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불안’ 덜려다…‘스펙 강박’ 합병증에 운다
남들 다 하는데 나도… 진학·취업·퇴출의 공포
'묻지마 스펙' 쌓기로 … 심리안정 효과 있지만
인간 등급화 부작용 … 뚜렷한 목표 우선돼야
[한겨레]
한국 사회는 왜 과도하게 스펙에 목을 매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치열한 경쟁이 불러온 불안감과, 여기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스펙 열풍을 낳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만큼, 주변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하게 자신에게 꼭 필요한 스펙이 무엇인지 찾고, 이를 쌓는 게 필요하다고 권한다.
# 불안
지난해 초 대학을 졸업하고 2년 가까이 경찰 임용시험을 준비 중인 정성훈(28)씨는 최근 대학 동창회에 나갔다가 잔뜩 풀이 죽었다. 친구들이 저마다 자격증을 서너 개 정도는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만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시험을 떨어지고 나니 불안감이 더 엄습해 오더라"라며 "계속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시험과 상관 없는 자격증을 따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직장인이라고 불안감을 떨쳐낼 도리는 없다. 보험 설계사, 헤드헌터로 일하며 안정적 수입을 올리고 있는 임아무개(40)씨는 "갑자기 일감이 없어지고 은퇴를 할 경우, 어떤 것도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불안감에 늘 스스로를 무장하려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불안감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를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사람들을 불안감에 빠뜨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사회 심리가 문제"라며 "이렇다보니 자신을 계량화할 수 있는 스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 항우울증
스펙은 이런 불안을 상품화해 거대한 시장으로 발전했다. 올해 초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김수연(23)씨는 최근 이력서를 쓰는 데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달 초 일본어 능력시험 1급 자격증을 땄기 때문이다. 김씨는 "당장 도움이 안 되더라도 이력서에 자격증을 하나 추가한 것만으로 안도감이 든다"고 밝혔다.
초·중·고생이 쌓는 스펙은 그 안도감이 부모에게까지 확대된다. 서울 광장동에 사는 김아무개(38)씨는 내년 1월부터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한 달 수강료가 100만원이 넘는 영어학원에 보낼 계획이다. 김씨는 "국제중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라며 "결과를 떠나서 당장은 안도감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실제 진학이나 취업 때 스펙이 당락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기 이전에, 일단 안도감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스펙은 항우울제와도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 허위
그러나 스펙의 '심리적 안정' 효과는 무분별한 스펙 쌓기로 이어지기 쉽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김아무개(27)씨는 "취업 경쟁이 워낙 심하다보니 무엇이라도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리스타(즉석에서 커피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 자격증 시험도 봤다"며 "주변에는 전공과 상관 없이 파티요리 학원이나 마술 학원에 다니는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입학사정관제를 겨냥한 '거짓 스펙 쌓기'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부 고등학교에서 봉사활동 확인서가 허위로 발급되거나 무더기로 상장을 남발하는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입시를 앞두고 급히 스펙을 쌓으려는 학생들을 겨냥한 '모의 토론대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철호 '학벌없는 사회' 정책위원장(배문중 교사)은 "입학사정관제, 외국어고 개편안 등 정부의 새 교육정책이 고교에까지 스펙 쌓기 열풍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스펙 쌓기에만 몰입하면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기르기 어려워지고 허위의식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참스펙
지난해 초 지방대학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오성규(29)씨는 최근 일본의 요리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씨는 "그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상관 없이 스펙으로 나를 치장하는 데만 몰두했다"며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허탈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결국 오씨는 일식 요리사의 꿈을 안고 '진짜 스펙'을 쌓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전문가들은 '스펙을 위한 스펙'은 금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헤드헌팅 업체인 미시간컨설팅의 임혁세 부장은 "많은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도 스펙에 지나치게 목을 매는 사람들을 되레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밝혔다.
< 20대,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 를 쓴 허병민씨는 "스펙을 쌓는 것보다 무엇을 위해 쌓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는 게 중요하다"며 "이런 관점으로 접근했을 때 스펙이 진정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스펙이란?
원래 '제품 설명서'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스페시피케이션'(specification)에서 따온 말이다. 진학 또는 취업 예비생들의 학력·학점·토익 점수·교내외 활동 및 경력사항 등을 합한 것을 가리킨다.
‘스펙’에 목매는 대한민국
국제중 준비 초등생은 토익학원에 영어캠프…
직장 못잡은 대졸자는 경력 쌓으려 인턴인생…
경쟁사회 낙오자 될라 '강요된 스펙' 열풍 속으로
[한겨레]
2009년 대한민국은 '스펙 공화국'이다. 학력이나 경력처럼 특정인의 조건을 통칭하는 말인 '스펙'에 모두가 감염됐다. 10대는 진학, 20대는 취업, 30~40대는 결혼과 승진, 더 높은 연령대는 은퇴 이후 준비에 몰두한다. 스펙을 강요하는 분위기 탓에 자신을 살피고, 인생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일은 아무래도 뒷전이다.
■ 휘달리는 '초딩' 앗, 아침 7시. 엄마가 나를 막 흔들어 깨워요. 저는 서울 강서구 한 초등학교의 5학년생 강샛별(11)입니다. 일어나선 바로 학습지 숙제를 해요. 오후엔 시간이 없거든요. 오후 2시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배우러 고고씽. 끝나기 무섭게 토익 공부하러 영어학원에 가요. 영어는 국제중 입시에 필수 스펙이거든요. 끝나면 수학 배우러 헉헉…. 오후 5시, 집에 가니 학습지 선생님이 와 계세요. 한자 공부하는데 엄마가 컴퓨터 책까지 놓고 가네요. 곧 방학하면 친구들은 캐나다로 영어캠프 간대요. 저는 뭐 하죠? 아~ 놀고 싶다. 그런데 결국 학원에 가게 돼요. 거기 가야 친구들을 만나니까요.
■ 숨가쁜 '고딩' '초딩'! 엄살 부리기는. 너도 나처럼 '중딩' 때는 종합반 학원, '고딩' 때는 국영수 단과반을 거칠 거야. 참, 저는 경기도 안양에 사는 고3 김유나(가명)예요. 어제 수능 점수 나왔는데…. 정시는 어렵겠고, 수시 2차를 알아보고 있어요. 그런데 논술 시험 안 치는 학교를 봤더니 적성검사 시험이 있네요. 친구들은 요즘 토플에 텝스, 봉사활동, 미국 대학 수능인 에스에이티(SAT)에다 대학 선이수제도(AP)까지 따요. 바둑학과에 가려면 인터넷게임 넷마블의 바둑 2만판을 하는 것도 스펙이 된다네요. 뭐든지 남들이 안 하는 것을 찾아야 해요.
■ 화려한 '이태백' 그래봤댔자 졸업하면 '이태백'이야. 내년이면 스물아홉인데 아직 직장 찾고 있어. 이름은 생략할게. 그렇다고 무시하지는 마. 나도 스펙은 빵빵해. 서울의 괜찮다는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어. 부전공은 신문방송학. 학과 회장도 했지. 토익 860점에 학점은 3.47. 베트남 연수도 1년 갔다 왔어. 2006년 졸업 뒤 게임 회사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다 재고용이 안 돼 1년 정도 방송사에서 통·번역을 했어. 코트라에서 주관하는 해외 인턴십도 다녀왔지. 경영학과는 안 나왔지만 마케팅, 광고 이런 일은 자신 있어. 근데 이 몹쓸 대기업들은 서류만 보고 제쳐버린단 말야. 더 말해서 뭐하겠니?
■ '루저' 신드롬 '직딩' 그렇게 열심히 하면 뭐합니까? 연봉 4500만원이 안 되는데. 얼마 전 어느 결혼정보업체 조사를 보니, 우리나라 미혼 여성이 원하는 배우자 연봉이 4579만원이랍디다. 난 올해 스물아홉의 대기업 계열사 연구원인데, 4579만원, 그거 우리 과장님 연봉입디다. 과장 되기 전엔 결혼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 요즘은 결혼도 스펙 시대예요. 더구나 전 키 180㎝가 안 되는 '루저'라고요. 외모도 중요하다고 해서 요즘 피부과에 다녀요. 내년엔 변리사 시험 준비하려고요. 결혼해서 자식들 대학 보낼 때까지 회사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요.
■ 아직 배고픈 '사오정' 여보게, 청년들. 자네들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젊을 때 열심히 해야 돼. 이제 마흔인 나는 명함이 3개야. 서울 '스카이' 대학 나와 외국계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다 그만두고 경영학을 공부했어. 내가 어문계열 나왔거든. 민간 연구소에서 회계학, 무역 관련 수업을 들었어. 그러곤 보험회사로 옮겨 재무설계사로 활동하고 있어. 친구의 헤드헌팅 회사에서도 일했지. 대학에서 강의 의뢰도 들어와. 어때? 재무설계사에 헤드헌터, 취업 컨설팅 강사. 그래도 멀었어. 최종 스펙에 시이오(CEO·최고경영자)를 추가하려고. 이보게들, 세상은 만만치 않아. 난 5년 안에 평생 쓸 돈을 벌어서 여생은 느긋하게 살 거야. 그게 직장인의 로망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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