지는 이 세상에 서로 함께 산다는 꿈을 품었지요. 노느메기밭은 노나메기에서 나온 말이에요. 수확농산물의 공동분배란 뜻이죠. 그래서 밭 이름도 그렇게 지은 겁니다. 하루에 삽 7개까지 부러뜨려 가면서 직접 개간했어요. 몸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땅이 쓸모 있게 변해가고 그 자체로서 가장 기쁜 나날들이었어요. 제가 철원에 100만평을 얻어서 있던 곳이 580고지인데 산이 평평했어요. 발밑으로 봉우리가 있고 거기에 구름이 쫙 끼곤 했는데 살짝 물러나고 나면 그 위로 해가 비추는 것이 보입니다. 구름이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면서 오색찬란하게 변하는 풍경이 보여요. 그런데 서 있으면 좋지요. 그것도 4년 정도 했나. 빨갱이라고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잡혀가게 됐어요. 재야인사라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하니까.”
-74년 간첩혐의로 잡혀가면서 노느메기밭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들었습니다. 86년에도 또다시 고초를 당했습니다.
“대구 대공분실로 끌려갔어요. 제가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반체제 인사들과 교류했다는 것이었죠. 김일성과 무전교신을 했던 암호를 대라고 하면서 몽둥이찜질과 전기고문을 했죠. 그러고 나서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어요. 6개월 있다가 나왔지만 노느메기밭을 잃은 상실감이 엄청났죠. 이후 86년에는 당시 민주화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김태홍이 ‘말’지의 보도지침을 공개해서 수배됐는데 광주까지 보디가드를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건으로 결국 고문기술자 이근안까지 만났죠.”
-살면서 이것만은 참 후회된다는 순간이 있으세요.
“내 생각에 지금까지 도움만 받고 살았다는 것이 참 후회됩니다. 저를 참 많이 도와줬던 분이 선우휘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에요. 내가 노느메기밭을 꾸리는데 선뜻 돈을 내주었고, 내가 힘들 때면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었습니다. 다시는 선우휘 형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중동에 나갈 때 비자를 받는 일까지도 힘을 빌려야 했죠. 85년에는 선우휘 형이 술병을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어요. ‘네가 동지들 위해서 총대 한 번 메라’라면서 저를 설득했지요. 정권 쪽에 발 하나 들여놓아야 운동하던 친구들 뒤를 봐주고 쌀이라도 사줄 수 있지 않으냐는 거였죠. 다름이 아니라 대통령의 비선에서 일하라는 거였어요. 펄쩍 뛰었더니 ‘내가 얼마나 어렵게 말을 꺼내고 있는 줄 아느냐’며 설득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참 그게 안 됩디다. 내가 소인배니까 배신자, 나쁜 놈 소리 듣기 싫었던 거죠. 선우 형은 ‘아주 큰 그릇은 못 되겠구먼’이라고 하더니 앞으로 그런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그래도 그건 못 하겠습디다.”
-앞으로 남은 꿈은 무엇인가요.
“ ‘그냥 맥없이 살지는 않는다, 뭐라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면 된다는 것을 늙은이가 보여주고 싶어요. 노인들에 대한 정책이 일단 잘 안 되어 있고, 정책이 되어 있다고 해도 노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안 돼 있다고 생각해요. 마냥 지원금만 바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내 생각에는 노인들도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사실은 보디빌딩 대회에도 나가는 것이고요. 서울시 대회에 지난번에 나갔었고 이제 전국대회에 나갈 자격도 얻었습니다. 내년에 도전할 테니 꼭 지켜봐 줘요.”
▲방동규는 누구인가
재야인사와 친분 2차례 고초…파독 광부 등 파란만장한 인생
‘방동규’라는 본명보다는 ‘배추’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48년 서울로 넘어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최고의 주먹’으로 불렸고, 튼실한 체력을 바탕으로 54년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백기완을 만나 구중서, 김태선 등과 함께 나무를 심고 한글을 가르치는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본인은 “이때 잘못된 길로 빠져서 평생 가난하다”고 하지만 이 시절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한 재야인사들과의 우정은 그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파독 광부생활, 파리 유랑생활 등 해외를 떠돌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강원도 철원에 ‘노느메기밭’을 일구고 공동체 생활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74년에는 간첩혐의로 형무소 생활을 했고, 86년에도 ‘말’지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녔다. 이후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중소기업의 중국공장 대표이사를 맡는 등 CEO로 깜짝 변신했고 2001년에는 헬스클럽 강사로, 2005년에는 경복궁 문화재관람 지도위원으로 일하는 등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정동 길목에서]후회없는 풍운의 삶
“그냥, 형님 하시죠.” “어, 이놈?… 그러지 뭐.” 다섯 병째 뚜껑을 열 무렵입니다. 그와 난 25년의 터울을 넘어 그렇게 형님과 아우가 되기로 했습니다.
세 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끝에도 미련이 남아 차마 털고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인터뷰라는 것이 한 시간 남짓, 길어야 두 시간 정도면 끝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날은 조금 달랐지요. ‘구라’라는 별칭에 걸맞은 입심도 입심이려니와 그가 풀어놓는 파란만장한 삶의 실타래에 그만 얽혀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자리를 옮겼습니다. 앉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주부터 시킵니다. 찻집에서보다 더 길고 농밀한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겨울의 초입, 날은 어찌나 짧아졌는지 금세 어두워지고 우리는 땅거미를 친구 삼아 청와대 뒤편 부암동 기슭의 ‘형님 댁’으로 다시 기어들었습니다. 그 시간에 들이닥친 불청객에 짜증날 만도 했지만 졸지에 형수님이 된 그 분은 반갑게 맞아주셨지요. 얼마나 고맙던지요. 조촐한 상이 차려지고 페트병에 든 십년 묵은 과실주를 깨끗이 비웠습니다. 결국 인터뷰는 열 시간을 넘기고도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 뒤의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자리를 함께한(아니 실제로 인터뷰를 진행한) 후배는 다음날 걱정 섞인 말을 건넵니다. “선배, 받아 친 것만 해도 원고지 삼백 장은 넘겠는데요.” 그럴 수밖에요. 그가 풀어낸 인생역정은 장편 소설 몇 권을 쓰고도 남을 듯했으니까요. 이야기를 줄이고 추리는 데에도 후배 고생깨나 했을 겁니다.
그는 참 건강했습니다. 몇 해 전 건강검진에서 신체나이가 서른아홉이란 판정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신체보다 젊은 건 마음과 생각입니다. 그는 지금 빈손입니다. 하나 있던 집마저 십여년 전 중국공장 대표로 근무했던 그 회사가 어려울 때 담보로 잡혀 날려 먹었답니다. 지금 사는 부암동 집은 지인의 도움으로 거저 살고 있습니다. 재야인사들과 가깝게 지낸 탓에 두 차례의 심한 고초도 겪었지만 누구처럼 권력의 언저리에 발을 담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기죽거나 서운한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살아온 지난날이 아쉬움은 남지만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온 풍운의 삶. 시류에 조금만 영합할 줄 알았다면 말년은 좀더 풍요로울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본이 주의(主義)가 되는 게 이상하잖아. 그렇게 되면 의리고 뭐고 없어지고 이기는 놈이 장땡이지. 그러니 모략하고 배신하고…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