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들 한글 얼마나 썼나
[서울신문]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뒤쥭박쥭(뒤죽박죽)' 같은 한글 표현이 들어 있다. 적당한 한문 표현이 생각이 나지 않자 성미 급한 정조가 한글을 그대로 적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글 표현이 익숙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조의 편지첩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조선의 왕과 사대부가 한글을 얼마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얼마나 썼는지 새삼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조선의 역대 왕은 적지 않은 한글편지를 남겼다. 선조가 1603년 딸인 정숙옹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마마(천연두)를 앓고 있는 동생 정안옹주를 걱정하지 말라는 배려가 담겨 있다. 숙종이 1680년경 누이인 명안공주집에 다니러 가 있는 어머니 명성왕후(현종비)에게 보낸 편지에는 완곡하지만 환궁을 재촉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인 1641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는 함께 끌려간 척화파의 거두 청음 김상헌을 걱정하는 대목이 보인다.
정조의 한글편지는 모두 세 통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가 왕세자의 맏아들인 원손(元孫)시절 숙모에게 보낸 편지와 세손(世孫·왕위를 이을 왕세자의 맏아들)에 책봉된 뒤 숙모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42세 때인 1793년 홍참판댁에 보내 편지가 그것이다. 특히 8세 이전으로 추정되는 원손 시절 정조의 한글 필적은 글씨가 아직 익숙지 않은 듯 삐뚤빼뚤하지만, 홍참판댁에 보낸 편지를 보면 정조는 한문 이상으로 한글도 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왕이 쓴 한글편지는 대부분 여성에게 보낸 것이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당연히 한문을 썼지만 가족 같은 사적인 영역이나 여성과는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양반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부인에게 보낸 40통 남짓한 한글편지가 남아 있다. 또 16세기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만든 '한글 커닝페이퍼'도 전해진다. 사서삼경의 핵심적인 한자 문구를 작은 종이에 적은 뒤 한글로 뜻을 풀이해 놓은 것이다. 양반들에게도 한문이 일상화되기는 했지만 한글이 훨씬 쓰기에 편했음을 보여준다.
호로자식..정조 편지 '18세기 인터넷' 보듯
[머니투데이]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다",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 내용이다. 왕이 과연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실제 정조가 친필로 썼다.
10일 성균관대 동아이상학술원에 따르면 최근 공개된 정조가 쓴 299통의 편지(정조어찰첩)는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것으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년)에게 보낸 것이다.
어찰 299통 중 3건을 제외하고 모두 정조의 친필인 것으로 알려졌다. 심환지와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은 데다 다른 각료들과도 이런 서신을 주고받았을 것임을 고려하면 정조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써낸 것이다. 심환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찰을 고스란히 보관했다.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 어찰의 작성 시기도 명확하게 남겼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관계자는 "비밀편지에는 국왕과 대신 사이에 국정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고 첩보를 수집하고 여론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담겨 있다"며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쓸 수 없는 통치자와 권력자들 사이의 암투와 흑막 등이 실려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심환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 같은 기밀도 편지 첫머리에 써서 알려줘 심환지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려 했다.
어찰집 연구에 참여한 서울대 백승호 교수는 "정조어찰첩을 보면서 정조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신료들이 자신의 뜻을 몰라줄 때는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조는 남인 시파라고 해서 다 옹호한 것도 아니고, 노론 벽파라고 해서 다 배척한 것도 아니다"며 "정조는 당파적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바른 인물을 포섭하고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조 비밀편지 공개’ 여진
[서울신문]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의 발굴로 정조가 독살됐을 가능성은 희박해졌다는 게 자료 분석에 참여한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다. 하지만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측은 여전히 비밀편지가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는 증거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의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독살"→사망한 날 심환지 영의정에
정조 독살설은 조선시대 남인들이 제기한 적이 있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유포된 건 소설과 대중역사서에 힘입은 것이다.
독살설을 제기하는 측은 '정조실록'에 정조의 발병 기록이 사망 24일 전인 6월14일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을 들어 정조와 적대적이었다는 정순왕후와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 벽파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독살을 감행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조가 사망 1년 전인 179 9년 7월7일 외사촌 홍취영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벌써 건강에 커다란 이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정조는 사망 13일 전에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를 세우고자 탕제를 내어 오라는 탑교(榻敎·명령)를 내렸다."고 썼다. 정조가 시종일관 자신의 병세를 극도의 비밀에 부쳤음을 알 수 있다.
●"낭설"→집권 시파서도 제기 안해
저서 '정조대왕의 꿈'에서 정조 독살설의 허구성을 분석했던 유봉학 한신대 사학과 교수는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집권 시파에서도 제기하지 않은 낭설에 불과하다."면서 "소설적 상상력의 소산물이 사실(史實)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조선왕 독살사건'의 지은이인 이덕일씨는 "이번 편지에서 병에 걸린 정조가 사후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정조가 사망한 바로 그날 정순왕후 김씨가 인사를 바로 단행해 심환지를 영의정에 임명한 점을 들어 여전히 독살설에 무게를 실었다.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정도 독살설에 불을 붙였던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해석해도 편지는 (독살에) 심환지가 연루되지는 않았을 가능성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한걸음 나아가 "당시 간찰은 지금의 전화에 가까운 일상적인 통신수단으로 구어적인 표현이 있다고 해서 정조와 심환지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했다.
한편 비밀편지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정조 독살설로 쏠리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9일 기자회견에서 독살설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정조 어찰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당대 정국 동향을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라면서 "독살설이 어찰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노숙인이 홈리스라고? (0) | 2009.08.26 |
---|---|
[스크랩] 훈민정음 창제와 왜곡된 진실 6쪽 (0) | 2009.08.14 |
지금은 한글세상 (0) | 2009.01.24 |
영어에 환장한 대한민국 (0) | 2008.11.20 |
"교과부는 초등 영어 수업 확대 추진을 즉각 중단하라!" (0) | 2008.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