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 굿맨 [Benny Goodman, 1909~1986]
왕이 탄생한 지 정확히 1백년이 흘렀다. 그 왕은 1930년대 무대 위에 군림했다. 왕은 스스로 칭한 호칭이 아니다. 대중들이, 뮤지션들이 그에게 보낸 헌사였다. 왕은 성 안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있었으며 그들을 춤추게 했다. 베니 굿맨, 우리는 그를 가리켜 '스윙의 제왕'이라고 불렀다.
베니굿맨의 전성기였던 1930년대는 스윙의 시대였다. 전파의 대부분이 스윙으로 채워졌다. 뉴올리언스 스타일이나 재즈같은 다소 올드한 스타일의 음악이 유행하던 1920년대를 지나고 새로운 음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윙이란 세련되고 매력적인 댄스음악이 탄생하던 바로 그 중심에 베니굿맨이 있었다.
본명이 벤저민 데이비드 굿맨(Benjamin David Goodman)인 그는 1909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탄생시기와 고향은 그의 음악인생을 정리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가 사춘기를 보냈던 1920년대의 시카고는 미국에서 재즈가 가장 활발히 연주되던 도시였다. 뉴올리언스에서 활동하던 재즈의 거장들 대부분이 당시 시카고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레 재즈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클라리넷을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지 않던 10대 중반, 그는 올스타 밴드였던 벤 폴락 오케스트라의 멤버가 된다. 벤 폴락은 전설의 밴드인 '뉴올리언스 리듬 킹즈'의 드러머였다. 베니굿맨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또래였던 진 크루파, 데이브 터프, 프랭크 테셔마허 등과 '오스틴 하이 갱'이라는 팀을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 팀은 스쿨밴드의 수준을 넘어 시카고 스타일을 탄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후 팀원들은 모두 베니굿맨과 더불어 1930년대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베니굿맨의 운명은 한 사람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의해 바뀌게 된다. 시카고의 뮤지션 대부분이 뉴욕으로 진출하던 무렵, 그 역시 뉴욕행을 결심한다. 그곳에서 전설의 프로듀서 존 해먼드를 만나 앨범 녹음을 시작하고, NBC 라디오 쇼의 오디션 프로그램 "Let's Dance"에 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그의 오케스트라는 1920년대 뉴욕 최고의 빅 밴드 리더이자 편곡가였던 플레처 핸더슨의 곡을 모두 사들여 여러 레퍼토리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곡을 반복해야 했던 다른 밴드를 쉽게 따돌리면서 프로그램에 계속 출연할 수 있었다. 그는 플레처 핸더슨을 아예 멤버로 영입했다.
이후 LA의 팔로마 볼룸에서 가진 공연으로 비로소 그는 미국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고, 마침내 스윙의 시대는 서부에서 완전하게 개막됐다. 이 공연이후 댄스홀엔 '지터버그'라는 춤이 퍼지게 됐고 이 춤을 위한 음악인 스윙이 대중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1938년 재즈밴드로는 처음으로 카네기 홀 무대에 오른다. 카네기 홀 입성은 재즈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재즈가 담배연기와 알코올 냄사로 가득했던 댄스홀을 떠나 클래식 음악만이 울렸던 공연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춤을 추는 대신 좌석에 앉아 재즈 선율을 감상했다. 재즈가 춤을 위한 음악이 아닌 그 자체의 존재감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베니굿맨의 음악은 다른 빈 백드들의 음악과 유사점과 차이점을 모두 갖고 있다. 당연히 흑인 밴드와는 리듬과 음악 성향에서 차이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플레처 핸더슨의 편곡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흑인 밴드의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흑인 음악을 백인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면서도 그는 대중적인 코드를 잃지 않고 음악적인 깊이를 유지했다. 최정상의 솔로 연주자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면서 음악의 화려함을 유지했다. 베니 굿맨의 클라리넷 역시 불을 뿜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뮤지션을 추억하는 건 분명 행복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스윙의 시대를 열고 꽃을 피운 베니굿맨을 탄생 1백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기억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지금도 'Sing sing sing'이 여전히 라디오에서, 댄스홀에서 김연아의 CF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베니 굿맨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윙의 제왕'이 만들었던 음악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하니까.
베니굿맨의 화려했던 스윙시대는 1934년부터 약 10년간이었다. 그러니까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가혹한 시련기였던 '경제대공황'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내일을 앞당겨야 했던 시대적 배경과 베니굿맨 악단의 활력 넘치는 음악은 적절하게 맞물렸고 스윙재즈는 곧 세계적인 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재즈의 역사에서 베니굿맨의 기여는 '재즈는 흑인의 것'이라는 인식을 깨뜨리고 인종을 초월한 포퓰러 뮤직으로 확장시켰다는 데 있다. 확실히 베니굿맨의 스윙은 블루스의 질감과 흑인 재즈의 흙냄새를 한결 덜어낸 것으로 전통적인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 기념비적인 무대에서 연주된 'Sing sing sing'은 스윙시대를 상징하는 곡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재즈 빅 밴드의 소중한 레퍼토리로 애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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