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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잠자는 숲 속의 미녀

힘들고지칠때------/클래식향기♪

by 자청비 2009. 9. 1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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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leeping Beauty, Op.66
차이코프스키 / 발레모음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

 

 

 

 

 

                                제1막 서주부

 

프롤로그와 3막으로 이루어진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프랑스의 시인겸 동화작가 C.페로의 작품을 프티파와 우세보로주스키가 대본화하고, 그 음악을 차이코프스키가 49세때인1888~89년에 작곡, 1890년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프티파의 안무로 초연되었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다리와 우아한 자세를 보이는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 마련한 명쾌한 형식의 발레 음악이다.


발레의 내용은 플로레스탄 24세의 나라에서 고대하던 왕녀 탄생 축하연에 초대받지 못한 요정 카라보스는 성장한 왕녀 오로라 공주의 손가락을 물레꼬챙이로 찔러 복수한다. 왕과 왕비가 슬퍼할 때 라일락 요정이 나타나 공주가 잠든 것임을 알리고 위로하며 공주 일행을 성으로 옮기고 마법으로 모두를 잠재워버린다 (제1막).


100년이 경과한 어느 날, 숲 속에 사냥하러 온 데자이어 왕자는 라일락 요정의 인도를 받아 오로라 공주가 잠든 궁전으로 온다. 그리고 공주의 잠든 얼굴에 키스함으로써 오랜 동안의 저주의 속박은 풀리고 사람들은 잠에서 깬다 (제2막). 결혼식 장면. 장화를 신은 고양이, 빨간 두건과 늑대, 신데렐라와 왕자 등, 페로 동화의 주인공들의 춤이 있고 왕자와 왕녀는 경사스럽게 맺어진다 (제3막).


'백조의 호수' '지젤'과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퍼토리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차이코프스키의 다른 발레 작품인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인형'처럼 초연에서 참담한 실패와 혹평을 얻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음악이 너무 탁월했다는데 있었다. 당시 무용음악은 단순한 것이 대부분으로 사실 차이코프스키처럼 정교한 음악이 무용에서 쓰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미 전세계 순회 공연에서 현란한 의상과 동화적인 분위기, 탄탄한 구성력과 연출력으로 작품성을 인정 받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이제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 아이스발레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레퍼토리 중의 하나이다.


이 곡이 만들어진 1889년에 지휘자로서 그는 국내에서 보다도 유럽과 미국에서 더 이름을 떨치는 위치에 오르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의 이러한 외적인 성공의 이미지를 반영하듯 종전의 깊은 우울과 말할 수 없는 우수대신 빛나는 정서, 우아한 음악, 비약적인 리듬이 전혀 구김살없이 나타나고 있다.

 

 

줄거리

 
옛날에 어느 나라에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 왕비가 있었다. 그 왕비가 신께 아이를 갖게해 달라고 정성껏 빌었다. 왕비는 드디어 예쁜 공주를 낳아 온 나라는 축하 잔치를 벌였다. 이때 6명의 요정이 이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어린공주에게 한가지씩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러나 이 연회에 초대받지 못한 요정 카라복스는 공주가 어린이 될 무렵 손가락을 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라는 심술어린 예언을 해 왕비를 놀라게 하지만 상냥한 요정 리라가 나타나 공주는 잠을 잘뿐이며 어느 왕자의 사랑에 의해 눈뜰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로부터 100년후 숲속에 사냥을 간 데자이어 왕자가 공주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입을 맞추자 오랜 잠속에 빠져있던 공주는 눈을 뜨게 되어 왕자와 공주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바로 프랑스의 동화작가 샤를페로의 잠자는 공주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곡 중의 하나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 내용이다.

 

 

 

차이코프스키
Tchaikovsky, Pyotr ll'yich(1840.5.7~1893.11.6) 러시아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광산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의 총감독이었으며 그의 가족관계로는 위로 이복누이와 형 또 아래에 누이동생과 동생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유년 시대를 보냈다. 그는 어려서 가정교사에게 불어와 독어를 배웠는데 그는 그녀를 잘 이해하고 따라서 그녀와의 이별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이별의 충격은 페테르스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에서 더욱 견딜 수 없게 하였고 그래서 그는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성애에 빠지게 된다,

 


1848(?)년 콜레라로 어머니가 죽은 뒤 작곡을 시작하였고 감정의 배출구로 음악을 쓰는 습관이 몸에 붙이게 되었다. 1855년 그는 피아노 교사 루돌프 퀸딩거에게 레슨은 받기 시작하였다. 1863년 그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859년 이후 그는 법무성에서 근무하는 한편 음악공부도 하는 이중생활도 하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1863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루빈스타인이 세운 음악원에 입학하여 루빈-스타인에게 악기법과 작곡을 정식으로 공부하게 된다. 그는 이 음악원 시절에 중요한 친구 게르만 라로슈를 알게되고 졸업 후 루빈스타인의 동생 N.루빈스타인이 원장이 된 새로 창설된 모스크바 음악원에 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10년간 그 직에 있으면서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의 재능이 높이 평가되고 있을 때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카시킨, 알브레히트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1867년 <폭풍우>를 작곡했을 때 베를리오즈의 영향을 받았다.


1868년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을  N.루빈스타인의 지휘로 모스크바에서 연주되었을 때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최초의 오페라 <지방 장관>을 공연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해 발라키레프와 그의 그룹들과도 친교를 맺는다. 그들 중에는 무소그르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있었다. 발라키레프는 젊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환상곡을 비판하였으며 관현악작품인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에>의 형성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1871년 현악4중주 제1번, 1872년 교향곡 제2번을 썼는데 이는 민요를 테마로 한 국민주의적 작품이다. 1873년에는 교향곡 환상곡<템페스트>를 작곡하여 5인조의 이론적 지도자 스타소프에게 바쳤다. 새로운 사상 특히 페테레스부르크의 밀리 발라게레프를 둘러싼 인물들이 보급시키고 있던 국민주의 음악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만나 그의 최초의 교향곡 G단조의 작품을 쓰는 일에 착수했다, 이 <겨울날의 환상>은 부제에서 나타났듯이 로맨틱한 기분을 암시하며 4악장 중 3개의 악장에 민족적인 주제를 쓰고 있지만 이 때문에 교향곡에 자전적인 요소가 손상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발라키레프 일파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냈는데 그 까닭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과 개정에 발라키레프가 도움을 주기는 했어도 차이코프스키는 발라키레프의 페테르스부르크의 문하생과는 달리 음악원에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음악가였으며 그의 제 1 교향곡에서 이미 명백해진 바 와 같이 그의 작품은 서구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러시아 민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고 그래서 현악사중주1번의 느린 악장에 우크라이나 노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는 열렬한 국민주의자는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선율들은 C단조의 제2교향곡에서도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op.17인 이 작품은<소러시아>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1874~1878년 사이에 차이코프스키 생애에 가장 많은 걸작이 나온다. 이때 그는 동성연애자로서의 죄악감에 더욱 시달리게 된 그는 자기가 위기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자 결혼만이 자기 문제의 해결방도인양 다짜고짜 결혼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역점과 비극적인 억압감을 그는 오로지 음악에만 쏟아 넣었던 것이다. Bb단조의 제 1피아노 협주곡 op.23은 어느 정도 감정이 동요하고 있던 시기와 국민주의 적인 시기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국민주의적 면은 양쪽 끝악장에 우크라이나 주제를 다시 쓰고 있는 것에 나타나 있다.

 

그는 폰 메크 부인과 교제한 후 약 10년간 집에 틀어 박힌 생활을 했다. 작곡을 하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휴가 때에는 서유럽에 가소 장기간 체재하면서 작곡가들을 방문한다던가 새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메크 부인과 관계가 끊어진 다음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콜레라에 전염 되었다는 것이 그의 사인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많은 그의 전기에서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문화성에서는 면밀한 고증을 통해 그의 죽음이 독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를 탐닉하고 있다는 설이 점점 퍼지자 법률학교 시절의 동급생이었던 법관들은 그 스캔들이 자신들에게 파급될 것을 우대하여 그에게 스스로 독배를 마시도록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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