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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편집국장 사후 20년만에 재심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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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0. 9. 1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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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편집국장 사후 20년만에 재심 무죄

<연합뉴스>

 


▶ 민족일보 창간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는 기사와 논설 등을 게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민족일보 전 편집국장이 사후 2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5부(안영진 부장판사)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실형이 확정됐던 민족일보 전 편집국장 고(故)양수정 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14일 밝혔다.

 

재판부는 "민족일보가 지지한 중화통일론은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절차나 방법, 통일 후의 체제, 관련국과 국제기구의 개입 여부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고 이 신문이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논설을 싣기도 했던 점 등에 비춰보면 민족일보의 기사 내용이 북한을 고무 찬양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민족일보가 사회단체가 아닌 상사법인이고 조용수 전 사장이 사회대중당의 간부라 인정할 증거가 없는 점 등을 종합할 때 양씨가 조 전 사장 등 민족일보 주요 간부의 북한 동조 활동을 방조했다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1961년 2월부터 약 3개월간 발행된 민족일보는 남북협상과 경제 및 서신 교류, 학생회담 개최, 중립화 통일 등 당시 혁신계의 주장을 주로 다뤘는데, 5.16쿠데타 직후 계엄사령부는 조 전 사장과 양씨 등 민족일보의 주요 인사가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보고 `혁명재판'에 회부했다.

 

조 전 사장은 사형을 선고받아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고 양씨는 1심에서 징역 10년, 항소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90년 12월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송건호. 군부세력 앞에 거의가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끝까지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를 지켰다. 그런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발족한 것이 청암언론문화재단이다. 이 재단은 해마다 사표가 될 만한 언론인을 가려 송건호언론상을 수여하는데, 올해는 제6회 수상자로 민족일보 사장이던 조용수를 선정해, 17일 유족이 참가한 가운데 시상식을 거행했다. 

 

 

조용수가 민족일보 창간호를 낸 것은 1961년 2월 13일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진 뒤 처음 치른 1960년의 7.29 총선에서 혁신계는 참패를 면치 못했다. 당대 진보주의자들은 혁신계 정당의 대통합과 진보주의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조용수는 두 과제 가운데 신문 창간에 전념하기로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민단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모금에 나섰다. 그는 연세대에 재학하다 1950년에 일본으로 밀항해 메이지대학에 다니다가 학업을 그만두고 민단계 기관지 민주신문의 편집부장을 역임하며 재일 한인들과 폭넓게 교유해온 터라, 많은 유지들이 모금운동에 호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민족일보를 세우고 사장에 취임했다.   

 

중립화통일론과 반소(反蘇) 노선
 
민족일보가 지면을 통해 역설한 것은 ‘중립화통일론’이다. 민족일보는 통일이야말로 역사적이자 절대적인 과제라고 전제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동과 서, 남과 북이 평화공존할 수 있는 중립화의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중립화통일론은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통일론과는 지향점이 달랐다. 고려연방제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겨냥한 것이라면 중립화통일론은 좌와 우를 초절(超絶)하는 제3의 통일된 중립지대를 상정한 것이었다. 

 

민족일보는 중립화통일론을 펴면서도 반소(反蘇) 반(反)김일성 노선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이승만과 같은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독재자'로 하여금 단독정부를 세우게 하였다면, 소련 역시 '김일성과 같은 괴뢰적 인물'을 내세워 영토와 인민의 분열을 조장했으며, 재통일을 방해해왔고 더구나 전쟁까지 도발했다고 비난했다. 민족일보가 미국이나 이승만 세력에 비판적이었다면 소련과 김일성 정권에는 적대적이었다.  

 

그런데도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군부는 민족일보를 폐간조치하고 조용수를 재판에 회부했다. 사법당국은 중립화통일론이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거나 그 기본노선이 동일하다고 규정하고, 결론적으로 북괴를 고무 동조한 것이라고 판단해 조용수에게 극형을 선고했다. 정부는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961년 12월 21일 조용수를 처형했다. 만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조용수는 그렇게 허망하게 저 세상으로 갔다.


박정희 군사정권, 서둘러 처형
 
군부는 왜 조용수를 죽였는가? 박정희 군사정부는 당시 두 가지 급박한 과제에 당면해 있었다. 그 하나가 대학생과 진보주의자들의 저항 잠재력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박정희 자신과 그 척족의 공산당 관련 경력에 기인한 미국의 의구심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민족일보와 조용수는 군부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타협가능한, 공존가능한 아이디어는 사상의 공개시장에서 자유로이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는 이런 포용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타협주의자였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 누명을 씌워 처단했다. 박정희 시대에도 무수한 사람이 용공분자로 몰려 감옥으로 가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대안에 대한 포용성 결핍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17일 조용수가 시상대에 섰다면 그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박정희가 지금 생존해 있다면 조용수에게 무슨 말을 할까?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다면 우리는 그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2007.12>
글쓴이 / 김민환·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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