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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는 양심 김근태 희망을 남기고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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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2. 1. 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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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는 양심 김근태 희망을 남기고 떠나다
민주화운동 큰 별 고문 후유증으로 64세를 일기로 별세

 

주간경향

 

 

 

"오로지 참여하는 자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지난 12월 30일 64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자신의 블로그에 마지막으로 올린 글 '김근태의 요즘 생각/2012년을 점령하라'의 마지막 문장이다. 입원하기 전인 지난 10월 18일자로 올라 있는 이 글이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진 마지막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사를 쓰면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긴 처음이다.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가장 소중한 취재원 가운데 한 명으로서 30년 가까이 맺어왔던 그와 이승의 연이 다한 것이 허망해서가 아니다. 유언과 같은 이 마지막 문장이 육성처럼 귓전에 맴돌아서다.

 

 

 


일러스트 / 만화 그리는 목각인형

 
취재원으로서 김 고문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진지했다. 답답할 정도로 신중하기도 했다. 블로그의 마지막 말은 그래서 왠지 그의 어법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귓전에 맴도는 것은 틀림없는 그의 육성이다.

 

196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 기틀 다져


원래 그의 꿈은 대학교수였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국면에서 경기고 동기생인 고 조영래 변호사가 가두시위를 주동할 때 김 고문은 비판적 입장이었다. 그는 굳이 그 사실을 기자에게 강조했다. 경기고 동기이자 같은 서울대 65학번인 손학규(문리대)·조영래(법대)·김근태(상대) 삼총사가 1960년대에는 서울대 학생운동의 기틀을 닦고 1970년대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배후였음이 잘 알려져 있는데도 말이다.

서울대 재학 시절 드러난 그의 전력은 1967년 상대 대의원회 의장으로서 6·8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주동하다 제적과 함께 강제징집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김 고문은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봄 시위 국면에서 손학규·조영래가 정학당했다가 '쌍권총 사건'으로 유기천 총장이 물러나는 바람에 처벌이 풀렸다. 그래서 2학기에 시위할 여력이 없었다. 봄에 시위를 못한 상대가 해야 했다. 집회 시간에 45분 늦게 나갔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김 고문은 상대가 집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논쟁하는 자리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강경론을 펼쳤다. 일부 선배 그룹은 이미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싸움을 유예하고 역량을 축적하자는 의견이었고 그를 비롯한 강경파는 상대 말고는 힘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집에 찾아온 경찰로부터 공갈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 민청련 의장 시절의 김근태 전 장관이 연설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그날 내가 맡은 공식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런데 집회가 진행이 안 되는 바람에 내가 늦게 나간 데 대해 공격을 받았다. 창피했다. 대강당에서 집회가 시작되는 걸 보면서 후속 대책을 논의하러 학생회관으로 가다가 뒷마당에서 까만 지프에 태워져 성북경찰서로 연행됐다."

 

기자가 학생운동사를 취재할 때 김 고문은 이렇게 자신의 부끄러운 내면까지 드러내며 진지하게 응해주었다. 유명한 '이근안의 고문'을 견디고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는' 강철 의지의 소유자가 "그때 약간 흔들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복학 후 학생운동조직 '향우회' 만들어


김 고문은 1970년 제대해 복학한다. 그는 고 정운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종태씨 등과 향상림(向上林)에서 중요한 역사를 만든다. 향상림은 당시 서울대 상대 앞마당에 있었던 큰 소나무의 이름이다. 향우회라는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이 태동한 것이다.

 

상대 내부의 스터디 서클로 출발한 향우회는 1970~8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자 배후 역할을 하게 된다. 향우회는 고 김병곤 전 민청련 부의장과 김승호 전태일노동대학 이사장이 주도한 한국사회연구회(한사연)를 후견,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부터 서울대 전체 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졸업할 무렵부터 김 고문의 삶은 도피로 점철된다. 1971년 대학가를 뒤흔든 교련 반대데모,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5년 긴급조치 9호 하의 첫 시위인 서울대 오둘둘 사건 등 주요 사건마다 배후로 지명수배됐다. 수배자에게 긴 도피생활은 옥고보다 더 견디기 힘든 부담이다. 고통이나 피해가 본인에 그치지 않고 주변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김 고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력 가운데 하나는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비밀 활동가 시절이던 '구월동 시대'라고 할 수 있다. 5공화국 치하 최초의 공개운동 조직인 민청련을 띄우기 전인 1980년대 초 인천 구월동의 5층짜리 연탄 때는 아파트에서 살던 시기다. 이 시기에 같은 아파트단지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신동수·이범영·박우섭·민종덕·문국주·박승옥·소준섭씨 등 많은 수배자와 활동가를 보살피며 은인자중, 운동의 활로를 모색했다.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민청련 의장으로서다. 또 그 때문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살인적인 고문에 시달렸고, 결국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후유증을 얻었다. 이를 견디면서 남긴 희망의 메시지가 놀랍다. "오로지 참여하는 자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동지·후배에게 '2012년 희망'을 남기고 그 소임을 다했다고 그리 총총히 떠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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