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 10년' 희망도 잠시, 불안에 떨었다
[기고] 양극화·남북관계 굴절, 기후 재앙·테러와 전쟁…
통섭·하이브리드 전환점, 낡은 것 끊고 비전 제시를
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회학)
21세기의 첫 번째 10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지난 10년은 '불안의 시대'(the anxiety decade)였다. 개인적 삶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걱정, 위험, 공포 등을 포괄한 불안이 우리 사회는 물론 세계사회를 관통해 왔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엄습해 온 불안은 희망으로 맞이한 새 천년의 10년을 정체를 알기 어려운 위기의식으로 물들여 왔다.
당장 우리 사회의 10년을 돌아보자. 1997년 외환위기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뜻을 모아 위기를 극복했지만, 그 과정은 양극화가 강화되고 갈등이 증가해 온 시간이기도 했다.
산업, 노동, 소득의 경제 양극화는 물론 교육, 주거, 노후의 사회 양극화가 확산돼 왔을 뿐만 아니라, 이념갈등을 축으로 노사, 지역, 세대 갈등의 분출은 이른바 '갈등의 전성시대'를 열어 왔다.
민주화의 과제가 약자 보호와 갈등 해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시대의 결과는 사회적 약자들이 주변으로 내몰리고 사회갈등들이 일거에 폭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아이러니 앞에 우리 사회가 위태롭게 서 있는 형국이다.
남북관계의 굴절 또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시작된 탈냉전의 세계사적 물결은 냉전의 마지막 섬인 한반도에까지 밀려와 햇볕을 쐬게 했지만, 대북 정책은 온탕과 냉탕을 거듭함으로써 현재 교착상태에 놓여 있다.
옳고 그름이라는 신념윤리의 관점에서 평화공존은 당연한 민족사적 과제다. 하지만 결과를 고려해야 하는 책임윤리의 관점에서 대북정책은 새로운 변신을 요구받고 있다.
불안의 동의어는 두려움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사회는 새로운 두려움을 접하고 있다. 기후 재앙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위기는 두려움의 첫 번째 원천이다. 일각에선 환경위기가 과장됐다고 주장하지만 온난화, 각종 오염, 생물다양성 감소 등 지구의 지속가능성은 이미 시험대에 오른 지 오래다.
9ㆍ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평화의 위기는 또 다른 두려움의 원천이다. 탈냉전 이후 세계사회가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나가고 있다는 진단이 무색하리만치 문명간, 국가간, 종족간 벌어진 테러와 전쟁은 인류 공동의 인권과 평화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가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바로 이런 과정 속에 이제까지 익숙한 통념과의 결별이 진행돼 왔다. 투기성 금융자본의 세계화로 절정을 구가해 온 신자유주의가 지난해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를 경유하면서 균열을 보여준 것은 그 상징적 사건이다.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진보의 시대(1950년대~70년대)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대표되는 보수의 시대(1980년대~2000년대 후반)를 넘어 세계사회는 이제 또 다른 시대로 나가는 전환의 문턱 위에 놓여 있다. 보수가 진보적 정책을 차용하고 진보가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통섭(統攝)과 하이브리드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다시 우리 사회다. 불안을 기대로,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우리 안에 도사리는 낡은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려는,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일궈가려는 집합의지를 얼마나 지혜롭게 발휘할 것인가에 따라 앞으로 10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뉴밀레니엄 10년] 정치권 "친북좌파" "보수꼴통" 편가르며 이념갈등 확대 재생산
지지층 결집위해… 국민들 중도로 통합 경향과 큰 차이
새 밀레니엄을 맞은 뒤 지난 10년간 나타난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이념 갈등이 부풀려졌다는 점이다. 이념 거품'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일반 국민들의 이념 분화에서는 큰 변화를 읽을 수 없지만 정치권이 이념을 상대방 공격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이 실제 이상으로 증폭됐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19일 "최근 이념 갈등이 심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반 국민들의 이념적 분화가 심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이념적 분화가 심화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최근 한국정치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한국의 이념 갈등과 이념 지형의 변화'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이념 갈등이 일상화되는 주요 이유는 기존의 정치제도를 통해 이념 갈등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이 이념 대립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일반 국민의 이념성향은 중도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비해 여야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중도층의 비율이 줄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국민들의 이념적 분화를 촉진시키는 사회 · 정치적 요인들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 종식과 세계화 흐름, 국내적으로 민주개혁세력의 잇단 집권과 그에 따른 포용적 대북정책 등 우리 사회의 탈이념을 위한 물리적 환경이 강화됐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일보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국민들의 이념성향을 보면 이념 지형이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2002년과 2007년, 2009년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큰 차이가 없다. 자신의 이념 성향이 대단히 진보적이면 0점, 중도적이면 5점, 대단히 보수적이면 10점이라고 기준을 정해서 0에서 10 범위 내에서 숫자로 대답하도록 한 결과 세 번의 조사에서 이념지수 평균치는 각각 5점 안팎이다.
2002년 5월에는 진보 24.9%, 중도 38.6%, 보수 34.7%였고, 2009년 6월에는 진보 28.0%, 중도 38.9%, 보수 27.2%로 나타났다. 2009년 조사에서 보수층이 진보와 중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감소했지만 눈에 띌만한 큰 변화는 아니다.
반면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이념 갈등은 격화됐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IMF 경제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햇볕정책' 등 대북 유화정책을 펴자 보수 진영은 '좌파 정권'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등 민주개혁세력이 주도한 정권이 10년간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서로 '친북 좌파' '보수 꼴통'이라고 몰아세웠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벌어졌던 '민주 대 반민주' 및 '진보 대 보수' 논쟁이 왜곡된 이념 충돌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대립 과정에서 국민들이 이념을 떠나 실용을 추구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정치권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이념 갈등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이념 대립이 실제보다 과장돼 나타났다"며 "이념 갈등이 스스로 해소될 수 있도록 인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밀레니엄 10년] 중산층 무너지고 부자-빈자의 사회로
고용불안·부동산 폭등…
소득 불평등, 환란 직후보다 높아져
"공동체적 성장 모색해야 할때" 지적
외환위기의 상처를 딛고 경제 발전과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며 시작했던 밀레니엄. 불행하게도 첫 10년의 가장 두드러진 경제적 결과는 양극화 심화였다. 부자는 더 부유해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다. 대신 경제의 중추인 중산층은 허약해졌다. 전문가들은 "양극화 해결 없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경제의 '양 극단화'는 각종 통계로도 확인된다.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뜻. 2003년 0.292 수준이던 시장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지난해 0.31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 빈곤층이 대거 양산됐던 1998년 0.314보다 높은 수준이다.
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 역시 통계가 시작된 2005년 8.31에서 지난해 8.67까지 벌어졌다.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8.67배 더 번다는 얘기다. 반면, 97년 51.5%이던 소득수준 기준 중산층 비중은 2007년 43.7%로 10년 사이 7.8%포인트나 줄었다. 같은 기간 19.9%에서 26.3%로 크게 늘어난 저소득층으로 흡수된 것이다.
도대체 10년간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토록 양극화가 심화된 걸까. 우선 3차례의 버블, 즉 IT버블(2000년), 카드버블(2003년), 부동산버블(2005~2006년)을 잇따라 거치면서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곤층이 양산된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보다 구조적인 배경에 주목한다. 대외적으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과 중국 저임금경제의 부상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고용불안을 야기했다. 외환위기 후 '노동 유연성'을 표방하며 강요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수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했고, 이들은 거대 저소득층을 형성했다. 또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산 저가품 공세의 직접 충격을 받으면서 기술 우위를 갖추지 못한 저임금 노동력 산업이 설 자리를 잃어 버렸다.
대내적으로는 부동산에 편중된 자산구조가 양극화 심화의 주범이 됐다. 상위 10% 계층이 전체 부동산의 40% 이상을 가진 구조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부동산 가격 급등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정책으로 중소기업ㆍ자영업 등이 뒤쳐지면서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되는 것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0년의 구조가 지속되는 한, 성장률은 높아져도 대다수 서민의 생활수준은 낮아지는 괴리 현상은 계속될 것"이라며 "서비스업 중심의 고용흡수적 성장 정책 등을 통해 경제성장과 분배가 함께 고려되는 '공동체적' 성장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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