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2. 이명박 정권 대북정책의 향방
‘비핵/ 개방/ 4,000’은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정치적 슬로건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2008년 대통령선거 때 내세운 ‘747’과 쌍벽을 이룬다. ‘경제성장률 7퍼센트, 물가상승률 4퍼센트, 세계 7대 강국’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그의 대통령 취임 한 해를 맞이한 시점에 허황한 수치의 나열로 드러났음은 이 책의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에 관해서는 대통령 자신과 관련 장관들이 자꾸 목표치를 바꾸어 말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정작 중요한 당면 문제는 대북정책과 남북 관계를 둘러싸고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정치력에 있다. 그가 2008년 12월 19일에 당선되자 바로 꾸려진 정권 인수위원회 때부터 대북정책은 혼란에 휩싸였다. 무엇보다도 통일부를 없애자는 주장, 그것도 나중에 통일부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그런 주장을 했는데도 당선자가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2009년 봄의 ‘갈팡질팡’을 예견할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야당을 상대로 ‘이런 부는 폐지하고 저런 부는 다른 부와 합쳐서 더 크게 하고’ 라는 식의 협상을 벌인 끝에 통일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 첫 장관으로는 김대중 정부에서 ‘햇볕정책’을 주도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어서 한 해 가까이 이렇다 할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그는 야당한테서 ‘영혼을 팔았다’는 호된 공격을 당하면서도 지난 시절의 ‘대북 포용정책’에 관해 소신있는 발언을 하지 못하고 자리만을 지킨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언행을 했다
이 정부는 통일, 평화공존, 남북의 상생,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 발전 같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통일은 아무리 애써도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니 추상적 구호로 남겨두자는 것인가? 북한은 한반도에서 사라져야 할 무리들의 집합체이니 대화와 타협의 상대로 삼지 않겠다는 뜻을 가진 것일까? 북한의 집권세력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남한 보수파의 고정관념이라 하더라도 북녘 땅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출렁대는 경제,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안, 국민들의 심리적 위축감을 해소해줄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긍정적인 쪽으로는 대답을 하기 어렵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어쩌다’는 이런 과정을 거쳤다.
북한은 2007년 8월 20일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시간부터 당선과 취임 직후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인수위에 참여한 중요 인물들이 북한을 무시하거나 악의가 담긴 발언들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북한은 2008년 4월부터 “6·15 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하라”고 이명박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하더니 갈수록 비난의 강도를 높여 나간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중병설’이 나돌던 무렵 남한 당국과 보수언론매체들이 공개적으로 전파한 ‘김정일 체제 위기설’이 북한의 상층부를 심하게 자극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극단적인 언사를 퍼붓는 한편 강경한 조치들을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그 일지 중 중요한 것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2008년 3월 24일-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과 개성공단을 연계한 발언을 문제 삼아 개성공단에서 남측 당국 인원 전부 철수하라고 요구.
·5월 30일-북한, 서해상에서 단거리 미사일 3발 발사
·7월 11일-금강산 관광객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 남한 정부, 남한 조사단의 현장 조사를 요구하면서 금강산 관광 잠정 중단.
·8월 3일-금강산 지역 북한 군부대 대변인 특별담화. “금강산 관광지구에 머무는 불필요한 남측 인원 모두 추방”
·10월 2일-남북군사실무회담 북측 대표단,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가 개성공단 사업 등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며 살포 중단 요구.
·10월 7일-북한, 서해 상공에서 단거리 미사일 2발 발사.
·11월 22일-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담화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통일하는 것이 최후의 궁극 목표”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남한 정부와 “북남 관계, 통일문제를 논할 여지 없다.”고 선언.
·11월 28일 개성관광과 경의선 철도 운행 마지막 실시 후 잠정 중단.
·2009년 1월 17일-북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이명박 대통령을 거론하며 “혁명적 무장력은 그것을 짓부수기 위한 전면 대결태세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며 “강력한 군사적 대응조치가 뒤따를 것”이라고 발표.
·1월 30일-북 조평통 성명, “북남 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을 무효화”하고 남북기본합의서의 “서해해상군사경계에 관한 조항들을 폐기한다”고 통보.
이런 과정을 거쳐 2009년 봄이 오기도 전에 북한은 미사일이나 위성 발사에 관한 ‘계획들’을 흘리면서 남한과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을 긴장시키다가 3월 9일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이유로 개성공단에 남한 사람들을 하루 동안 ‘억류’하는 강경책을 쓴다.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전달한 의사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2009년 1월 17일에 나온 인민군 총참모부의 성명이다. 그것을 계기로 조평통은 ‘남북한이 전쟁 접경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뒤돌아보면 남북관계가 전쟁 직전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살벌해진 적이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은 전두환의 집권 시기인 1986년 10월 말에 정부가 터뜨린 ‘북한의 금강산댐(입남댐) 건설 계획’이었다. 당시 이규호 건설부 장관은 “북한이 비밀리에 200억 톤을 저수할 수 있는 금강산댐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는데, 만약 댐이 무너지면 서울은 12~16 시간 안에 물바다가 되고 여의도 63빌딩의 3분의 2까지 물이 차고, 국회의사당은 지붕 부분만 남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 무렵 텔레비전들은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땡전뉴스’로 밤 9시 뉴스를 열곤 했는데, 그런 방송이 하나같이 물에 잠긴 63빌딩과 국회의사당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주니 국민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 댐을 세웠다고 당국은 설명했다. 성금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코흘리개 어린이부터 지팡이를 쥔 어르신까지 줄을 섰다. 정부는 11월 26일 대응댐인 ‘평화의 댐’ 건설계획을 세웠고, 이듬해인 87년 2월 28일 강원 화천군 동촌리에서 첫삽을 떴다. 89년 5월 27일 댐 높이 80미터에 이르는 공사가 완료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93년 감사원 감사 결과 이 금강산댐 소동은 비등하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잠재우려는 ‘국면전환용 사기극’임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정부의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던 86년 10월 30일은 이른바 ‘건국대 사태’로 국면이 요동쳤던 때였다. 전두환 정권은 금강산댐 발표 직후인 31일 3,000여명의 경찰을 건국대에 투입, 대학생 1,525명을 연행했다. (<경향닷컴>, 2009년 2월 27일자, ‘어제의 오늘’에서)
‘금강산댐’ 사건은 국민 사이에 엄청난 위기의식을 일으켰지만 전두환 정권이 ‘집권 연장’의 수단으로 조작했음이 드러나면서 한바탕 소동으로 막을 내렸다.
‘금강산댐’ 공포에 버금가는 것으로 ‘서울 불바다’ 발언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4년 3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에서 북측 대표인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박영수가 남측 대표인 통일원 차관 송영대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남한 텔레비전에 생생하게 방영되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다. 기겁을 한 사람들이 비상식량을 챙기고 피란을 준비하는가 하면 서울이 정말로 북의 미사일이나 장거리포의 공격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이들도 많았다. 방송사들이 그 장면을 하도 자주 돌려대는 데다가 보수적 신문들이 공포를 ‘확대 재생산’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은 1993년에 시작된 ‘제1차 북핵 위기’로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가 감돌던 시기였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영변의 핵시설을 공중 폭격 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던 바로 그때였다. 그런데 남한의 보수적 신문과 방송이 박영수의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보도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미국이 한국에서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하고 패트리엇 미사일 반입을 추진하겠다는데 남측이 제재에 동참하려는 것은 엄중하게 말하면 전쟁 선언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말을 남북회담장에서 한다. 그러고 나서 “그쪽이 전쟁을 강요한다면 피할 생각은 없다. 불로 불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남쪽에서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목이 남쪽 언론에서 ‘서울 불바다’로 압축된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 북측 대표의 거친 언동이 일조를 했음은 물론이지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특사로 평양을 찾아가서 그 위기를 해결한 뒤에야 불바다 공포가 사라졌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카터는 그해 6월 17일부터 이틀간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면서 ‘북핵 위기’ 해결에 합의한 뒤 김영삼 대통령과 김 주석의 남북 정상회담을 7월 25~27일 평양에서 열기로 남한측과 협의하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정상회담은 7월 7일 김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무산된다).
‘금강산댐’과 ‘서울 불바다’는 다분히 과장된 것이었다. 정권과 보수세력이 사실을 왜곡하거나 살을 붙여서 국민의 위기의식을 조장한 면이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2009년의 시점에서 남북 간에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정확히 전달된다. 어떤 발언이나 정치적 공세를 서로 자기 쪽에 유리하게 포장하는 경향은 있지만, 양측의 언론매체를 통해 그 내용이 전해지기 때문에 1980~90년대처럼 없는 사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너무 일방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했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오바마가 2009년 1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부시 1세 재임기와 달리 북한과 활발하게 대화를 하면서 6자회담도 유연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북한과 극한적 대립을 하는 일을 자제했더라면 남북관계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래의 글은 이런 면에서 정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핵문제를 두고 미국과 북한 양측이 가지는 이익과 목표를 고려할 때 북미 관계의 접근과 협상을 통한 해법 강구는 예상된 수순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실패를 거울 삼아 조심스레 대북 접근을 모색했을 것이다. 북한도 북미관계 정상화가 체제 안정을 담보하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공언해 왔던 터라 그 목표를 향해 움직였을 것이다.
(···) 남북관계가 적어도 대화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고 최소한의 협력구도 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한국은 북미관계의 접근 과정을 중재하고 평화 위주의 촉진 정책을 구사하며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선순환 구도 속에서 한국은 외교력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팽팽한 기싸움을 벌일 때 남북관계에 최소한의 신뢰가 있었다면 아마도 북한은 한국을 통해 미국에 접근하는 방도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위 ‘통남통미’ 구도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북한에 대한 접근방법에 한국의 대북관계를 충분히 활용했을 법하다. (김기정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위기 증폭 게임 시작된 남북관계’, <프레시안>, 2009년 3월 11일 자)
이명박 정권이 남북관계에서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지난 정부들이 북한을 상대로 이루어낸 합의나 선언을 이어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태도를 보면 부시 2세가 대통령이 된 뒤 ‘클린턴 말고는 무엇이나’(Anything but Clinton)을 외치다가 전임자의 업적까지 허사로 돌려버리고 나라를 위기로 몰아 넣은 일이 연상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이루어진 업적을 부정하면서 ‘김대중·노무현 말고는 무엇이나’에 집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북관계에서는 그와 보수적 뿌리를 함께 하는 노태우 집권기에 나온 ‘7·7 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조차 실천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자세로 북한을 대하면 ‘비핵/개방/4000’을 달성할 수 없음이 자명한데 말이다.
이명박 정권이 역대 정부에서 정부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전임 대통령들이 북한과 함께 발표한 합의서와 선언을 당연히 집행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에 나온 ‘10·4 선언’을 세부적으로 실천에 옮긴다면 최소한 북한의 자원을 개발하고 원자재를 확보하는 사업에서만도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강산 관광처럼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 의미가 큰 대북사업을 하루라도 빨리 재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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