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 `분노의 시대`
한국인이 분노하고 있다.
빈곤층이나 일부 사회 불만 세력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부유층이나 기득권층도 그들대로 분노를 표출한다. 젊은 층이건 중년층이건 혹은 노년층이건 세대 간 차이도 없다. 한국인에게 일반적인 정서가 돼버렸다. 분노라는 파괴적 에너지가 확산되면서 경제 성장으로 지탱해왔던 한국 자본주의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21일 매일경제신문은 리서치 전문업체 엠브레인과 공동으로 국민 12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의식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국민의식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1997년 4월에 실시했던 매경 비전코리아 설문조사 때 질문내용을 똑같이 적용했다. 조사 결과 두 차례 경제위기와 14년이라는 세월은 한국인 생각과 마음가짐을 통째로 바꿔놓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최우선 국가목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중 56%가 `삶의 질 개선`을 꼽았다. 1997년 4월 실시한 설문에서는 응답자 중 45.7%가 `경제 강국 진입`을 최우선 국가목표로 지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변화다. 경제 성장이 개인적인 성공이나 행복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성장 신화`에 금이 간 것이다.
한국인이 성장에 냉담해진 근본 이유는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림살이 때문이다. `현재 걱정하고 있는 첫 번째 고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먹고 입는 데도 부족한 금전이라는 답변이 무려 24.9%에 달했다. 이어 주거비 부담 24.6%, 노후대책 걱정 22.3% 순이었다. 지난 14년간 한국 GDP는 두 배 이상(1997년 506조원, 지난해 1100조원) 늘어났지만 국민은 아직까지도 의식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다.
연평도 포격, 일본 대지진 등 전쟁과 재난에 대해 고민을 하는 국민은 2.4%에 그쳤다. 성장에 대한 인식 변화는 △성장잠재력 소진에 따른 충분하지 못한 성장률 △고용이 따르지 않는 질(質) 낮은 성장 △양극화를 부추기는 불공정한 `게임 룰` 등 세 가지 이유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이 중에서도 한국인은 불공정한 게임 룰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정직하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인식은 기존 기득권자들에겐 자기 것을 놓지 않으려는 경쟁적인 지대추구 행위(Rent seeking)로 나타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겐 이런 행위가 쓰라린 좌절감의 원인으로 작용함으로써 나라 전체를 분노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금전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44.6%가 그렇다고 응답했고, 인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56.9%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또 국민 83.5%가 인맥을 활용하면 목적을 보다 쉽게 달성할 수 있다고 여겼고 30.1%는 실제로 목적을 위해 학연ㆍ지연ㆍ혈연 관계를 활용한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심지어 응답자 중 13.6%는 목표를 위해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응답자 72%는 한국 자본주의는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답했다. 체제 자체를 `가짜`로 여긴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엄중한 위기감으로 국가적 생존 본능을 일깨워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 <용어설명>
지대추구 행위 : 자기 이익을 위해 로비, 약탈, 방어 등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현상을 말한다.
분노의 시대 ①
◆가난한자도…부자마저도…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14년 만에 국가 존립 목표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민은 `조금만 더 참으면 다시 잘살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경제 강국 진입을 꿈꿨다. 나라가 잘살게 되면 개인도 함께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열심히 노력해도 가져가는 성과는 국민 평균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국가 목표를 `공동체 이익`에서 `개인 이익`으로 바꿔놓았다. 21일 매일경제신문이 엠브레인과 공동으로 국민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달라진 변화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본지는 1997년 4월 `매경비전코리아` 때 국민의식 설문조사와 동일한 질문을 오늘날 한국인에 묻는 방식으로 비교 분석했다.
`최우선 국가목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10명 중 6명(56%) 꼴로 `삶의 질 개선`을 꼽았다. 1997년 12.9%에 불과하던 소수 의견이 14년 만에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것이다. 연령과 소득별로는 30대(연령별)와 가구소득 200만원 미만(소득별)에서 삶의 질 개선을 꼽은 비율이 높았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30대가 62.3%로 가장 높았고 이어 △20대 59.6% △40대 51.5% △50대 50.6% 순이었다. 소득별로는 200만원 미만이 60%로 가장 높았고 이어 △300만~400만원 미만 59.3% △500만~600만원 미만 58.7% △200만~300만원 미만 57.5% △600만원 이상 50.3% △400만~500만원 미만 49.3% 순이었다.
최인수 엠브레인 대표는 "모든 연령대에서 삶의 질 개선에 대한 욕구가 공통적으로 높았다"며 "다만 본격적으로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 30대와 저소득층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다소 높았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경제 강국 진입을 꼽은 응답자는 45.7%에서 21.8%로 급감했다. 경제 강국 진입이라는 응답은 600만원 이상(29.1%)이 가장 높았고 300만~400만원 미만(18.9%)이 가장 낮았다. 최 대표는 "300만원대 소득계층에서 경제 강국 진입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떨어졌는데 이 계층이 설문조사 대상 중 24.8%로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을 고려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민주화 성숙은 24.8%에서 16.7%로, 통일한국 기반 조성은 15.2%에서 4.3%로 크게 줄었다. 팍팍한 삶의 무게는 남북통일에 대한 열망마저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전통적인 통일 지지 세력인 대학생들이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낮춘 것으로 확인됐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최우선 국가목표를 통일한국 기반 조성으로 꼽은 계층은 자영업자(6.6%)가 가장 많았고 대학생ㆍ대학원생(3.2%)이 가장 적었다. 이는 무직(6.1%), 경영ㆍ관리직(3.4%)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 같은 인식 변화에 경제 과제에 대한 선호도도 크게 뒤바뀌었다.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경제 과제가 무엇이냐`(복수응답)는 질문에 노동시장 효율성 제고가 63.3%로 가장 높았고 산업구조 고부가가치화는 35.8%로 가장 낮았다. 이는 1997년 정부 부문 개혁 77%, 노동시장 효율성 제고 17%였던 것과 대조적인 결과다. 당시에는 산업구조 고부가가치화라는 응답도 61%에 달했다.
국민 상당수가 정부구조 개편이나 산업구조 고부가가치는 이미 충분히 달성한 만큼 불필요한 근무시간 감축, 정규직 비정규직 차별 완화 등 노동시장 효율성을 높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번 매일경제-엠브레인 대국민 설문조사는 9월 1~6일 온라인 패널을 대상으로 2010년 인구센서스 기준 성별, 연령별, 지역별 할당을 거쳐 진행됐다. 신뢰도는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 ±3.0%다.
분노에너지 잘 다스릴 정책 고민해야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로서 많은 것을 외국에서 들여오다 보니 제도는 급격히 개방되고 있는데 정작 국민의 인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중성이 강하다"며 "이런 미스매치가 경제위기, 양극화와 겹쳐지면서 분노를 양산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이사장은 "동시다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한국인의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한국의 선진국 안착 여부를 가리게 될 것"이라며 "선제적인 전방위 정책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강성진 고려대 교수는 "의료 교육 지식 부문에서 진입장벽을 완화하고 규제도 제조업 수준까지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 만족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려면 이익단체들의 지대추구행위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의사ㆍ약사ㆍ교사 장벽은 여전히 높다"면서 "의사만 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조항 같은 것은 오히려 투자 재원 확보를 어렵게 할뿐더러 국민 편익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창양 카이스트 교수는 "생산적인 경기 부양 방안이 필요하다"며 "보육과 교육에 대해 집중적으로 정부가 투자한다면 국민 삶의 질도 높아질뿐더러 내수 확대나 세수 확보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교수는 장기적 방향에 대해 "집값과 교육비에 대한 부담이 줄어야 내수를 살리고 국민 부담도 낮출 수 있다"며 제도 정비를 주문했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이제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서 성장동력을 찾아야 할 때"라며 "불확실성 확산으로 기업들이 단기 현안에만 급급한 것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기 실질임금을 높인다면 유능한 인력이 산업 저변으로 확산되는 동시에 국민소득 향상과 소비 증진까지 꾀할 수 있다"면서 "세제 혜택 부여 등을 통해 중기 인력난을 해소하고 내수 부양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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