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보다 더 깊은 사랑… 애달픈 碑만 남았구나
유배의 땅 제주
문화일보 2012-8-14
▲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의 구릉에 자리 잡은 홍윤애의 묘. 중죄인의 신분으로 제주 땅으로 유배왔던 조정철과 사랑을 나누다가 끝내 죽음을 맞았다. 조정철이 유배가 끝난 뒤 30여 년 만에 제주 목사로 부임해서 가장 먼저 이 묘소를 찾아 지었다는 묘비명이 비석에 아직 남아 있다.
# 제주에서 27년 유배를 견디다
이즈음이야 제주는 이국적인 풍경과 아름다운 자연을 품고 있어 모두들 살고 싶어 하는 곳이지만, 오래전에는 멀고 낯설고 거친 유배의 땅이었을 뿐이다. 삼남대로를 따라 땅끝까지 간 뒤 다시 뱃길을 건너야 하는 제주 유배길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험난한 행군이었다. 제주에 무사히 당도한 뒤에도 유배인들은 누구든 고통을 호소했다. 높은 습도와 거센 바람, 비루한 먹을거리와 낯선 풍습 때문이다. 이런 제주에서 30년 가까운 유배생활을 했던 이가 있다.
조정철. 제주에 왔던 유배객 중에서 가장 오래 유배생활을 했던 인물. 제주에 유배당한 기간만 자그마치 27년에 이른다. 육지에서 보낸 유배기간까지 합친다면 모두 30년이 넘는다. 무려 30년의 유배 형벌을 받았다니 무슨 죄가 그리도 무도했던 것일까. 그의 유배는 순전히 막강한 세도를 누렸던 처가 때문이었다. 정조는 집권하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른바 ‘노론 벽파’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 표적이 된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조정철의 처가였다. 조정철의 장인 홍지해는 사도세자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갔던 주범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정조가 쥐고 있는 복수의 칼날이 다가오자 궁지에 몰린 홍지해는 급기야 정조를 시해하고 정조의 이복동생을 왕위에 올리려는 위험천만한 계략을 세웠다. 그리고 조카와 함께 암살단을 결성해 궁중에 난입시키는 초유의 사건을 일으킨다. 이게 이른바 ‘정조 시해모의사건’이다. 궁중에 숨어들었던 자객들이 붙잡히면서 사건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시해모의의 주모자인 홍 씨 일가는 피바람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이런 와중에 천신만고로 목숨을 건진 조정철은 제주 유배형에 처해진다. 남편의 유배가 모두 자기 집안의 책임이라 여겼던 부인 홍 씨는 집안의 몰락과 남편의 유배를 괴로워하다 여덟 살 난 아이를 둔 채 목을 매고 만 뒤였다. 조정철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야말로 ‘비극과 비극의 징검다리’를 딛고서 거칠고 험한 섬 제주로 유배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스물다섯이었다.
제주 땅으로 유배간 이가 어디 조정철 한 명뿐일까. 그럼에도 유독 조정철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그의 유배가 워낙 극적이었던 데다, 유배기간 동안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정철은 제주에서 홍윤애를 만난다. 홍윤애는 유배지 인근에서 오빠와 살며 조정철의 의복이며 식사수발을 도와주던 여인이었다. 어찌어찌 둘은 사랑에 빠졌던 모양이다. 조정철의 입장에서야 자신을 돌봐주는 홍윤애에게서 사랑을 느꼈을 수 있었을 테지만, 홍윤애는 임금을 시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대역죄인이었으니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조정철에게 기꺼이 사랑을 바쳤다. 홍윤애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사랑이 깊어지고 홍윤애는 조정철의 딸을 낳기도 했다.
# 죽음으로 바꾼 사랑이야기
제주 유배 중 조정철은 책도 읽지 못하고 마당에도 나오지 못하는 가혹한 형벌을 견뎌야 했다. 수시로 관리들이 드나들면서 사소한 일까지 트집 잡아 모욕을 주는 것쯤은 예사였다. 잠자리에는 아예 불을 때지 못하게 했고,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도록 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 날로 수척해 갔을 터인데, 관리들은 ‘얼굴이 통통하게 살이 올랐으니 필시 쌀밥을 먹었을 것’이라며 주위 사람들까지 매로 다스리며 문초했다.
급기야 새로 부임해 온 제주 목사는 조정철의 죄를 만들려고 홍윤애를 불러다가 문초를 하기 시작했다. 조정철의 유배지에서의 죄상을 고하라는 얘기였다. 홍윤애는 입을 다물었고 그럴수록 매질은 더해졌다. 형틀은 잔인한 매질로 피가 낭자했다. 결국 홍윤애는 형틀에 묶인 채 죽고 말았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을 당할 때까지도 입을 열지 않은 그녀를 보고 조정철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얼마나 애처롭고 한스러웠을까. 홍윤애가 죽은 뒤에도 가혹한 유배는 계속됐고, 이 같은 유배를 조정철은 제주에서만 27년, 그리고 육지에서 3년을 더 견뎠다.
조정철의 유배는 30년 만에 끝나게 된다. 길고 긴 유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조정철은 곧 사면복권된다. 그리고 유배지 제주에 첫발을 내디딘 지 35년 만에 이번에는 자원해서 제주를 다스리는 도지사 혹은 군수 격인 목사가 돼서 돌아온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당도했던 유배지에 환갑의 나이로 그 땅을 다스리는 관리가 돼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유배자가 목사가 돼서 돌아오는 이 장면이야말로 제주 유배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 할 만하다.
제주에 당도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열일을 제쳐 두고 홍윤애의 묘부터 찾아가 통곡한 뒤 묘비명을 짓고 애도시를 적어 넣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목사 신분의 사대부가 정혼한 사이도 아닌 여인의 무덤에서 통곡을 하고 추모시로 비석을 세운 것은 아마도 여기가 유일하다 싶다. 그렇게 남겨진 시의 한 구절이 이렇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여기서 ‘두 떨기’라 함은 홍윤애와 참판의 부실이었던 그의 언니를 함께 이르는 말인데, 언니도 참판이 죽자 독약을 먹고 따라 순절했다. 목사로 부임한 조정철은 뒤늦게 홍윤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찾았지만 이미 죽고 없었고, 사위 또한 그가 제주에 부임하던 해에 죽고 말았다.
홍윤애의 무덤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다. 삼도동의 공동묘지에 있다가 1937년 제주 농업학교가 이설되면서 손자인 박규팔의 무덤 곁으로 이장됐다. 1135번 도로인 평화로를 따라가다 유수암교차로에서 나와 S오일유수암주유소를 오른쪽으로 끼고 평화10길을 따라 200m 정도만 들어가면 왼쪽으로 돌담 안에 함께 있는 홍윤애와 손자 박규팔 두 기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홍윤애 무덤 앞의 이끼 낀 비석에는 홍의녀지묘(洪義女之墓)란 글씨가 뚜렷하다. 일대의 풍광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묘소를 찾아가기도 그리 쉽진 않지만, 고즈넉하게 들어선 무덤 곁에 앉으면 수백 년 전의 사랑이 느껴진다.
# 유배의 땅에서 신선을 기다리다
▲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의 조선시대 향교인 대정향교. 추사 김정희는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명륜당에는 추사의 솜씨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명륜당 주변의 소나무는 추사의 대표적인 걸작 ‘세한도’에 등장하는 소나무의 모델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주로 유배온 인물들은 제법 알려진 이들만 해도 손가락으로 꼽자면 두 손이 모자란다. 제주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광해군을 비롯해 고승 보우, 우암 송시열, 백산 이세번, 김정, 정온, 김상헌 등이 모두 이곳 제주로 유배왔던 인물이다. 제주 땅에 유배된 이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는 이는 단연 추사 김정희다. 마른 붓질로 황량함을 그려낸 대표작 ‘세한도’가 바로 이곳 제주 유배 당시에 그려진 그림이다. 추사는 제주에서 9년여의 유배기간 동안 추사체를 완성하기도 했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복원된 추사 유배지는 관광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명소. 추사의 서찰과 글씨 기록을 한데 모은 전시장인 추사관까지 지어져 있다. 일대의 유배 흔적을 돌아보는 ‘추사유배길’도 만들어져 있다. 3개 코스로 나뉜 추사유배길 중에서 안덕계곡과 대정향교, 세미물 등을 돌아보는 제 3코스 ‘사색의 길’이 가장 추천할 만하다. 굵은 소나무와 아름드리 팽나무로 둘러친 대정향교에는 한여름의 초록이 무성하다. 추사의 ‘세한도’ 속에 등장하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거친 맛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 정신만큼은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에 비견할 만한 곳이 면암 최익현의 유배길이다. 최익현은 조선 말기 역사적 격변에 앞장서 부딪쳤던 지식인이자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는 대원군의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고 왕의 친정과 대원군 퇴출을 주장했다가 체포돼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최익현은 앞서 송시열과 김정희가 유배를 가면서 걸었던 삼남대로를 따라 제주로 향했다. 조천포에 도착한 그는 제주목관아 부근에 있던 아전의 집에서 유배생활에 들어간다. 거기가 바로 유배길이 시작되는 연미마을회관이다. 유배길에는 최익현의 유적과 귤암 이기온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향불을 올리던 제단인 문연사(文淵社)가 있고, 한일병합 후 유림들이 광복투쟁을 결의하며 석벽에 글을 새겨 놓았다는 조설대(朝雪臺)도 있다. 조설대는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배길은 민오름을 지나 방선문계곡에 당도한다. 면암 유배길의 종착지인 방선문계곡은 제주에서 가장 긴 하천인 한천의 상류에 자리 잡고 있다. 유배길 코스가 아니더래도 방선문계곡은 그 풍경만으로 능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제주의 하천들이 대부분 그렇듯 비가 내린 직후가 아니면 계곡에는 물이 말라 버리지만, 거대한 바위에 뚫린 구멍과 뒹구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마치 신선을 만나러 가는 문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누가 새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바위문 안에는 ‘신선을 만나는 곳’이란 뜻의 ‘방선문(訪仙門)’이란 이름부터 ‘신선을 부른다’는 뜻의 ‘환선대(喚仙臺)’란 이름까지 다양한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흰 사슴 타고 놀던 신선이 떠나가고 없다’는 시구절이 있는가 하면, 바위 구멍이 ‘안개 그림 드리워 오랜 세월 잠가 놓았다’는 시구도 있다. 그 한쪽에는 담박한 필치로 쓴 면암 최익현의 이름 석자도 뚜렷하다. 이렇게 방선문 일대에 새겨진 글귀만 200여 개에 이른다.
일대의 선비들은 물론이고 벼슬아치부터 유배객까지 앞다퉈 방선문계곡에 이름과 시를 새겨 두었으니 아마 당시로서는 방선문계곡이 제주 최고의 명소로 꼽혔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곳곳에 아름다운 바다와 어우러진 제주의 명소들이 즐비하지만, 자연풍광 대신 문향(文香)과 사람의 따스한 체온, 그리고 감동이 느껴지는 곳으로 홍윤애의 묘와 방선문계곡에 버금할 만한 곳이 어디 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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