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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전설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상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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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힘이 세다.
지금 유명한 영화배우 가운데 35년 뒤에도 팬카페를 거느릴 수 있는 인물이 몇 명이나 있을까? 원더걸스가 35년 뒤에도 팬들을 몰고 다닐까? 35년 뒤에 이명박 대통령을 떠올릴 20대가 많을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독자는 많지 않을 게다. 그러므로 35년 전의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는 더욱 감동적일 것 같다.
‘홍콩스타 이소룡 사망’
【홍콩〓UPI 東洋】 당수 8단의 중국계 남우 이소룡(브루스 리)이 21일 밤 이곳의 한 병원에서 응급가료를 받은 후 사망했다고 발표됐다.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정통한 소식통은 이가 지병인 간질로 2달 전에도 TV스튜디오서 녹화중 발작,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전했다.(<조선일보> 73년 7월22일치 7면)
한 일간지가 35년 전 두 줄 기사로 부음을 전했던 이소룡은 21세기에도 살아남아 끈질기게 ‘이소룡 키드’를 길러낸다. 보도와는 달리 이소룡이 ‘당수 8단’이 아니라 절권도를 만들었음을 이소룡 키드는 잘 안다. 그 시절 이소룡 영화를 개봉관에서 봤던 세대와 지금의 10~30대에게도 여전히 이소룡은 영웅이다.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싱하형’이나 한 보험회사의 광고에도 그가 등장한다. 이들에게 이소룡이 태어난 오늘, 11월27일은 더욱 뜻깊다.
이소룡의 본명은 이진번(李振蕃).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73년 7월20일 홍콩에서 숨졌다. 어렸을 적 홍콩에서 살다 열아홉 살 때 미국에 건너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몇 편의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왔으나 홍콩에서 찍은 4편의 영화로 ‘브루스 리’는 동양을 넘어 세계의 스타가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미국 시민권자였던 ‘경계인’이기도 하다.
시간은 힘이 세다. 그러나 이소룡은 시간보다 힘이 세다. 그의 생일날 〈esc〉가 이소룡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를 살펴봤다. 격투기 전문가와의 대담은 무술가로서의 이소룡을 보여줄 것이다. 문화적 상징으로 끊임없이 소비되는 이유에 대해 문화평론가가 살펴봤다. 다음과 같은 소리를 내면 섹션 첫 장을 더 빨리 넘길 수 있다. “아다~!”
그는 센 인간이었다
격투 전문가와 영화기자의 대담, “다문화 사회의 마이너리티 이소룡과 추성훈은 한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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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은 배우이기에 앞서 혁명적인 무술가였다. 김영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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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은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인간이다. 이소룡의 다양한 모습을 조망하기 위해 격투 전문가와 영화 전문 기자가 대담했다. 김남훈(35) 케이블티브이 수퍼액션 유에프시(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 해설위원은 격투가 이소룡을 조망했다. 김 해설위원은 현역 프로레슬러이며 블로그 ‘인간어뢰의 鬪强導夢(투강도몽)’(blog.naver.com/heavy1.do)을 운영 중이다. <씨네21> 주성철(33) 기자는 액션영화에 조예가 깊다. 이소룡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인 배우 인터뷰로 유명하다. 이 대담은 이소룡이 사라진 시대 이소룡 키드들이 나누는 이소룡 이야기다.
◎ 사회자 고나무 기자(이하 사회) : 이소룡이 숨진 지 35년이 됐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이소룡을 접한 계기부터 말씀해 주시죠.
◎ 김남훈(이하 김) : 저는 중학교 다닐 때까지 이소룡이 살아 있는 줄 알았어요.(웃음) 재개봉을 많이 해서 <정무문>과 <당산대형>을 100번쯤 본 듯합니다. 제가 살던 경기도 송탄에서 영화표 값이 500원이고 자장면이 500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볼까 밥 먹을까 고민했죠. 중학교 가서야 이소룡이 중국인이고 죽었다는 걸 알았죠.
◎ 주성철(이하 주) : 저는 고향이 부산인데 해설위원님처럼 이소룡이 살아 있는 줄 알았어요. 이소룡 영화를 많이 봤고 쌍절곤 들고 다니는 동네 형들이 많았어요. 또 당룡(본명 김태정)이라고 <사망유희>에서 이소룡 대역을 맡은 한국 배우가 있었는데 부산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부산에서는 부산 사람이 이소룡 영화에 나왔다는 게 화제였어요.
◎ 사회 : 김남훈 해설위원님께 먼저 질문 드리자면, 격투가로서 이소룡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김 : 이소룡의 무술은 기존 쿵후의 복잡한 수기 싸움보다 실제로 상대를 타격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실제의 격투술이라는 측면에서 이소룡을 (현대 격투기의) 얼리어답터로 볼 수 있습니다. 펜싱의 찌르기 스타일도 흡수하고 가라테 주먹 쥐는 방법을 흡수하고요, 어렸을 땐 영춘권을 수련하죠. 나중에는 주짓수(유술)도 접합니다. <용쟁호투> 보면 오픈 핑거 글러브(손가락이 노출된 격투 글러브) 끼고 암바(팔꿈치를 꺾는 기술) 거는 장면이 나오죠. 절권도는 여러 무술의 우성인자만 모은 잡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소룡은 어린 시절에 복싱도 배웠죠. 일대일 격투에서 복싱 스텝을 펼치는데, 이런 건 기존 중국 무술에서 볼 수 없던 것이죠. 사실 쿵후가 아니에요. 격투기 트레이너로서도 훌륭했습니다. 이소룡 서재에 책이 2500권 있었는데 상당수가 스포츠 생리학 책이었다고 합니다. 보디빌딩 트레이닝으로 신체가 작은 동양인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근육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웨이더(현대 보디빌딩의 창시자)나 아널드 슈워제네거도 이소룡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는 거고요. 프로틴 음료나 과일주스를 본인이 직접 만들어서 어떻게 몸을 강하게 만들 것인가 연구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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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쟁호투> 촬영중 출연진 스태프와 대화하는 이소룡. 김영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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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이 살아있는 줄 알았어요
◎ 사회 : 현대 종합격투기에 영향을 줬고, 살아 있다면 더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지적이 흥미롭군요.
◎ 김 :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 “절권도를 수련했다”는 격투기 선수가 없는 이유는 이소룡이 없다는 데 기인하기도 합니다. “이소룡이 강한 거냐, 절권도가 강한 거냐”가 아니라, 이소룡이 원래 강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해요. 복싱이 세서 마이크 타이슨이 연승행진을 한 게 아닌 것처럼요.
◎ 사회 : 지금 종합격투기 경기를 보면 절권도를 베이스로 했다는 타격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 김 : (웃음) 절권도 베이스도 유에프시 초창기에는 있었습니다. “지쿤도(절권도)를 수련했다”며 한 손에는 오픈 핑거 글러브를 끼고 한 손은 맨손으로 나온 선수도 있었죠. 복싱·가라테처럼 큰 규모의 무술은 흥행이 발달하면서 끊임없이 기술과 훈련법이 발달합니다. 그런데 절권도는 미완의 상태로 끝났고 이소룡이 숨진 1973년과 지금 사이에는 35년의 간극이 있죠. 종합격투기가 엄청 발달해 버렸어요. 지금은 믹스트 마셜 아츠, 즉 무술을 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 절권도는 ‘올드 스타일’이 된 거지요. 현대 종합격투기 규칙으로 경기하면 당시 절권도 고수라도 지금의 국내 격투기 선수도 못 이길 겁니다. 허리 아래를 공략하는 하단 태클에 대한 방어기술이 없고 지나치게 타격 위주여서 클린치 싸움에 대한 대비책도 없습니다.
◎ 사회 : 이소룡의 60년대 영상을 보면 앞발로 복싱의 잽처럼 상대방의 무릎을 빠르게 차는 동작이 나옵니다. 이런 발차기가 지금 종합격투기 경기에서 안 나오는 이유는 뭐죠?
◎ 김 : 나오긴 하는데 선수 사이에 수준 차가 클 때 나오죠. 지금 선수들이 상향 평준화돼서 그런 기술에 안 속고 맞아도 큰 충격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소룡이 살아 있다면 당시 옆날차기가 신선했던 것처럼, 지금 와서도 새로운 걸 보여줬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이소룡은 추성훈 선수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추성훈 선수는 재일동포로 태어나 다민족, 다문화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죠. 이소룡도 혼혈입니다. 외할머니가 독일 사람이죠. 미국에서 태어나서 홍콩에 갔고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홍콩 쿵후 도장에서 이소룡을 문하생으로 안 받아줬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흑인에게는 햄버거도 안 팔던 60년대 미국에서 영화 활동을 한 거죠. 추성훈 선수처럼 이소룡도 그러면서 성장한 것 같습니다. 그런 내력이 무술에도 영향을 준 게 아닐까요? ‘뿌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상대를 때리는 게 중요하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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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정무문> 개봉 당시 홍콩 극장 앞. 김영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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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권도는 여러 무술의 우성인자만 모은 잡종
◎ 사회 : 액션 배우로서 이소룡을 어떻게 보시나요.
◎ 주 : 김 해설위원님 말씀 중에 “이소룡이 원래 센 인간이었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제가 홍콩 무술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소림사 영화입니다. 소림사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서는 수련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소룡 영화에서 이소룡은 원래 센 인간으로 나옵니다. 이소룡 이전에 무술 영화를 많이 찍은 호금전이나 장철 감독의 영화에서는 편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소룡은 편집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몸 풀고, 때리고, 쓰러뜨리고, 소리 지르는 장면을 편집 없이 갔죠. 홍콩 무술 영화에 없던 사실주의 전통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 등 외세와의 대결을 끌어들여 중국인에게 자긍심도 줬죠. 호금전 감독 영화에 무술감독을 자주 맡은 한영걸이 <당산대형> 마지막에 이소룡에게 패배해 죽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어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과 무술에 관한 선문답을 주고받는 선사가 호금전의 영화 <협녀>에 대사로 나옵니다.
◎ 김 : 위키피디아에서 ‘브루스 리’를 검색하니 57개어로 나와있더군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약 120개어로 프로필이 나와 있는데 말이죠. 단적으로 오바마 1/2 파워라는 거 아닙니까?(웃음)
◎ 주 : 요즘 영화랑 연결해 보면 <본…> 시리즈가 있습니다. 3편 <본 얼티메이텀>에서 격투 코디네이터가 제프 이마다인데, 댄 이노샌토(이소룡의 친구이자 제자)와 친분이 있습니다. <본…> 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이 보인 격투 스타일은 이전 할리우드랑 다릅니다. <매트릭스>의 무술을 지도한 원화평과도 다르죠. 제프 이마다 인터뷰를 보면 “필리핀 무술 칼리에 이소룡의 무술을 섞었다”고 설명합니다. 지금 가장 각광받는 액션 영화에 이소룡의 스타일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니 ‘이소룡 참 오래간다’는 생각도 들고 이소룡의 격투 스타일이 현대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프 이마다 위에서 무술을 총괄한 게 스턴트 코디네이터 댄 브래들리인데 <본 얼티메이텀>의 무술을 담당한 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무술을 맡죠.
<본…> 시리즈 안에 이소룡 있다
◎ 사회 : 이소룡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요?
◎ 주 : <맹룡과강>의 콜로세움 격투 장면과 <용쟁호투>에서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용쟁호투> 장면에서 이소룡이 가진 고독함과 자존심이 드러납니다. 이소룡의 개인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같아요.
◎ 김 : 이소룡 영화는 지금의 격투기와 어울리는 장면이 많습니다. <용쟁호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장면은 옥타곤(미국 종합격투기 대회 유에프시의 팔각형 링)에 선수가 걸어들어가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이소룡이 만든 싸움에 대한 콘셉트, 즉 남자와 남자가 싸운다는 모양새는 지금도 촌스럽지 않습니다.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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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훈(35·왼쪽) 케이블티브이 수퍼액션 유에프시(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 해설위원과 <씨네21> 주성철(33·오른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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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절곤이 처음 등장한 영화는? |
이소룡의 이해를 돕는 영화와 책, 팬 카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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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의 영화 : 1971년 개봉한 <당산대형>은 이소룡의 첫 영화 출연작이자 출세작이다. 타이에서 저예산으로 촬영됐다. <정무문>에는 이소룡의 상징이 된 쌍절곤이 처음 등장한다. 72년 개봉한 세 번째 작품 <맹룡과강>은 홍콩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유럽 로케이션을 한 작품이다. 영화 디브이디를 인터넷 교보에서 아류작과 함께 묶어 1만9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용쟁호투>에는 무명 시절의 성룡과 홍금보가 나온다. 영화 디브이디를 지마켓(3900원)과 인터파크(2900원)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소룡은 유작 <사망유희>의 불탑 격투 장면을 <용쟁호투>를 찍기 전에 촬영했다. 그러나 도중에 숨진 탓에 한국인 배우 김태정이 나머지 부분에 대역으로 출연했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네 편이 담긴 디브이디 박스세트는 품절됐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사망유희>를 묶은 비디오 박스세트는 지마켓에서 1만98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 이소룡의 책 : <절권도> 상·하(서림문화사·각 9000원)와 <이소룡 자신감으로 뚫어라>(인간희극·9800원)가 판매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책들은 그가 직접 쓰지 않았다. 메모·일기 등을 사후에 지인이 편집해 출판했다.
⊙ 이소룡 전기 영화·책 : 베이스기타 연주자 겸 저술가인 브루스 토머스가 쓴 전기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김영사·2만6000원)가 이달 출판됐다. 꼼꼼한 취재와 자료조사로 인간 이소룡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93년 개봉한 영화 <드래곤>은 전기 영화를 표방했지만 실제 이소룡의 삶을 많이 왜곡했다.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유하·문학동네)는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시인 유하의 문화에세이다. 지금은 절판됐다.
⊙ 이소룡의 아들·딸이 나온 영화 : 이소룡의 아들 브랜던 리는 액션 영화 <리틀 도쿄> <크로우> <래피드 화이어> 등에 출연했다. 93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크로우>를 찍다 촬영 소품인 권총 오발 사고로 숨졌다. 딸 섀넌 리(39)도 저예산 홍콩 액션 영화 <엔터 더 이글> 등에 출연했다.
⊙ 이소룡 팬카페 : 네이버 카페 ‘이소룡 월드’(cafe.naver.com/lxl.cafe)에 이소룡이 단역으로 출연했던 미국 드라마 <그린호넷>과 <롱 스트리트> 영상 등 자료가 많다. 다음 카페 ‘장사의 쌍절곤 배움터’(cafe.daum.net/jangsas)는 회원이 4만여 명이며 정모(정기모임)·번개 등을 통해 서로 쌍절곤 실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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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럽다 비웃어도 지켜줄거야 |
절대적 무술영웅에서 싱하형, 평화의 아이콘까지…이소룡은 어떻게 세계인들을 사로잡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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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 이미지는 끊임없이 재생한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는 권상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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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술이 경지에 이르면 도술이 된다고 했던가? 분신술에 둔갑술을 더하니, 과연 그가 언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가 없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대한민국 학교 전부 ‘족구’하라 그래!”라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권상우,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도 눈부신 ‘기럭지’를 감추지 못하는 <킬빌>의 우마 서먼, “굴다리 밑으로 뛰어와라”고 소리치는 ‘디시 인사이드’의 싱하 형, 보험회사 광고에서 “싸대~”를 외치는 무술인…. 이 모든 게 그의 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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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빌>에서 우마 서먼이 입은 점프슈트는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이 입은 옷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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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절곤 들고 뛰어다니다 몸살나 아랫목행
1971년 <당산대형>으로 시작된 이소룡의 영화인생은 불과 다섯 편의 작품으로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절대적인 카리스마는 수십년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온갖 반향을 만들어냈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소룡을 즐겼고, 각 시대들 또한 그를 섬겼다, 무시했다, 놀렸다 하며 자기들만의 이소룡 아이콘을 빚어냈다.
1970년대의 이소룡은 절대적인 무술 영웅이었다. 그 이전에도 홍콩이나 할리우드에 무술가들이 등장하는 액션 활극이 있었지만, 이소룡은 이 장르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다. 절권도라는 실전형 무술이 보여주는 사실감에 “아비요~!”라는 괴조음과 결합한 비장한 허세는 동시대의 청년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한국에서도 소위 ‘이소룡 키드’라는 세대가 등장했다. 골목길에서 대충 걸친 트레이닝복 바지에 웃통을 벗어던지고 쌍절곤을 휘두르는 남학생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가진 자와 힘센 자에게 억눌린 그 시대의 청춘들이 이소룡을 통해 폭압에 맞설 용기를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소룡의 요절 이후, 1980년대에는 여기저기서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무술 스타들이 튀어나왔다. 홍콩에서는 <오복성>, <프로젝트 A> 등을 통해 홍금보, 성룡이 인기를 모았지만, 애크러배틱한 무술 코미디 스타일은 감히 대사형 이소룡에게 도전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랄프 마치오 주연의 <베스트 키드>(The Karate Kid)가 동양 무술을 통해 나약함을 떨쳐버리는 소년의 이야기로 3편까지 시리즈를 이어갔다. <맹룡과강>에서 이소룡과 콜로세움 격투 장면을 펼친 척 노리스는 <델타 포스> 등을 통해 ‘돌려차기로 시작해 돌려차기로 끝나는’ 미국판 무술영화들을 선보인다. 일본에서는 만화 <드래곤볼> <북두의권>, 비디오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등이 이소룡이 <용쟁호투>를 통해 만들어낸 종합격투대회의 개념을 이어받았다.
쌍절곤을 들고 뒷산 약수터를 뛰어다니던 고등학생들은 대체로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아랫목에 앓아누웠다. 우후죽순 솟아나오던 무술영화의 붐도 곧 사그라들고, 이소룡 키드들은 자신들이 열광했던 세계를 부끄러워하며 숨어들게 된다. 할리우드에서도 저예산 무술영화들은 레이건 시대의 낯뜨거운 패권주의적 유물로 재빨리 폐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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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시인사이드에서 인기를 끌었던 싱하형. 한겨레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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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1990년대의 비디오가게에서도 이소룡의 영화를 찾는 팬들은 꾸준히 있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촌스럽다”는 악담 속에서도, 아니 바로 그 악담 때문에 자신만의 마이너리티 영웅을 지키고 싶었던 거다. 이소룡은 이렇게 아궁이 밑바닥의 숯처럼 웅크린 채 서서히 몸을 덥혔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무지갯빛 섬광의 스펙트럼으로 부활하고 있다.
성룡과 이연걸은 오랫동안 ‘이소룡의 후계’라는 명함을 들고 할리우드를 기웃거려 왔다. 그러나 홍콩의 ‘본좌’는 흔들림 없이 주성치였다. 홍콩 거주민들만이 정확히 공감할 수 있는 저예산 코미디를 이어오던 그를 국제적인 스타로 만든 데는 여러 전환의 계기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소림축구> <쿵푸 허슬>의 대외적 성공에는 본질적으로 이소룡 영화에 대한 향수와 그 국제성이 깔려 있다. 오직 이소룡을 닮았다는 이유로 캐스팅된 <소림축구>의 골키퍼, 길거리 걸인에게 산 무술 비법서를 보며 절대고수의 꿈을 꾸는 <쿵푸 허슬>의 주성치는 이소룡 키드의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 미래 에스에프인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무술 장면이나 우마 서먼이 <사망유희>의 노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등장한 <킬빌>도 그에 대한 오마주다. 이제는 대놓고 이소룡을 숭배하는 게 메이저 문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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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보험회사의 <정무문> 패러디 광고. 흥국쌍용화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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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디오가게 마이너 스타에서 메이저 문화로 부활
그럼에도, 이 시대의 이소룡이 전설적 영웅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뒤늦게 이소룡을 만난 세대들에게 그의 표정과 연기는 우스꽝스러운 과장으로 다가오기 쉽다. 디시인사이드의 잘림 방지용 사진으로 등장한 ‘싱하형’의 모습은 원래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이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악한을 처치하면서 회환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임팩트 강한 이미지는 패러디의 소재로 즐겨 등장한다. 보험회사 광고에 그의 영화 장면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사실 철저한 중화 영웅이다. 그는 중국인들이 핍박받는 타이(당산대형), 일제 치하의 중국(정무문), 이탈리아(맹룡과강), 홍콩 인근(용쟁호투)에 혈혈단신으로 달려가 그들의 울분을 주먹으로 해결해 준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서 중화민족주의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유럽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도시 모스타르의 한 공원에는 황금빛 이소룡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지역은 오랜 인종분규로 고통을 받아 왔는데, 모든 인종과 민족들이 함께 추앙할 수 있는 존재로 이소룡을 택한 것이다. 이제 이소룡은 세계 평화의 아이콘이다. 이명석/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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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우리 싸부님!! |
10대에서 40대까지 세대별로 말하는 ‘이소룡과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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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이 숨진 지 35년이 지났다. 그러나 이소룡은 여전히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다. 네이버 카페 ‘이소룡월드’(cafe.naver.com/lxl.cafe)의 10~40대 회원한테서 ‘내게 이소룡은 무엇인가’를 들어봤다.
⊙ 10대 : 초등학교 입학하던 1998년 2월 내 생일날, 아버지는 선물로 비디오 하나를 주셨다. 그것을 재생하던 순간, 나는 최근 10년 동안 사부이자 ‘솔메이트’인 이소룡을 처음 만났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를 존경하게 됐다. 그 뒤 한 달에 한 편씩 이소룡의 영화를 습득해 나갔다. 유작인 <사망유희>를 먼저 보긴 했으나, 순서는 중요치 않았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난생처음 티브이 화면이 사람의 동작을 담아내기에 부족한 공간임을 깨달았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절도 있게 힘이 실려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순응하는 액션을 펼쳤다. 제아무리 성룡·견자단·이연걸이 날고 뛰어도 이소룡의 액션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철학. 이소룡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홍콩에서 보낸 유년기 때 영춘권에 심취하며 무술의 의미를 되새겼고 커서는 부상으로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무술의 근본을 탐구했다. 무술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다. 이소룡은 말만 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가였다. 세월이 흘러 이소룡을 만난 지 10년이 되어간다. 내 8살 생일을 축하해 준 이소룡. 그리고 지금까지 나의 사부이자 솔메이트가 되어 준 이소룡. 이제 내가 그의 생일(11월27일)을 축하해 주련다. 해피 버스데이, 브루스 리!/이형준(17·남)·고등학생·닉네임 맘마형준.
⊙ 20대 : ‘비 워터, 마이 프렌드’(Be Water, my friend). 제 휴대전화 대기화면에 있는 글입니다. 이소룡이 생전에 했던 인터뷰 중 유명한 말이었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의 무술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브루스 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 애쓰셨을 불멸의 무술 ‘절권도’와 영화 속에 나타내려고 하셨던 깊은 철학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고3 때 그의 참모습을 본 뒤 브루스 리는 제 인생에서 불멸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훗날 제게 죽음이 온다면 저는 가장 먼저 브루스 리를 찾아갈 것입니다./김지은(20·여)·대학생·닉네임 adora.
⊙ 30대 : 처음엔 영화 속 재빠른 무술 실력을 보고 감탄했고 깊은 철학에 또다시 감탄했으며 이소룡은 나를 사로잡은 유일한 남자가 됐다. 단지 배우가 아닌 그 이상이었기에 꾸준히 나 같은 팬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이소룡 때문에 처음으로 운동을 하며 그의 완벽한 몸매를 따라가 보려고 했고, 이젠 나름 잔근육을 자랑한다. 누구보다 목표를 위해 살았던 이소룡은 결국 목표를 성취해낸 멋진 남자다. 이소룡은 내게 영웅이며 필요할 때 용기를 북돋아주고 열정도 나눠준다. 끝까지 적극적이던 그의 삶의 자세를 조금이라도 본받아 어떤 일이든 100% 노력하는 자세로 살고 싶다./박상선(30·남)·보험설계사·닉네임 드래곤.
⊙ 40대 :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한 <정무문>을 보고 강렬한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팬이 된 뒤 하루도 그를 잊지 않고 살아왔다. 부모가 왜 좋으냐 묻는 것이 우문이듯, 이소룡은 이제 나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인지 모르겠다. 영화 속 이소룡은 언제나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으며 팬들의 가슴속에도, 나의 가슴속에서도 그는 살아 있었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사람 이소룡. ‘평화와 정의’라는 희망의 상징으로 이소룡과 상관없는 어떤 나라에선 이소룡 동상을 세우는 현상도 일어난다. 어떤 이는 이소룡의 끝 모를 자신감에 경외감마저 느낀다 했다. 이소룡은 생전에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으며, 주변인들은 그에게서 기(氣)를 받듯 에너지를 느꼈다 한다. 나에게도 이소룡은 끝없이 배워야 할 스승이며 살아가는 에너지이다. 언제나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선사하는 영웅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행복이다.
/신춘성(45·남)·디자이너·‘이소룡월드’ 카페지기·닉네임 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