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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힘들고지칠때------/영화또보기♣

by 자청비 2014. 1. 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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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1989)

 

 

1977년 엘 살바도르(El Salvador)의 대통령 선거 전야. 정치에 관심 없는 학구파 오스카 로메로 신부(Archbishop Oscar Romero: 라울 줄리아 분)는 엠베르토 장군(General Humberto: 해롤드 캐논 분)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선거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며, 반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예상밖으로 주교로 임명된 로메로는 성당내의 동료들로부터 무능력한 주교가 될 것이라는 일부 신부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가운데 독재자인 엠베르토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주교로 취임되던 날 자유를 외치던 군중들이 무차별 총격에 의해 사살당한다. 어느날 시골길을 달리던 그란테 신부(Father Rutilio Grande: 리차드 조단 분)가 저격을 당하고, 그란테 신부의 성당에 간 로메로 주교는 성당을 검거하고 있던 군인들에 의해 수모와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미사를 거행하게 된다.

 

주민을 살상한 군인들에 대치하여 오수나 신부(Father Alfonzo Osuna: 아레얀드로 브라초 분)와 주민들이 성당내에서 대치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무기를 버리고 나오면 용서해 줄 것을 약속받은 로메로 신부는 그들을 설득하여 성당을 나오게 하지만 오수나 신부와 함께 로메로 주교 마져도 군인들에 의해 잡혀가 고문과 수모를 당한다. 자유를 염원하는 민중의 염원에 반하여 점점 탄압을 강화해오는 군사 정권은 마침내 로메로 주교를 암살할 것을 지령한다.

 

주교 회의에서 로메로 주교가 로마로 돌아가던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주교가 대신할 것을 토론하지만 로메로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고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로메로 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하는 성당에 사복으로 위장한 군인이 들어와 저격을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신문사에 들어와 서울에서 주재기자로 생활하던 시절이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절이다. 우연히 신문에서 영화 로메로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억압받는 엘살바도르의 로메로대주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라고 했다. 짬을 내서 혼자 영화관에 갔다, 그 땐 같이 갈 사람도 없었다. 어느 영화관인지도 기억이 없다. 전날 뭐했는지 모르지만 굉장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영화관에 갔는데 졸다가 영화가 끝났다. 영화가 좀 지루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중간 중간 군인들이 보였고 시위 군중들을 진압하고 신부를 잡아가는 장면들이 언뜻언뜻 기억났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하지만 졸다가 끝난 영화라 별다른 감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부정선거 시비가 계속 일었다. 그리고 천주교의 신부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동안 박근혜정권 비판자들에게 '종북주의' 딱지를 붙이는데 맛들인 권력자들이 신부님들조차도 종북주의자로 매도하면서 논란이 확대됐다. 갑자기 로메로 영화가 떠올랐다. 포스팅을 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영화를 찾아봤다. 없다. 뒤지고 뒤진 끝에 번역되지 않은 것이 유투브에 한편 올라 있었다. 즐겨찾기 표시해놓고 두어달 지나버렸다. 오늘은 찬찬히 봤다. 번역이 없어서 무슨 말인지 잘 알 수는 없다. 어렴풋이 짐작하면서 영화를 봤다. 오래전 봤던 내용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정치와 종교는 함께 해왔다. 때론 종교가 우위에 있었던 시대도 있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함께 가기도 하고 반대로 갈라져 싸우기도 하면서 지내왔다. 정치권력자들은 종교의 힘을 알기 때문에 항상 종교인들을 회유한다. 특히 억압정치를 펴는 독재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억압적 권력하에서 종교인들이 권력에 붙으면 편안하게 일신을 영위할 수 있지만 어렵고 힘없는 민중의 편에 서면 서럽고 고달프다. 때로는 자신을 서슴없이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진정으로 종교인으로서의의 사명을 안다면 어느 길을 가야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이기에 그 길은 더욱 뜻이 있고 영원이 이름을 남기게 된다.

 


 

로메로 대주교 

한겨레 2014-1-22

 

오스카르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에서 대주교로 활동하다가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사망한 지 17년이 지난 1997년, 가톨릭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절차를 시작해 지금도 그 과정이 진행 중이다. 그렇지만 이미 엘살바도르 국민은 그를 ‘성 로메로’라고 부르며 추앙한다. 그에 대한 숭배는 가톨릭교회의 문턱을 넘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20세기의 위대한 순교자로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그가 널리 존경받는 이유는 빈곤한 민중을 위해 헌신하면서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단호하게 군부 독재에 맞선 실천적 삶과 죽음이 주는 감동에 있다. 대주교직에 오르기 전의 그는 전통을 지키며 말없이 기도하는 보수 성향의 성직자였다. 그 점이 당시 급진적인 해방신학자들을 견제하려던 바티칸의 눈에 들어 대주교에 서임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빈민 구제 활동을 하던 동료 그란데 신부가 살해된 사건을 통해 그는 적극적 실천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한 일 때문에 그를 죽였다면 나도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전통적으로 엘살바도르의 가톨릭교회는 군부와 부유한 권력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로메로는 빈자의 편에 서서 빈곤과 사회적 부정의와 암살과 고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군부에 무기를 지원하는 미국 정부에도 일침을 가해 미국의 군사 지원은 억압받는 자들의 인권을 침해하리라는 편지를 카터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러나 카터는 묵살했다. 라디오 방송으로도 메시지를 전달하던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의 군인들에게 신자로서 지고한 신의 명령을 따라 민중의 억압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그 다음날 미사를 집전하던 도중 그는 제단 앞에서 총탄에 맞았다.

 

염수정 추기경의 보수적 태도를 두고 말이 무성하다. 그가 어느 정당이나 이념을 대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제로서 소명을 잊지 말고 억압받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기 바란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곽병찬 칼럼] 염 추기경이 가야 할, 로메로의 길

한겨레 2014-1-15


염수정 대주교가 추기경에 지명된 날, 서울 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의 논평은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 전체의 큰 축복!’ 그것이 왜 우리에게 축복일까. 종교나 신앙의 차이로 말미암은 비틀림이 아니다. 이웃의 작은 경사에도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는 우리의 미풍과 이웃 종교의 축일이나 경사에 함께 기쁨을 나누는 종교계의 양속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종교인의 직위란 닭벼슬만도 못한 것. 종교인은 오로지 빛과 소금이 되는 행실로써 평가받고 존경받을 뿐이다. 직위 때문에 존경하는 건 또 다른 우상숭배요 물신주의다. 염 추기경이 ‘두렵고 떨린다’고 한 말에 오히려 위로받는 건 그런 까닭이다.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은 아름다운 사표로 남아 있다. 그가 한국 가톨릭을 대표했던 건 시대의 축복이었다. 그가 추기경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억압받는 약자들에겐 형제가 되었고 억압하는 자들에겐 두려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청주 교구장 시절 정치적 사형수의 봉성체를 기피하고, 살기 위해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불에 탄 주검으로 돌아온 이들을 외면한 또 다른 추기경은 결코 시대의 축복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엘살바도르의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를 떠올리며, 염 추기경이 그와 같은 길을 걷기를 기도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애초 로메로 주교는 해방신학을 ‘증오에 찬 그리스도론’으로 비난했고, 약자들 편에 선 신부들을 과격분자 혹은 파괴주의자로 의심했다. 그러나 벗 그란데 신부가 극우 민병대에 암살당하자, 그란데가 사랑했던 가난한 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전체 인구의 90%에 이르는 약자들의 고통과 신음을 들었고,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탐욕과 폭력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아름답고도 어려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폭력의 근원은 극심한 빈부 격차입니다.” “교회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실현됩니다.”

 

동료 사제들까지 잇따라 살해당하자, 일부 사제들은 총을 든다. 그리고 ‘이 길밖에 달리 선택할 게 무엇입니까’라고 호소한다. 그러자 로메로는 단호하게 반문한다. “신부님은 사랑의 힘을 믿지 못하시는가요.” 그가 단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순교를 예감했고, 각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를 죽일 때 나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곧 실현되리라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사제는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염 추기경은 임명축하식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권고문 ‘복음의 기쁨’, 세계평화의 날 메시지 등에서 그 징표를 분명히 했다. “극소수 가진 자와 절대다수 사람들의 격차가 날로 커지고 있다. … 시장만능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관철된 결과이며, 그로 말미암아 무자비한 새로운 독재체제가 만들어졌다.” “이웃에 대한 우애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 불의의 뿌리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권고했다.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

 

염 추기경 말대로 화해와 공존, 분열과 갈등의 치유는 중요하다. 지학순 주교는 이런 내용의 옥중 편지를 남겼다. “화해는 공동선과의 화해이어야 하며, 독선에 반대하고 관용을 베푸는 아량이어야 하며, 전횡을 일삼아온 강자가 억압에 찌든 약자에게 청해야 하는 것이다.” 억압하고 군림하는 자들의 참회가 선행돼야 한다.

 

로메로의 신앙과 고백은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구현되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로이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위엄을 지니고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위해 싸울 힘을 주셨나이다.” 염 추기경은 순교자 집안이다. 선조는 이웃의 자유와 존엄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당했다. 그것이야말로 남은 이들에게 축복이었다.

<대기자>


 
박창신 신부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과연 종교는 정치에 눈감아야 하는 것인가? 
 
시사포커스 2013-11-25

 

“탄압을 중지하시오!…군부에게 명령합니다…나를 쏘아 주시오!”

1993년에 개봉된 영화 ‘로메로(Romero)’는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던 1980년, 중남미에 위치한 엘살바도르에서 군부에 의해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마지막 생애 무렵을 그렸다.  오스카 로메로 신부는 처음에는 보수적인 종교 인사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에서 밝힌 개혁적 사목방침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였으며, 해방신학을 ‘증오에 가득 찬 그리스도론’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전격 발탁되었을 때, 엘살바도르의 군부, 상류층은 로메로를 환호했다.

 

1977년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로메로가 취임하는 날. 그는 독재자인 엠베르토 장군이 선거부정으로 당선됐다며 외치던 군중들이 무차별 총격에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성직자였다. 그는 세상과 격리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순수(?) 성직자였던 것이다.  영화속에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는 로메로 대주교에게 “압제자의 폭력 속에서 힘없는 민중이 죽임을 당한다”라며 참혹한 현실을 이야기 한다. 그란데 신부는 “농지개혁, 임금, 인권 문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라고 말하지만 로메로 대주교는 반응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해 거리를 두던 로메로는 그의 삶과 함께 했던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 성당으로 미사를 봉헌하러 가다가 암살단에 의해 피살되는 일을 겪게 된다. 이후 로메로 대주교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군부를 끊임없이 비판한다. 로메로 신부의 주변에서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며 회유와 협박을 가한다. 하지만 그는 “선량한 사람들이 실종되는 때에 어떻게 강복을 하겠습니까”라며 “우리의 신앙은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변한다.

 

1980년 3월 24일. 로메로 대주교는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에 대항하라”고 강력하게 호소한다. 강론을 마치고 미사가 진행되던 중 총소리가 울렸다. 로메로 대주교의 사제복은 4명의 무장괴한이 쏜 총격에 피로 물든다. 죽기 하루 전 날, 로메로 대주교는 군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군부에게는 ‘명령합니다 나를 쏘아 주시오!’”라는 선언을 했다.

 

천주교 시국미사 파문이 확산되는 가운데 영화 ‘로메로’가 기억났다. 22일 열린 천주교정의구현 전주교구사제단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원로신부의 발언에 정치권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종교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며 맹비난하고 있다.  박 신부의 발언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국가기관이 개입한 지난 대선은 부정선거”라고 규정하며 박근혜 정부의 퇴진을 촉구한 것이며 또 하나는 이러한 움직임을 ‘종북몰이’로 몰고 가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박 신부의 국가기관이 개입한 지난 대선의 부정선거 발언이 아닌 북방한계선(NLL)과 천안함 관련 발언에 공세를 집중하는 양상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당은 국가기관을 동원한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시국미사의 취지를 왜곡하여 성직자들에게 종북 이미지를 씌우려고 하고 있다.

 

과연 종교는 정치에 눈감아야 하는 것인가? 박 신부는 “정치가 부패하면 비판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더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자들이 정의를 위해 싸울 때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구원을 찾는다”고 말했다. 탐욕에 물든 부패한 권력자들에게 “이 독사같은 무리들아”를 외치던 예수의 정의가 이 땅에도 구현되길 기대한다.

 

 


시국미사와 로메로의 순교…“살과 피와 땀으로 존재하는 복음”

카톨릭뉴스 2013년 11월 28일
 
 
지난 봄, 신학개론 수업 시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수업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질문했던 것은,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학생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제가 가르치는 학교는 성 요셉 수녀회가 설립한 가톨릭 대학이지만, 학생들은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무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와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제 수업으로 인해 자신의 종교와 신앙에 대한 도전을 받는다거나 개종을 고려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은 제 의도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성육(Incarnation)과 죽음과 부활을, 단순한 개념 차원이 아닌 의미로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교 교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학생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질문이었지요. 탁월한 저서들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교 언어와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읽히고 토론하여 의미를 새기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선택한 것은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의 글과 그의 삶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내전이 한창이던 때 1980년, 군부 세력의 인권 유린과 공포정치를 비판하고 가난한 엘살바도르의 민중을 대변하다 극우 군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지요. 보수적인 전통주의자로 알려졌던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민중의 고통과 혼란과 두려움을 함께 겪으며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처럼, 교회 건물을 벗어나 거리로 나아가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만나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예언자적 소명을 자각하게 된 것이지요. 비극이 있기 전 군부 세력의 협박을 받을 때마다 로메로는 이렇게 예언했다 합니다.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저는 학생들에게 로메로가 남긴 강론을 발췌하여 읽히고, 존 듀이건 감독의 1989년 영화 <로메로>를 보여준 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로메로의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지, 또 로메로의 죽음이 어떻게 엘살바도르 민중의 삶으로 부활하는지, 연결 고리를 토론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찾아내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메로가 민중을 만나 회심하는 장면에서 한 무슬림 학생이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입니다. 학생의 이름은 알람(Ahlam), 올해 서른 살입니다. 고향 소말리아를 떠나 미네소타에 정착한지 이제 5년이 된 알람은 계속되는 내전과 굶주림과 일상의 폭력에 시달리던 고향에 대한 슬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기들과 함께하는 수업에서도 늘 열심이었습니다. 독실한 무슬림인 그녀는 히잡을 둘러쓴 채 얼굴만 드러내고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생소하기 그지없을 신학개론 수업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듣고 또 받아 적고는, 그것도 모자라 수업이 끝나면 연구실에 찾아와 질문을 하던 친구였지요. 한번 울음을 터뜨린 알람은 로메로가 미사를 집전하다 암살되고, 이어 생전에 남긴 강론이 배경으로 깔리며 엘살바도르 민중의 현재 삶을 보여주는 엔딩 크레딧에 이르자 거의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저와 다른 학생들은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기다려야 했지요. 눈물 콧물이 다 잦아든 후, 고맙게도 알람은 자신의 생각을 저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군부가 민중을 살상하는 장면들이 고향에 대한 기억과 겹쳐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었는데, 군인들에게 폭력적이고 수치스러운 취조를 당하는 로메로를 아길라레스 농민들이 감싸고 보호하며 “신부님은 우리들의 목소리에요. 우리를 대신하여 저들에게 말하는 사람이에요” 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만 감정이 복받쳐 올랐답니다.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Voice of the voiceless)”가 되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절실하게 다가왔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인가 그녀를 쳐다보던 학생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습니다. 알람의 눈물 덕분에 그날 토론에서는 모두에게 특별한 기억이 될 만큼 진지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우리는 영화 속 엘살바도르, 또 알람의 고향을 지배하는 폭력과 죽음의 질서에 대해 함께 분노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로메로를 통해 어떻게 엘살바도르 민중의 희망으로 되살아나는지, 어떻게 죽음의 질서를 전복하여 삶으로 회복시키는지 각자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때로 제가 만나는 학생들의 경험의 깊이와 고통의 기억이 강단에 서있는 저를 압도하며, 책보다 더욱 강렬하게 복음과 삶을 연결할 때가 있습니다. 그날이 그랬습니다.

    
엊그제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 관련 신문 기사들을 읽다가 몇 개월이 지난 이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신부님들의 시국미사와 관련하여 성직자의 정치 참여가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작금의 논의가 참으로 엉뚱하게 느껴집니다. 부당한 권력과 잘못된 재물이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때, 정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질서를 깨우치는 것은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일 뿐 아니라 교리서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교회의 사명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46항). 또한 사제단 신부님들이 “사제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복음 전파와 인간의 성화”가 사제의 사명이고, “신자들에게 도덕적, 영성적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이 사제의 의무라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와 “인간의 성화”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염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닮아 살기 원한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의 함의를 잊고 삽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은 초월적이고 비물질적인 하느님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어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필리 2,7) 되신 그리스도는 찬란하고 안락한 교회의 제대에 누워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비루하고 땀나는 삶의 현장으로, 정의와 불의가 혼재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폭력과 착취가 난무하는 맘몬의 지배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 진흙탕을 살아내고,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의 희망을 선물로, 또 숙제로 넘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에는 살 냄새, 피 냄새 나는 구체적 삶의 자리와 역사의 부름에 대한 성찰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길에는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의 비난과 소외와 질타가 지뢰처럼 깔려 있습니다. 그런 길을 마다 않고 걸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이 복음 전파이며, 이는 사제와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그런 살과 피와 땀의 현실을 묵과한 채 교회에 들어앉아 눈치를 보도록 권하는 것이 오히려 사제로서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성서와 가톨릭 교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무슬림 학생 알람은 그날 그 수업에서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된다는 말의 울림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성육과 부활의 의미를, 또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의 의미를 아마도 그날 어느 누구보다 선명하게 가슴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과 경험이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던 까닭입니다.

 

복음의 의미가 삶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어오는 모든 순간이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 사건의 재현이며, 복음이 사람과 함께 살고, 죽고, 또 되살아나는 모든 순간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복음은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를 닮아 살겠다는 우리는 삶이 빠져나가버린 껍데기 복음을 붙잡고 삽니다. 복음을 아무리 읽는다 한들, 삶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호수에 던진 돌멩이 소리처럼 둔탁한 파열음만 퍼져 나올 뿐입니다. 살과 피와 땀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듯, 살과 피와 땀을 어우르지 않는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또한 사람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와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람을 살게 하는 사회, 복음이 뿌리를 뻗칠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회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그렇게 분연히 일어나 복음의 토양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조민아 :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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