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세밑 미망
<경향신문>
연일 갖가지 미제(謎題)와 난제들이 넘쳐난다. 1주년을 맞도록 용산참사는 미궁 속에 있고 4대강 불도저 소리는 엄동의 침잠이라는 생태계 계율조차 뒤흔들며 ‘그레이 뉴딜’의 흉몽을 국민 모두의 암담한 현실로 만들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온 나라가 시시각각 강진에 요동치는 이 집적된 모순의 도가니에서 단 한 치 전환의 틈새도 찾기 힘든 이 지난한 무동력의 진보는 무엇인가. 30%의 강고한 보수 장력으로 이 세월이 간다는 절감만이 가슴의 통증으로 지끈거리고, 카타르시스적 정치소비에 언성을 높이며, 비루한 일상을 위무하는 술잔만 오가는 이 거대한 탈정치화라는 역사의 탈구 상태.
‘꿈꿀 힘이 없는 자는 살 힘이 없는 자다.’ 상허 이태준은 나치 독일과 가장 맹렬히 싸운 작가 에른스트 톨러의 이 문장을 그의 <소련기행>(1946)에 각인해 놓았다. 낡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맺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이태준의 눈에 사회주의 문화의 전경은 황홀했을까.
‘지금 우리가 이런 꿈같은 화려한 양식으로 찾아가는 소비에트야말로 위대한 꿈이 실현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하고 이태준은 썼다. 그러나 이태준이 그처럼 열망하던 사회주의 문화의 찬란한 빛을 발터 벤야민은 일찌감치 <모스크바 일기>에서 불신한 바 있다. 굶어도 연극과 발레는 본다는 러시아 사람들, 모스크바 교외의 저녁, 레드 아미 코러스(Red Army Chorus)의 하이 톤 속에서도 견딜 수 없었던 ‘단조로움과 형식주의’. 벤야민에게 모스크바는 사회주의의 환상을 깨는 시공간이었고, 자본주의 문화의 문제에 집요하게 대응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팽배한 탈정치화의 기류 속에서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 일으킨 ‘체제 논쟁’은 1987년이라는 역사적 시점을 다시 성찰하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모두 함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꾸었던 역사적 기점으로서의 87년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가야타리 스피박은 오늘의 인문학자들을 ‘선진자본주의적 인종주의 사회의 디스크자키들’이라고 명명했다. 이를 우리 사회에 원용해 보면, 우리는 그동안 이룬 알량한 보편 민주주의의 전개를 가지고 ‘판을 마음대로 틀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단조로움과 형식주의의 단선율로 ‘사상의 저울에 계급의 눈금이 사라지는’ 정황을 촉발하고, 국회의원이 되고 권력의 실세가 되는 체제내화된 정치만을 현실정치라고 강변하며 어떤 진보지향의 정치서식지도 무차별적으로 파괴해온 것이다.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갖는 것을 라디오방송 디스크자키의 판을 틀 자유라는 폭력으로 규제 혹은 압제해온 것이다.
그래서 세밑, 우리는 꿈꾸는 것이 두려운 세월을 살고 있다. 정녕 이 미망의 세월을 전복시킬 길은 막힌 건가. 우리의 가까운 역사의 창고에는 노나메기의 세상 만들기를 위한 현상타파 의지와 미래 전망이 쌓여 있다. 이를 꺼내 녹기를 닦아내고 각자의 얼굴과 삶에 비추어보는 일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콘셉트, 당신의 영혼을 거세한/경쟁, 당신의 상상력을 꺾게 한/고뇌, 당신이 푼돈과 거래한/꺼내 다시 밝혀내/양쪽 다리를 다 저쪽 땅에 딛지 마….’(제리 케이,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