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들의 무덤’ 아프간과 오바마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미처 한 달도 되지 않은 2009년 2월 초순에 미국 행정부 안팎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해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견해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오바마가 당선자 시절부터 외교 정책의 최상위에 올려 놓은 구상이 임기 초부터 그를 심란하게 만든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재원을 마련해야 하고, 유럽연합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나라들과 함께 대책을 세워야 하는 마당에 언제, 어떻게 마무리 될지도 모르는 아프간 전쟁이 가뜩이나 바쁜 오바마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혼자서 벗어날 수 없는 아프간
미국의 리처드 홀브룩 파키스탄 · 아프가니스탄 특사는 2월 8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연례 국제안보정책회의에서 “개인적 견해로는 이라크보다 아프간 상황이 더 힘들다고 본다”고 말했다. 외신 보도를 보면, 그는 “아프간에는 마법 주문도, (보스니아 내전을 끝낸) 데이턴 협정도 없다”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행정부 안의 협력을 늘리고, 나토와 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제임스 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과 함께 뮌헨 회의에 참석한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미 중부군 사령관 역시 “아프간사태 해결은 쉽지 않다”며 더 많은 지상 병력과 항공기, 의료시설, 공병대원, 훈련교관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존스 보좌관은 “아프간은 미국만의 고민이 아닌 전세계적 과제”라며 “(그렇기)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는 나토와 아프간, 파키스탄 정부와 목표 달성을 위해 새로운 포괄적 전략을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앞서 아프간 증파 전에 전략을 재검토할 수 있도록 국방부에 지시했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보도했다. 오바마는 1만7,000명을 추가로 파병하는 방안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파병의 필요성을 촉구한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라데크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은 “치안 상황 해결이 시급하다”고 강조했고, 존 허튼 영국 국방장관도 “나토는 전시 상황에 대해 각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프랑스의 에베르 모랭 국방장관은 이날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미 (아프간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 부었다”라며 추가 파병 가능성을 배제했다. 영국도 추가 파병에 대해 확답하지 않았다. (<경향신문> 2009년 2월 10일자, 박지희 기자의 기사)
위의 기사는 아프간 전쟁이 얼마나 무거운 미국의 짐이며, ‘우방들’의 힘을 더 이상 빌리기 어려운 문제인가를 잘 전해주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다음으로 아프간 전쟁의 상위 책임자인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중부군 사령관과 동행한 홀브룩 대사가 그 전쟁을 ‘마법’으로도 풀기 어렵다고 말한 것은 미국의 고민을 여실히 알려 준다.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자 마자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가장 신경을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이 ‘9 · 11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한 알카에다를 소탕하고 그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하거나 사살하고 나면 그 전쟁을 깨끗이 접고 그 나라에서 철수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 미국의 고민이 있다.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 은신하고 있다고 알려진 빈 라덴이 쉽사리 잡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는 데 ‘달인’이 되다시피 한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특수부대나 보병과 최첨단 무기만으로는 추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작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친미정권보다 국민의 지지를 훨씬 더 받는 탈레반 세력을 두고 미군이 철수한다면, ‘국익’과 관련해서 아무런 소득도 못 거두고 그 중요한 아프가니스탄을 포기하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없는 에너지 요충지
미국 대통령으로서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힘을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에너지 주도권을 지키거나 확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프간은 나라 자체가 천연가스와 광물이 풍부할뿐더러 인도양과 연결되는 에너지의 중추적 통로이다. 아프간을 장악하지 못하면 중동과 서남아시아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에너지 경쟁’에서 패권을 잡기 어렵다. 1970년대 말부터 외세가 아프간에서 일으킨 전쟁들은 바로 그런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이 1979년 12월 4일에 대군을 침투시켜 시작한 전쟁은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 (New Great Game)의 대표적인 보기였다.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불을 댕긴 이 싸움은 그의 생전에 아무런 소득도 없는 살육과 소모전으로 계속되다가 그의 사후에는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로 바통이 이어진다. 그 전쟁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철수시킨 사람은 소련의 첫 대통령 직함을 가진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다. 그때가 1989년 2월 15일이다. 그 뒤 1991년 12월에 소련이 해체된 원인 중에서 아프간 전쟁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지적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그레이트 게임은 원래, 19세기 초에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서 전략적으로 경쟁하면서 충돌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 뒤에는 영국과 소련이 아프간에서 벌인 경쟁을 지칭한다.)
무자헤딘(아프간 민병대)과 민간인 1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3백만여 명이 부상한 데 비해 소련군은 1만5천여 명이 전사하고 47만여 명이 다쳤다. 1979년에 아프간의 인구가 1,300만여 명이었으니 국민의 30% 이상이 죽거나 다친 셈이다. 그것은 소련이 아프간에서 벌인 ‘베트남전의 재판’이었다. 미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59~1975년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5만8,000여 명이 숨졌다. 그러나 베트남 남부와 북부에서 3백만~4백만,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는 150만~2백만의 희생자가 났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하노이의 베트남 정부는 ‘국민들의 사기를 걱정해서’ 전쟁의 인명 피해에 관한 자료를 발표하지 않다가 종전 20 년만인 1995년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민족해방전선(속칭 베트콩)을 포함해서 1백10만여 명이 전사하고, 60만여 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내내 개입의 정당성에 관해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았는데, 소련은 왜 그런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같은 길을 따라갔을까? 그런데 2001년에는 부시의 미국이 아프간에서 다시 소련을 따라가서 벌써 9년째나 싸움을 하고 있으니, 몽매한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인가?
부시의 아프간 공격,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
노엄 촘스키는 최근 우리말로 옮겨져 나온 책에서 미국이 일으킨 아프간 전쟁은 미리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아프가니스탄 폭격은 탈레반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이 시작되고 3주 후에 만들어진 사후 설명이지요. 아프가니스탄 폭격은 매우 명료한 위협, 즉 ‘너희들이 오사마 빈 라덴을 우리에게 넘기지 않으면 폭격으로 쑥대밭을 만들어주겠다’는 위협이었어요.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범인을 넘겨달라는 명시적 요구도 없었지요. 사실 탈레반은 증거가 제시되면, 적절한 방식으로 빈 라덴을 가령 제3국으로 넘겨주겠다는 취지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어요. 그러한 제스처가 과연 진지한 것이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거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히 거부되었어요. 왜냐하면 폭격한다는 계획이 이미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 데이비드 바사미언 인터뷰, 장영준 옮김. 2009년 1월, 시대의 창, 138쪽)
‘부시 2세 행정부의 아프간 폭격이 미리 만든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은 관련 정보들을 샅샅이 뒤지는 것으로 유명한 촘스키의 단언이라서 신빙성이 높다.
아프간 폭격은 1964년에 일어난 ‘통킹만 사건’을 연상시킨다. 당시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 어뢰정이 그해 8월 2일과 4일 두 차례에 걸쳐 통킹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어뢰정을 공격했다고 발표한다. 미국 의회는 8월 7일 ‘통킹만 결의’를 하고,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북베트남 폭격을 명령하면서 미군 18만여 명을 베트남 전쟁에 투입한다.
그러나 1971년에 <뉴욕 타임스>가 국방부 기밀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단독 보도함으로써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조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보도의 진실 여부를 둘러싸고 오랜 공방이 벌어졌는데, 2005년 12월에 공개된 미국정부 문서에서 뉴욕 타임스의 보도가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 북베트남의 공격이 전혀 없었는데도 국가안보회의(NSC)가 조작된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은 바로 그 1965년부터 확대되는데, 한국의 박정희 정권도 연인원 수십만 명의 군인을 그리로 보낸다.
오바마가 아프간에서 벗어나는 길
인도의 고위 외교관이었던 M. K. 브하드라쿠마르는 2008년 12월 20일자 <아시아타임스>에 기고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라는 글에서 “오바마가 진정으로 아프간의 유혈 참사와 고통을 끝내고 테러리즘을 영원히 근절시키고자 한다면 미국의 안보 정책을 주무르는 군산복합체, 석유 대기업, 냉전적 기득권 등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2008년 12월 31일자, 황준호 기자의 기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침략자들의 무덤’이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 주류세력의 거대한 철옹성 안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2월 17일, ‘악화되는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등 긴급한 안보 필요에 대한 대처’라면서 미군 1만7,000명을 아프간에 추가로 파병하는 것을 승인했다. 해병 8,000명, 육군 4,000명, 지원병력 5,000명을 8월까지 차례로 증파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프간 주둔 미군은 3만8,000명에서 5만5,000명으로 늘어난다.
오바마가 증파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아프간이 ‘오바마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아프간은 소련과 영국이 점령했다가 치욕의 패배를 겪고 물러난 곳이다. 미군 침공 7년이 지났지만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이끄는 친미 아프간 정부는 통제 능력을 잃었다. 탈레반은 아프간의 72%를 장악하고 수도 카불을 위협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오바마가 이라크에서 조기 철군 약속을 이행하기도 전에 아프간에 추가로 파병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위험을 동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9년 2월 19일자 <한겨레>, 김순배 기자의 기사에서)
포용성 있고 겸손한 태도라면
오바마 대통령 혼자서 미국의 거대한 기득권 세력과 싸워서 아프간 전쟁을 끝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바마-바이든 플랜’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바마가 국제사회에서 부시 1세와 다른 면모를 보일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나는 그가 넓고 크게 전략적 사고를 하면서, 참모들과 함께 겸손한 자세로 약소국들을 대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오바마가 취임한 뒤 처음으로 2009년 2월 9일에 연 기자회견을 보면 그런 움직임이 드러난다. 그는 “국가안보팀이 대이란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고, 건설적 대화를 나누며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을 찾고 있다”면서 이란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79년에 일어난 이슬람혁명 이후 30년이나 외교관계를 끊고 사실상 적국으로 지내온 중동의 강국 이란을 오바마 행정부가 비적대적 국가로 만들 수 있다면 아프간 전쟁의 실마리가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부시가 대화를 거부하면서 ‘악의 축’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은 것에 비하면 오바마의 자세는 완연히 다르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서도 그런 유연성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미국의 대표인 오바마가 겸손하고 포용력 강한 태도로 국제문제에 접근해야, 주로 미국의 일방주의 때문에 일어난 전쟁과 갈등이 차츰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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