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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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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9. 10. 1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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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시름 속에 살아오느라       一生愁中過
밝은 달은 봐도 봐도 부족했었지   明月看不足
이제부턴 만년토록 마주 볼테니    萬年長相對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구나  此行未爲惡


조선시대 19세기 이양연(李亮淵)이란 시인이 지은 <내가 죽어서(自挽)>라는 시다. 이제 죽음을 앞둔 이 시인은 그동안 한평생 괴로운 인생에 부대끼며 사느라 하늘에 뜬 밝은 달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는데 이제 죽으면 생전에는 누리지 못한 달빛 감상을 실컷 하게 됐으니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구나"라고 노래하고 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의 체념과 달관이 느껴진다. 그 이면에는 괴로운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시인의 아픔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만시(自輓詩)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도하는 이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란 자신의 무덤에 스스로 쓴 묘지명이다. 내 죽음을 내가 애도하고 내가 정리하는 것 자체가 벌써 특이한 일이요, 상식에 벗어난 일이다. 하지만 격식을 벗어난 일에는 사연이 없지 않다.  옛 시인들은 종종 이처럼 직접 시를 지어 스스로 죽음을 애도했다. 마음에도 없이 애도의 눈물을 억지로 짜내는 타인의 만시보다는 저승 가는 길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 애달프다 못해 참으로 아름답다. 더러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시보다 산문을 택해 묘지명을 써두기도 했다.


 

조선시대 예술가 강세황의 자명(自銘)을 보면 좋은 가문 출신임에도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지 않고, 그림과 글씨, 시에 몰입했던 예술가로서 한평생을 살았던 모습을 보여준다.


"늙은이는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의 후예로 운명이 시대와 어긋나 쓸쓸하게 지내다 노년에 이르렀다. 시골에 물러나 야로(野老)들과 자리를 다투느라 늙어서는 서울 발걸음을 일체 끊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때때로 죽장망혜(竹杖芒鞋)로 들판을 소요했다. 겉모습은 모자라고 수수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제법 신령한 지혜가 담겨 있어 빼어난 자식이 있고, 교묘한 사유를 한다. 음악의 심오한 비밀과 기완(器玩)의 기교도 한 번 눈에 접하면 꿰뚫어 보고 다 이해했다."


여러 대에 걸쳐 고관을 지낸 집안에 태어났으나 벼슬과 인연이 없어 시골로 물러나 평범한 늙은이로 살아갔지만 예술에 대해서만은 집념을 버리지 않은 인간이라고 강세황은 자신의 인생을 평했다. 그는 이 글에서 드러난 자의식을 자화상 제작으로 까지 이어갔다. 조선시대에 자화상을 그린 예는 극히 드문데, 그는 그저 겉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신정(神情)을 자화상을 통해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가 남긴 자화상에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역력하다. 그는 자화상의 자찬(自讚)에서도  "얼굴은 물정에 어두운 꼴을 하고 있지만 흉금은 시원스럽다. 평생 가진 재능 펼쳐보지 못해 세상에서는 그의 깊이를 아는 자 아무도 없다. 오로지 한가로이 읊은 시나 가볍게 그린 그림에서나 때때로 기이한 자태와 예스런 마음을 드러낸다"라고 해 물정에 어둡고 재능을 펼칠 기회를 상실한 사람이지만 깊은 상념이 담겨 있는 내면의 깊이는 남보다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자찬묘지명! 그것은 죽음에 직면해 남의 시선을 빌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글이다. 죽음의 공포에 떨기보다는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자기 죽음을 그려보는 일이다. 죽음에 앞서 자신의 죽음을 다른 사람의 죽음처럼 차분하게 응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기 싫어 몸부림치는 사람이나 죽기 두려워 신에게 애걸복걸하는 사람에 비해 자찬묘지명을 쓰고 차분히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이 훨씬 멋져 보이고 현대적이다.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써놓았다. 짧은 한 문장에 독설과 자학이 유머러스하게 녹아 있다. 우리도 자신의 묘지명을 한번 써봐야 하지 않을까.

 

<안대회, '선비답게 산다는 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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