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시대와 남북관계
7.6.1. 남한의 대북정책이 걸어온 길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틔우려고 하는 초봄이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어김없이 벌어지는 ‘연례행사’가 있다. 남쪽에서는 대규모의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시작되고, 북쪽에서는 ‘북침전쟁 연습’이라는 선전공세가 펼쳐진다. 2009년 3월에는 그것이 아주 살벌하게 전개되었다. 한국군과 미국군이 ‘키 리졸브’(Key Resolve)라는 이름의 군사훈련을 하기로 한 9일부터 20일까지 12일 동안 북한이 남북간 군사통신을 차단하겠다면서 먼저 육로를 통한 왕래를 막았다. 9일 오전 개성으로 들어가려던 남쪽 사람들 700여명이 ‘입국’을 거부당하고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한국인 80여명이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는 중대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하루만에 왕래를 재개시킴으로써 긴장은 누그러졌으나 군사통신은 회복되지 않았다. 하루 동안 남쪽의 신문과 방송은 그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혹시 ‘서해교전’ 비슷한 긴급상황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게까지 험악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한 대립으로 되돌아간 남북관계
나는 그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남북으로 분단된 지역은 한반도였고, 동서로 나누어진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1990년 10월 3일에 통일되었다. 오래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제2차 대전 뒤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다시피 했던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나뉘어져서 전쟁을 치르다가 1975년 4월 30일에 통일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 남북으로 갈라진 예멘은 1990년 5월 22일에 통일되었다.
독일은 분단 45년만에 서독 중심의 흡수통일, 베트남은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21년만에 무력통일, 예멘은 남과 북이 여러 차례 회담을 가진 것이 열매를 맺어서 무장을 해제하고 23년만에 평화통일을 이루었다. 그런데 한반도는 1945년에 남과 북으로 갈라진 지 64년이 지난 2009년 현재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한반도의 분단 국가라는 것은 단순히 한 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져 있는 상태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남쪽의 대한민국이 1945년 8월 15일,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9월 9일에 정부 수립을 선포한 이래 1950년 6월부터 3년 남짓 ‘동족 상잔’의 전쟁을 치른 뒤 남과 북은 정전협정이 아닌 휴전협정을 맺고서 아직도 적대 관계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이 동독 영토 안에 있던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고 대치하다가 큰 무력충돌 없이 통일된 것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걸핏하면 특수부대의 상호 침투, 간첩 보내기,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둔 비방전, 해상의 돌발적 교전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동북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에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는 한반도에서 민감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하는 난제 중의 난제가 된 지 오래이다.
한국을 비롯한 6자회담 관련국들에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 6자회담이나 미국과 북한의 직접 접촉을 통해 북핵문제가 쉽사리 풀리리라고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 달 가까이 되도록 북핵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대체로 앞선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 받아서 필요에 따라 크게 손질을 했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은 다분히 정치적 구호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한국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이 1953년 7월의 휴전 이래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탁상공론처럼 되어버렸다.
1960년의 4월혁명 뒤에 들어선 장면 정권은 ‘유엔 감시 하의 자유선거에 따른 통일정부’를 주장했다. 그러나 집권 한 해도 되지 않아서 대학생들과 혁신정당들이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 협상론’을 주장하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는 바람에, 그것을 빌미로 삼은 5·16 쿠데타 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으뜸으로 내세운 박정희 정권은 처음부터 ‘선 건설, 후 통일’을 강조하다가 1969년에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주한 미군 감축’이 현실로 다가오자 자주국방 정책을 발표한 뒤 대북한 교섭을 추진한다. 박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남북이 분단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평화정착, 평화공존을 지향”면서 북한을 협상 대상으로 하겠다는 요지의 ‘8·15 선언’을 발표한다. 그러고 나서 한 해 뒤인 1971년에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안하자 북한이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남한과 북한의 민간기구 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난다. 그때 많은 국민들, 특히 월남한 사람들은 감격에 벅차서 금세라도 통일이 될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1972년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협의한 결과로, 7월 4일 ‘자주 통일, 평화 통일, 민족적 대단결’을 3대 원칙으로 한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그러나 1972년 10월 17일에 박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뒤 남한사회가 훨씬 더 냉혹한 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재야운동 세력에서는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온다.
진퇴를 번갈아가면서 진전되었던 남북관계
전두환 정권은 1982년 1월에 ‘민주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발표하는데, 당시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강력한 반공정책을 펴던 때라서 그쪽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1985년 9월에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단 교환을 성사시켜 남북 교류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둔다. 그때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이산가족의 만남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까지를 눈물 바다에 빠뜨렸다.
노태우 정권은 88년에 “남북이 모든 부문에서 교류를 추진하면서 공동 번영을 추구한다”는 ‘7·7 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에 고무되어 1989년 9월 11일 ‘과도적 통일체제로 남북연합을 구성하자’는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을 제시한다. 노 정권 시절에 특기할만한 일은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남한과 북한이 각기 별개 의석을 가진 회원국으로 유엔에 가입한 것이었다. 분단 46년만에 남과 북이 독립된 국가의 자격으로 유엔 회원국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남한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면서 단독 가입을 추진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을 보고 의아해 하면서도 통일을 향해 큰 진전을 이룬 ‘업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남북한의 유엔 공동 가입 석 달 뒤인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고위급회담에서는 ‘남북 사이의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어 조인된다. 이것 역시 남북 관계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1993년 2월에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화해 협력에서 남북연합으로, 그리고 통일국가 완성’이라는 3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해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자 남북 교류가 잠정적으로 중단된다. 1994년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하 예비접촉을 벌였으나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회담이 무산된다.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라고 주장했지만 대북정책을 스무 번도 넘게 고치면서 우왕좌왕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은 ‘햇볕정책’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이 어휘는 북한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자극한다는 지적을 받아 정부의 공식 용어로는 ‘대북포용정책’으로 나타난다. 이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아홉 달만인 1998년 11월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됨으로써 처음으로 빛을 본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에서 냉전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요지의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다.
남북 관계 개선에서 김대중 정권이 이룬 최대의 업적이 ‘6·15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점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바 있다. 2000년 6월에 평양을 방문한 김 대통령은 1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네 시간 가까이 회담을 하고 이튿날 그 선언을 공식 발표한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의 공통성 인정,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 경제협력 등을 비롯한 남북간 교류의 활성화 등’을 뼈대로 하는 ‘6· 15 선언’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국정 책임자가 합의해서 만든 공식 문서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시작한 ‘소떼 방북’은 같은 해 10월과 2000년 8월로 이어진다.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남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식량을 비롯한 대북 원조도 물량이 상당히 커서 보수세력한테서 ‘퍼주기’라는 비난을 받는다. 또 1999년 6월 15일 서해 연평도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제1차 ‘서해교전’과 2002년 6월 29일 비슷한 해역에서 터진 제2차 교전 때문에 남북 간에 긴장감이 돌았으나 무사히 위기를 넘긴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을 대체로 이어받는다. ‘참여정부’는 ‘12대 국정과제’의 맨 앞을 차지하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려면 공존정책을 통해 남북 간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지원을 함으로써 포용정책이 열매를 맺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2003년 3월 6일 ‘대북 송금 의혹 특별검사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후에 심각한 논란을 일으킨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 통일·외교 부문의 핵심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주요 대북사업을 성사시키려고 북한 정권 고위층에게 거액의 돈을 보냈다는 혐의에 관해 조사를 해서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사법처리 하겠다는 것이 그 법안의 취지였다. 실질적으로 김대중 정권을 계승한 노 정권이 이렇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한다. 그리고 북한도 남북 협력과 통일사업을 위해 비밀을 지키면서 주고받은 자금을 공개하는 것은 남북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면서 참여정부에 대해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 하다가 2007년 10월 2일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가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이다. 선언의 8개 기본 조항은 ‘6·15 남북 공동선언 고수와 적극 구현’을 시작으로, ‘상호 존중과 신뢰’ ‘긴장완화와 평화보장’ ‘정전체제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 ‘경제협력사업 확대 발전’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 발전’ ‘인도주의사업 적극 추진’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 위한 협력 강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선언의 알맹이들이 실현된다면 평화공존체제는 확고하게 굳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10·4 선언’이 남쪽에서 12월 19일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승세를 굳히던 시점에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 후보가 당선되면 그 선언을 이어받아 실천해야 할 텐데 그 점이 불분명했다. 2009년 봄이라는 시점에서 ‘10· 4 선언’은 김대중 정권 시절의 ‘6·15 선언’과 함께 ‘용도 폐기’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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