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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설은 옛날에나 쇠던 설

세상보기---------/현대사회 흐름

by 자청비 2011. 1. 2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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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이야기]음력설은 옛날에나 쇠던 설
설을 못쇠게 하라!


아이는 신이 났다. 때때옷이 요렇게 잘 맞을 수가 없다. 바느질을 하던 엄마 곁에서 언제 잠이 들었을까. 흔들려 깨보니 설빔 색동저고리가 머리맡에 놓여있다. 후다닥 이불 속을 빠져나와 옷을 집어 든다. 소매에 팔을 넣자 빠작빠작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상큼하다. '와~ 날아갈 것 같아'. 차례 상 준비에 분주하던 엄마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우리 아들 예쁘다, 옷이 날개네!" 할아버지 눈길 또한 그윽하다. 야! 신난다. 설날 아침이다.

 

저녁엔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설날 동이 트는 걸 안 보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졸린 눈을 몇 번이고 부릅뜨곤 했다. '엄마랑 고모들이 흐릿한 전등 아래 바느질을 했었는데…', '잠들면 눈썹이 센다고 했는데…' 불현듯 놀라 거울 앞에 달려가 본다. 눈썹은, 여전히 까맣다! '그러면 그렇지, 하얘질 리 없어'. 공연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데 고모들이 와락 웃음을 터뜨린다.

 

시골집이다. 아버지는 끝내 못 오셨다. 매번 그렇다. 양력 1월1일엔 서울에서 설을 지냈다. 그저 가족이 둘러앉아 떡국만 먹는다. 아버지는 수저를 놓기 바쁘게 직장 어른들에게 세배를 나간다. 그러나 오늘, 음력 정월초하루, 진짜 설은 다르다. 전국 일가친척이 모두 시골집에 모였다. 조상께 차례지내고, 어른께 세배하고, 세뱃돈 받고, 윷놀이도 한다. 다만 공무원인 아버지는 예외다. 설날에도 일하기 때문이다. 양력 대신 음력설을 쇠러 시골에 가는 걸 윗사람이 알면 불이익을 받는다고 했다.

 

정부 '새해맞이는 모두 양력설에 하라'

 

1970년대 설 풍경이다. 80년대 후반까지 정부가 정한 설날은 양력 1월1일 뿐이었다. 고향방문과 차례, 세배, 떡국 먹기부터 윷놀이에 널뛰기까지 새해맞이를 모두 양력설에 하도록 정부는 몰아갔다. "허례허식, 이중과세(二重過歲. 이중으로 해맞이를 하는 일)를 하지말자"며 음력설 추방캠페인도 벌였다. 60-70년대를 산 사람이라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허례허식이니 이중과세는 양력설 음력설을 다 쇠고 돈 있는 걸 자랑하듯 차례 음식을 과하게 차려 낭비하는 일을 지칭했다.


참 난감한 노릇이었다. 요즘이야 설을 양력으로 쇠건, 음력으로 쇠건, 아니면 둘 다 쇠건, 몇 날 며칠을 쇠건 뭐랄 사람이 없다. 능력만 닿는다면 한 달 내내 설 기분을 내고 놀이를 한들 대수일까. 오히려 그런 집이 있다면 TV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 소재로 삼아 취재경쟁에 나설지 모르겠다. 그러나 옛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양력 음력설을 다 '먹고 노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양력설만 쇠고 음력설은 쇠지 못하도록 갖가지 수를 냈다.

 

1월1일부터 사흘은 휴무일로 정했지만 음력설엔 하루도 못 쉬게 했다. 공무원은 물론 민간기업도 그런 지침을 따라야 했다. 몰래 나가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하는 사람이 생길까 봐 그날엔 휴가나 출장도 보내지 말라고 공문으로 지시했다. 그뿐인가. 방앗간에는 설날 며칠 전부터 떡을 찧지 말라고 종용했다. 떡이 없으면 차례를 못 지내고 떡국도 못 끓여 먹을 터였다. 웬만큼 배짱 좋은 사람도 음력설을 쇠려면 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음력설 푸대접' 일제 시대의 잔재

 

정부는 음력설은 옛날에나 쇠던 설, '구정(舊正)'이라고 불렀다. 사실은 그 명칭부터가 일제 잔재였다. 대한제국은 친일세력이 주도한 을미개혁 이후 1896년부터 양력설을 정초(正初)로 삼았다. 그러나 민간에선 그걸 따르지 않았다. 관청과 일부 개혁인사들만 보란 듯이 '일본 명절' '서양 설'을 쇠었고 백성들은 그런 이들을 비웃기 일쑤였다. 문제는 일본이 한국을 삼키고 강압적으로 양력설만 쇠도록 밀어붙인 것이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그들은 음력설을 쇠는 조선인은 불령선인으로 몰아 압박했다. 설을 앞두고 고등계형사들이 방앗간에 나가 영업을 하는지 감시하고 설빔을 입고 나온 조선 사람을 보면 옷에 먹물을 뿌렸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자 백성들은 양력설을 '왜놈 명절'이라며 더욱 경원하게 됐다. 음력설에 몰래 조상에게 술 한 잔 올리고 성묘하는 것을 "민족정신을 굳게 지키고 일본인들의 식민지배에 항의하는 운동"으로 여기기도 했다.


 

작가 조흔파 씨는 "일본인들은 음력설을 못 쇠게 하려고 설날에 부역을 시키고 푸줏간과 방앗간을 강제 휴업시키곤 했다"며 "당시 일본인 몰래 음력설을 쇠는 건 민족정신을 잃지 않겠다는 기개의 표시였다"고 술회했다. 상황이 그러니 해방만 되면 기필코 우리 명절을 되찾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다짐한 건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다짐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자유당 정부가 49년 신정을 유일한 설이자 휴무일로 지정해버렸던 것이다.


거기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종전에 쓰던 단기연호를 서력으로 바꿨다. 당연히 양력 1월1일이 새해의 첫날로 굳었고 음력설은 한 계단 더 뒤로 물러앉았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정부조치와 다르게 명절을 쇠고 있었다. 양력설은 쇠는 둥 마는 둥하고 음력설을 진짜 명절로 보냈다. 농어촌은 거의 100%, 도시에서도 3/4 이상 가구는 음력설을 쇠었다.


 

여러 압박 속에도 음력설을 쇠던 국민들

 

귀성열차나 버스표가 동나고 암표가 나도는 건 음력설이나 추석 때지 양력설이 아니었다. 제조공장이 들어선 공단에선 근로자 귀성을 돕느라 전세버스를 계약했고 설탕 한과 등 선물도 준비했다. 사람들은 일제 36년 억압 속에서도 꿋꿋이 지킨 고유명절을 휴무일이냐 아니냐 여부로 무시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새해 무렵엔 음력설을 제대로 쇠게 해달라는 민원도 끊임없이 제기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선물 주고받기를 강력히 단속한 62년의 설 풍속은 흥미로웠다. 그해 음력설 주부들은 떡 방앗간에 들고날 적마다 누군가 감시하는 건 아닌지 신경을 곤두세워 주위를 살피곤 했다. 정부가 이중과세를 못하게 강원도 지역 방앗간을 봉쇄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금세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몸을 사린 것이었다. 급기야 경찰은 "방앗간을 봉쇄한 적도 없고 구정을 쇤다고 단속하지도 않는다."는 담화를 발표하기 이르렀다. 유언비어가 돌고 민심이 흉흉해진 탓이었다.

신문들은 그 상황을 묘하게 분석했다. "신정에는 방앗간이 한산했는데 구정에는 왁작하게 붐볐다. 그런데 이것이 당국의 설 선물 단속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였다. 즉 신정 때 당국이 선물이나 돈을 주고받는 걸 암행 감찰하는 바람에 시중에 돈이 안돌아 많은 집이 명절음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양력에는 못했으니 음력설엔 엎어지더라도 조상께 차례를 지내야 한다."며 눈치코치 살피며 떡을 찧어 제사음식을 장만했다는 거였다.

 

음력설, 민족의 명절로 재탄생하기까지..

 

"설은 음력설이 진짜"라는 민심이 워낙 거셌기 때문일까. 63년 최고회의는 "구정을 '농어민의 날' 국경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양력설은 그대로 두되 음력설 하루를 쉬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문제가 제기되자 이미 양력설에 길들어 반대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중과세를 양성화하고 가뜩이나 많은 노는 날을 더 늘린다는 이유였다. 세계가 모두 양력을 쓰는데 우리만 고리타분하게 음력을 되살려 국제화에 역행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았다.


바라던 바였던지 정부는 바로 "구정을 공휴일로 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고 여러 가지 낭비가 뒤따른다."며 백지화했다. 이후 공화당이 선거를 의식해 음력설을 경조일이나 민속의 날로 지정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공론에 그쳤다. 이는 누구보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대해 성사되지 않은 측면이 컸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착안해 한국의 유신을 이끈 그는 구정 공휴일화는 산업 경제를 일으키는 것과는 거꾸로 가는 일이라며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70년대 내내 박대통령은 음력설날 중앙부서 연두순시를 하거나 기관장회의를 열어 근무기강을 다잡곤 했다. 75년 국무회의에선 "정부가 이중과세를 않도록 국민을 지도 계몽하는 방침에 전혀 변화가 없다"고 새삼 강조하고 "공무원부터 솔선수범해 두 번 설을 쇠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78년 최규하 총리는 "구정 날 공무원이 정시에 출퇴근을 하는지, 근무 중 자리를 뜨지는 않는지 철저히 감시하라"며 '집안단속'을 주문했다.


공직사회에서도 출근을 않거나 조퇴해 설을 쇠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지시를 계속 내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81년 조사에 따르면 음력설을 쇠는 국민은 전체의 81.8%에 이르렀다. 이런 압도적 다수의 음력설 선호에 따라 그해에도 '구정 공휴일화'가 논의됐으나 또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총무처는 "구정을 쇠는 이들이 대부분 고령, 저학력, 저소득층에 농어촌 사람들"이라며 "질과 수준으로 미뤄 불합리한 보수성, 관습의 무의식적 추종과 막연히 놀고 싶다는 생각에 기인했을 것"이라고 국민을 무시하는 표현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부활한 음력설…사라져 버린 설 풍습

 

그러나 절대다수 국민이 쇠는 명절을 언제까지고 이중과세 방지란 명목으로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85년 정부는 음력설을 하루 휴무, '민속의 날'로 제정했다. 그리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89년 '구정'은 '설날' 이름을 다시 얻어 국민에게 되돌려졌다. 근 1백년 양력설에 밀려 숨어 쇠던 진짜설이 명실상부한 민족의 명절로 재탄생한 것이다. 전래의 미풍양속까지 정부의 지침과 규제로 밀어붙이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중과세 굴레에 묶여 푸대접을 받는 동안 우리 고유 설 풍습은 많이 잊어지거나 사라져 버렸다. 정식 명절이 아닌 풍습 정도로 격하된 채 지낸 세월이 길다보니 조금이라도 번거롭거나 힘든 일은 자연스레 도태된 것이다. 설빔을 직접 바느질하는 건 완전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복조리를 사는 일도, 체를 대문에 걸어놓아 야광귀가 촘촘한 구멍을 밤을 세다 새벽을 맞아 물러간다는 풍습도 사라졌다. 올해는 윷놀이나 연날리기 등 모처럼 왁자지껄한 시골 풍경조차 구제역 탓에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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