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편집증' 대한민국…영어 숭상 으뜸은 서울시청"
[김영호의 사자후] 영어가 사람 잡는 나라
프레시안
영어는 6대륙에 걸쳐 7명 중에 1명이 구사한다. 초강대국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영어가 세계어(Globish)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인터넷 정보의 70% 이상이 영어로 수록되어 해독하지 못 하면 정보격차가 커진다. 한국인을 넘어 세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영어의 습득은 소통의 도구로서 필요하다. 출세의 수단으로서 영어는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영국,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던 나라 중에서 영어에 이렇게 미친 나라가 또 있나싶다. 영어는 이제 이 나라에서 거대한 권력으로서 자리 잡았다. 영어의 구사력은 신분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이다.
영어실력 부족해 징벌적 등록금 내야하는 카이스트 학생들?
학생의 연쇄자살이 빚은 카이스트 사태의 본질적 원인은 영어수업이다. 버나드 쇼는 외국인이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모국어를 통해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에게 국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을 100% 영어로 강의한다니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영재교육이 아니다. 아무리 영특한 학생이라도 고등학교까지 외국어인 영어를 터득해서 영어로 수업을 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영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어휘력, 해득력, 청취력을 습득하기에는 공부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언어도 미술이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런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 말이다.
모든 교수가 영어로 말하기, 글쓰기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능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연구업적과 수업능력이 탁월하고 완벽한 영어 표현력까지 갖춘 교수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들리는 말로는 적지 않은 교수들이 서툰 영어로 강의하고 많은 학생들이 그마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고민한다고 한다. 이것이 솔직한 실정일 것이다. 중국사, 동양철학, 일본어도 영어로 가르친다고 한다. 한자문화권에서 한자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 역사를 영어로 강의한다니 이것은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다. 한자로 쓰인 원전을 무시하고 엉뚱한 영어로 강의한다는 자체가 영어 숭상자의 엉터리 교육방식이다. 영어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징벌적 등록금제를 실시해 많은 학생들을 낙오자로 만드는 것은 더욱 더 교육이 아니다.
'어륀지' 그 이후…영어 숭상은 서울시가 '으뜸'
카이스트 사태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영어에 대한 편집광적 모순의 한 단면이다. 2007년 12월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영어대화가 가능하도록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공약했다. 이 공약을 어떻게 실현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해야 한다, 인도영어, 호주영어도 알아들어야 한다는 등등 영어에 환장한 듯한 소리를 마구 쏟아냈다. 집권세력이 영어에 얼마나 능통한지 몰라도 그들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모든 국민이 만사를 제쳐놓고 영어에만 몰두해도 불가능하다. 한국인은 유럽인과 달리 어족과 어원이 다른 영어를 잘 하기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미국에서 대학 4년을 마치고 졸업식 날 졸업생 대표가 읽는 고별사(valedictory)를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는 말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집권세력이 말하듯이 영어는 같은 뿌리지만 지난 400년간 역사적-지리적 배경에 따라 변천하여 같은 표현이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인종적 특색에 따라 발음과 억양도 다르다. 영국영어와 미국영어만 봐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독립적으로 발달되어 왔다. 버나드 쇼는 그 상이성을 두고 미국과 영국은 하나의 공통어로 나눠진 두 개의 나라고 말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미국과 영국은 언어만 빼고 모든 것이 같다는 말을 했다. 1877년 헨리 스위트는 1세기 안에 미국영어와 영국영어는 서로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영어의 지역적 상이점-차이점을 알아야 한다니 이 나라 국민이 아니라 영어가 미칠 노릇이다.
MB정권의 정서를 반영해서인지 정부기관, 공기업, 민영화 기업들이 한국어 상호를 버리고 영문약자로 바꿔 다는 일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민간기업은 그만 두고 말이다. 문제는 일반국민의 입장에서 무엇이 무엇인지 대단히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모르겠다는 점이다. LH, K-WATER, KT&G, NH, NH생명, aT, KEPCO, KOPEC, KB, KT, KDB, IBK 등등 시간을 내서 따로 외워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SH공사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SHift, SH Vill이라니 이것은 또 무엇인지 더욱 모를 일이다. 서울메트로는 서울지하철로 알 듯하고 KORAIL도 짐작되나 A'REX는 도저히 모르겠다. 외국인인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미국의 GE이나 GM은 편의상 원래의 회사명을 줄여 쓰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잘 안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영어 숭상은 서울시청이 단연 으뜸이다. 서울시청은 우리말과 영어 또는 한자를 해괴하게 갖다 붙인 합성어를 너무 많이 써서 시민 노릇하기 정말 어렵다. '희망플러스 통장',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 '클린재정'. '서울비전체계', '시민패트롤', '서울사랑커뮤니티', '서울리뉴얼', '비전갤러리', '그린트러스트', '하이서울리포트', '서울메트로 모니터', '시니어 패스', '하이서울 페스티발', '천만상상 오아시스', '서비스 매뉴얼', '비전서울 핵심프로젝트', '희망드림프로젝트', '시민행복 업그레이드', '클린운영', '보육포털 사이트', '서울형 데이케어 센터' 등등 뭘 말하는지 알 길이 없다. 영어를 잘 하더라도 더러는 짐작조차 어렵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 '반포 컬처 랜드', '금호 나들목 빌리지 커뮤니티 플라자' 등등은 지명만 빼고는 장소를 나타내는 영어단어의 나열이다. 아예 영어를 그냥 쓰나 엉터리가 많다. '윈드 앤 바이시클 플라자', '요트 마리나', '에코마일리지', '서울형 데이케어 센터', 등등 말이다. 'U-Seoul', 'WOW동영상', 'e-poll', 'N서울타워', 'WDC 담당관', '2009 Seoul V-Festival', 'citizen participation' 등등 영어를 공용어로 아는지 영문자를 그대로 표기한다. 문제는 영어실력이 뛰어나다손 치더라도 무슨 뜻인지 모를 영문자가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영어를 웬만큼 터득해서는 문맹으로 살아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들마다 영어마을을 만든다고 법석이다. 서울의 어느 구청은 직원회의를 영어로 한다고 법석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서로 알아나 듣는지 왜 하는지 몰라도 말이다. 행정문서에도 영어가 넘쳐난다. 정부가 나서고 관청이 난리를 피니 회사이름을 영어로 바꾸느라 바쁘다. 아파트 이름도 상품명도 무슨 뜻인지 모를 영문자를 나열해 놓는다. 간판도 온통 영문자 투성이다. 미국영화 제목을 번역하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쓰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영어를 대충 알아서는 국민 노릇은커녕 사회생활하기도 어렵다.
◀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마을(서울시 종로구 통인동)에서 어린이 영어도서관을 세운다고 해서 한글 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영어를 잘 해야 먹고 사는 세상…왜?
취직하려고 해도 면접시험에서 영어실력부터 묻는다. 업종-업무가 영어와는 무관한데도 말이다. 영어를 잘 못하면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우니 전공은 뒷전에 두고 영어에만 매달린다. 대학은 4년 졸업제가 아니라 5년 졸업제로 바뀌다시피 했다. 재학 중에 1년간 어학연수는 필수과정처럼 되었다. 취직하려면 해외연수가 자격증 행세를 하니 너도 나도 해외연수를 떠난다. 실력이 모자라 이름 없는 대학을 나왔더라도 미국 가서 학력세탁을 거치면 취직이 잘 되는 편이다. 막상 업무에 필요한 딴 실력은 크게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유학 가는 길이 점점 길어진다.
영어를 잘해야 먹고 사는 세상이다. 그러니 모든 국민이 영어에 '모두 걸기'에 나선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영어열풍이 그것을 말한다. 방학만 되면 초-중-고교생들이 영어연수에 나서 이 때가 되면 인천공항은 늘 만원이다. 조기유학 길에 오르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난다. 집안사정이 넉넉해서만이 아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돈이 많이 드니까 유학비가 싸게 드는 인도, 필리핀, 아프리카 등지로도 보낸다. 숱한 기러기 아빠들이 봉급을 몽땅 털어 넣고도 모자라 빚더미에 눌려 산다. 초등학교는 이미 늦다며 유아원, 유치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그것도 원어민 교사들이 미국교재로 가르쳐야한다고 야단이다. 제 나라 말도 잘 모르는 갓난이한테 말이다.
막상 미국에 가면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수십년간 미국에 산 이민1세 중에는 적지 않게 영어에 불편을 느껴 자식 도움으로 산다. 남미에서 불법이민이 늘어나면서 스페인어가 제2의 국어로 떠오를 정도이다. 영어가 꼭 필요한 전문분야라면 능통한 영어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정체성을 버리고 영어를 구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국민이 시간과 돈을 영어에 거는 것은 국력낭비다. 영어가 미쳐 사람 잡는 꼴이다. 필리핀 사람들이 영어를 몰라서 남의 나라에 가서 허드렛일을 하는가? /김영호 언론광장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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