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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변방의 인권

한라의메아리-----/바람속의탐라

by 자청비 2014. 11. 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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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변방의 인권 1)

원본보기 http://www.huffingtonpost.kr/kyongwhan-ahn/story_b_6209330.html

 

안경환

서울대 법과대학 명예교수, 공익인권법재단공감 이사장

 

<출처 : THE HUFFINGTON POST KOREA 2014-11-24>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가 됨을 인정하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으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세계의 도래가 일반인의 지고한 열망으로 천명되었으며,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며......
- 세계인권선언 전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또한 후세인의 선택적 기억이다. 다른 말로하면 역사는 기록과 기억을 두고 벌이는 후세인의 싸움이다. 인권의 역사는 부당하게 박해 받은 자, 소수자가 최종 승자에 이르는 과정이다.

 

세월 속에는 망각이 있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쉽게 망각한다. 그러나 패자, 박해 받은 자의 기억은 평생토록 지속된다. 기록할 수 없는 기억은 구전으로 후세에 전한다. "태양빛에 바라면 역사가 되고 월광이 물들면 신화가 된다." 소설가 이병주의 수사다.

제주는 인권의 변방이다. 유사 이래 이 섬은 서로 각축하는 세력들의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2차 대전 종전 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최후의 일전이 예상되던 곳이다. 일본으로서는 본토사수를 위한 '최후보루'였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오키나와에 이어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섬'이었다.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이웃 나라 중국이 깊은 관심을 표하는 것도 이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주섬에 '해룡(海龍)'이 출몰해 왔다. "왜구든 누구든 수시로 침범하여 약탈, 겁간, 살인을 자행하던 정복자는 모두 해룡이다. '해룡의 탈을 벗기고 정체를 파악하는 작업'2) 그것이 제주인민에게 주어진 숙명의 과제였다.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는 유엔이 받아들인 최초의 인권협약인 '제노사이드 협약'이 채택되었다.3) 하루 뒤인 1948년 12월 10일은 인류가 내놓은,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세계인권선언'이 채택, 결의된 날이다. 선언의 정치적, 도덕적 구속이 시작된 그 해 5월, 유엔의 결의 아래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반도의 남쪽 절반에 선거가 실시되었고, 7월에는 헌법이 제정되고 8월 대한민국이 출범하였다. 세계인권선언의 아름다운 약속의 구절들은 제헌헌법의 내용에 이미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선언은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를 초래한 두 차례의 대전을 겪은 후, 국제사회가 인간 폭력의 야만적인 폭주를 예방하기 위해 내어놓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합의이다.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약속의 시대였던 그 해, 극동의 변방 제주도에서는 4월 한라산의 산허리를 휘감는 봉화가 올랐고, 5월의 첫날 작은 마을 오라리 하늘에서는 촬영기를 태운 채 저공비행하던 비행기의 Q사인에 의해 평온함을 사르는 화염이 치솟았으며, 그 며칠 뒤 3개 선거구 중 2개의 선거가 무효처리 되었다. 그 즉시 서북에서 내려온 '육짓것들'이 밀려들었으며, 11월은 조선민족 전체를 위해서 '빨갱이의 섬 제주도민 30만 쯤은 쓸어버려도 좋을' 국가의 계엄령이 정당한 법적 근거가 모호한 상태에서 선포되었고,12월, '아름다운 약속'이 이루어지던 파리에서의 '인간성회복에 대한 국제적 연대의 낙관'이 무색해지리만치 야만적인 학살이 한라산의 품 안에서 자행되었다. 그리고 54년 9월, 한라산에 다시 발을 딛는 것이 허락될 때까지, 거짓말처럼 3만 여의 도민이 죽임을 당했다.4)

 

제주도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발발 후 국가는 보도연맹원을 학살5)하였고, 1950년 7월 26일 미군은 충북 노근리에서 공습과 총격으로, 1951년 2월 10일 국군은 경남 거창에서 빨갱이 혹은 그 부역자를 처단한다며 570명6)의 생명을 빼앗았다. 내가 들은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 중의 하나는 고향에서 '빨갱이낙인'의 공포를 체험한 제주인이 그날 거창의 11사단에서 직접 경험했다는 고백이었다.7) 그리고 또 거짓말처럼 한국은 1951년 10월 14일 제노사이드 협약에 가입했고, 협약은 그 해 12월 12일 발효되었다. 집단학살은 전시, 평화시를 구분하지 않고 국제법상의 범죄임을 국가가 확인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8)

 

'그 시절' 국가의 염치가 이런 수준이었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기억을 말살했든가 아니면 '빨갱이 사냥'은 집단학살이 아니라고 생각했든가, 그도 아니면 협약에의 가입이 좀 더 저급한 탐욕을 가리기 위한 요식행위였을 뿐인 염치였다.


기억의 변방

1.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 정당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에서만 법률에 규정된 제한을 받는다.
- 세계인권선언 제29조

제주에서는 동네의 웃어른에게 '삼춘'이라는 공통의 경칭을 쓴다. 다른 지역에서 남성에게만 쓰는 호칭을 제주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한다. 현기영의 소설 「順伊 삼촌」은 외지인에게는 생경하나, 제주민에게는 일상어다. 제주에서 '삼춘'이라는 호칭은 친인척간의 촌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 지역 내에서 오랜 세월을 친족처럼 살아가는 제주의 마을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어이다. 그 상징은 공통으로 체험한 불행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진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에 의해 예비 검속된 민간인들이 묘지 인근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 일제 강점기 탄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6년 후인 1956년 5월 18일이 되어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모두 132구였다. 그러나 신원을 구별할 수 없어 132개의 칠성판에 큰 뼈를 대충 수습하여 현재의 묘지에 이장했다.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百祖一孫)의 묘'라 하였다. 작가 현기영은 창졸간에 당한 공동참사를 후손들이 동시에 추념하는 정경을 이렇게 그렸다."아, 한날 한 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소리가 터졌다." 9)

 

1947년 이후 국가는 7년간 죄의 유무에 대한 정식재판 등의 적법절차 없이 즉결처분, 혹은 대리살인(代殺) 등으로 삼춘으로 묶여진 이 무성(無性)적 공동체의 끈을 해체하고, 그 대신 그 공동체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죽여야만 했던 반세기 동안의 끔찍한 연좌제를 낙인의 철책으로 둘러놓았다.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라는 세계인권선언의 선명한 기치는 국가에 의해 파괴되었고, 침묵은 강요당했으며, '기억은 자살되거나 혹은 타살'10)되었다. 그 시기 살아남은 자들은 좌우의 진영논리와 관계없이 두려움에 가득 찬 침묵을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었으며, 젊은 제주의 세대에게 그간 4.3은 정체모를 원형의 두려움 그 자체였다.

 

4.3세대들의 침묵은 고통스런 기억을 물려주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여전히 '빨갱이사냥'이 진행 중일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고통의 과거가 아니라 두려움의 현재'는 우리 사회가, 또는 우리의 현재가 그 치유에 책임이 있는 집단기억의 트라우마다. 무엇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운명을 살아가는 이들을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현대사이다. 그들에게는'빨갱이'란 낙인이 찍혔고,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인간에게 인간성을 제거하고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과 관계를 빼앗을 때 인간은 능동적인 저항은커녕 어떤 행위도 시작하기 쉽지 않다"11) "기억으로 남아 있는 상처는 육체적 상처보다 더 심하게 그날의 일을 되새김질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도 한다. 그래서 편집증적으로 과거를 잊어버리려 하고, 권력에 대해 사시나무 떨듯이 공포감을 표시하고, 세상을 그냥 불신한다. (...)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은 개인과 가족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국가나 사회의 공식 기억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부림친다."12)

 

1987년, 시민항쟁의 결실로 불어온 민주화의 열풍이 닫혀있던 언로를 열었다. 본격적인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된 지 10여년 만인 1999년 12월 16일, 비로소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 역사의 국유화를 통해 의식이 억압되었던 시절, 4.3은 '기억해내는 것이 곧 투쟁(기억투쟁)'이라는 말처럼, 심연의 구석에 유폐되어 있는 기억을 희미해지는 세월의 메커니즘을 타고 다시 길어 올리는 것은 더 이상 '당한 자'들만의 고통스러운 의무여서는 안 된다. 기억하고자 버둥거리는 것에 대응하여 '국가의 의무 부작위' 역시도 폭력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장막을 걷고 심연에서 끄집어내는 기억의 재생은 곧 여전한 두려움의 환기이며, 그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하고 응시하여야 할 의무는 우리 사회 전체에 지워져 있다. 여전히 죽은 자가 산 자를 끌고 가던 이곳 제주에서, 반세기가 흘러서야 4.3에 대한 봉인이 해제되었고, 55년 만인 2003년 국가권력의 오작동에 대해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할 때까지 우리는 세외(世外)의 침묵이 말하는 언어를 듣지 못했다.


인권의 변방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

모든 사람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3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세계인권선언 제5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인 체포, 구금 또는 추방을 당하지 아니한다.
-세계인권선언 제9조

침묵으로 말하는 것이, 또는 말해져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즉 인권의 유린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사람답게)는 보편적이고 평등하게(누구나), 개인의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필수적인)에 대해서만큼은 당연히 그리고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생존의 근본적인 욕구(정당한)에 근거하여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자격)를 부여하며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조건이 부과(요건)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인권이다.

생명권은 모든 국가권력을 직접 구속하는 효력을 가지며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최대한 보장해야 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제12조 및 세계인권선언 제1조, 제3조, 각종 국제 규약과 보편적으로 승인된 국제법에 근거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1945년 이후 일련의 좌우익의 대립의 과정에서, 제주에서, 여수와 순천에서, 거창에서, 그리고 노근리에서 인권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생명권은 존중되지 않았으며, 신체의 자유와 안전 역시 보호되지 못했다.

국가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향유를 침해하지 않고 인권을 누리는데 방해요소를 만들지 않아야 하며(인권의 존중), 제3자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입법 혹은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하고(인권의 보호),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조성해야 할(인권의 실현) 의무를 갖는다.

1948년 제주에서 국가는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천부적이며, 생래적인 권리,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되고, 타인에게 양도해서도 안 되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이 보호주체여야 할 국가에 의해 무참히 도륙되었다.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하여야 함에도(세계인권선언 제5조) 그해 그곳에서는 비인간적인 고문과 성폭력이 난무하였으며, 어느 누구도 자의적인 체포, 구금 또는 추방을 당하지 아니하여야 함에도(세계인권선언 제9조) 그 해 그 곳에서는 예방이라는 목적 아래 실시한 예비검속 등으로 감방은 한 몸 누이지도 못할 정도로 들어찼다.

그리고 1949년 1월 21일,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는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성을 표시하라"는 직접 지시를 내렸다. "허울 좋은 이념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장본인들의 죽음이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어째서 양민들의 숱한 죽음들마저 자업자득이란 말인가?"13)

사람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세계인권선언 서문), 반대로 법을 가장한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권을 짓이겨 놓았다. 그 시절, '국가의 염치'가 이런 수준이었다.


인권, 국가의 변방

회원국들은 국제연합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준수의 증진을 달성할 것을 서약하였으며 ......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점진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조치를 통하여 회원국 국민 및 회원국 관할하의 영토의 국민들 양자 모두에게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인정과 준수를 보장하기 위하여 힘쓰도록 ......
-세계인권선언 전문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 세계인권선언 제22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 세계인권선언 제28조

인권은 보편성을 지닌다, 누구든지 그 권리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고(주체적 측면), 특정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효력이 발생하여야 하며(효력적 측면), 내용에 있어 동일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내용적 측면). 인권은 보편적 권리이며, 근본적 권리이고, 도덕적 권리이며, 국가를 넘어선 자연법으로서 초월적 권리이다.

 

그러나 인권의 보편은 환상이고, 국가의 염치는 현실이다. 실상 근대사회에서 인권은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보장되었을 뿐이었다. 국제법상 국가만이 인권보호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가만이 입법기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인권선언 전문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인권은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데 이는 달리 보면 입법화되지 못한 인권조항은 보호받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혹은 설령 성문화된 인권조항이 있더라도, 국가의 비상사태나 '실패한 국가'에서 아주 많은 경우 정권의 보호를 위해 그러나 '법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인권은 아주 쉽게 탄압되었고, 이에 항의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압박은 '내정간섭'이라는 간단한 수사(修辭)적 방패만으로도 충분히 방어되었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조약에서 연원을 둔 '주권국가원칙'의 국제법은 국제인권 레짐을 변방으로 내몰았다. 인권을 옹호해야 할 최종책임을 진 국가가 오히려 인권탄압의 가해자가 된 수없이 많은 역사적 경험이 있다.

 

1947년 2월 28일, 가오슝(高雄)의 양민학살 이래 세계사 최장기간의 계엄령(1949-1987) 아래 국민당 정부가 주도한 타이완의 '백색테러', 1975년- 1979년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정권의 '킬링필드' 살륙, 1976-1983년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추악한 전쟁'14), 1994년, 부족 간의 갈등으로 불과 100일만이 백만의 목숨이 사라진 르완다 참사, 1999년, 코소보를 위시한 발칸반도의 곳곳에서 자행된 '인종 청소'와 집단 강간 사태. 등등 무수한 사례가 있다. 그때마다 인권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국제인권 레짐은 무력하거나 무능했다.

 

이처럼 인권의 '보편성'이 주권국가라는 '개별성' 안에서 구현되어져야만 할 때, 그리고 그 '개별'과 '특수'가 마치 특별법 우선의 원칙처럼 자유롭게 원용되어질 때, 종종 '보편'의 비극적 종말을 목격하게 된다.

 

개별화에 의한 비극에 개별화의 잣대를 고집하면 사안의 본질은 가려진다. 보편이 환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인권의 보편성은 종종 그 국지적이고 비극적인 종말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끊임없이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그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할 우리의 과제는 보편에 대한 막연한 낙관적인 기대를 넘어 그 보편적 가치를 어떻게 개별화, 구체화시킬 것인가이다. 국제인권 레짐의 강화와 인권옹호주체의 확대가 끽긴한 과제로 우리 앞에 놓인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변방, 중앙의 지류가 아닌 대안의 원류

역사적, 지리적 시공간에서의 '제주', 개발논리와 공산체제와의 대결을 위해 주저 없이 포기했던 '인권'은 한국사회가 바라보아야 할 변방이다.

 

신영복은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담론 지형에서의 변방, 즉 주류 담론이 아닌 비판적·대안적 담론이라는 의미로서의 변방, 그리고 각성과 결별,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 곧 변방'이라고 위치 지으면서 '우리 사회의 문맥을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곳이 변방이며 중심부의 시각으로 변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우리 사회 중심부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15)

 

변방이 중앙을 지향하는 곳이라면, 즉 중앙의 지류로써만 기능하기를 바란다면, 변방에 되풀이되는 비극은 예정된 것이다. 변방은 다른 말로 변경이다. 작가 이문열은 해방공간에서 1960년대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아메리카, 러시아, 두 제국의 세력이 각축하는 변경의 역사로 파악했다.16)

 

변방이든 변경이든 한 세계의 모퉁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를 성사시키는 만남의 공간이다. 그리고 중앙의 지류가 아니라, 끊임없이 중앙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원류의 공간이다. 변방에서 흘려보내는 원류가 중앙의 지형을 바꿔내는 것처럼, 한국사회의 오늘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4.3과 인권은 '종북' 이름표를 단 좌파의 위험한 의식무기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문명의 중앙에서는 더 이상 죄 없는 희생자17)와 보호되어야 할 소수를 향하여 국가주의의 띠를 두르고, 종북의 딱지를 붙여, 정치적 손가락질을 하는 유무형의 폭력이 주류가 되는 비문명이 활개 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 중앙으로 흘려보내기

국가가 인권침해의 사실을 부인한다면, 혹은 사건의 실체를 호도하고, 공적 의제를 선점하며, 진상을 왜곡하거나 해석의 프레임을 전환하고, 교묘한 여론조작을 통해 '시인'과 '부인'을 전략적으로 선택한다면 이 경우 '본질적 시인'에 대한 요구 역시 변방에서 중앙으로 흘려보내는 원류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대대로 제주는 변방, 한(恨)의 섬이었다. 조선조 중죄인의 유적(流謫)에 최적의 후보지로 애용되어 '원악도'(遠惡島)라는 별칭을 얻었던 저주받은 섬이었다. '육지의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謫客)들이 수륙 이천리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에는 뜻이 전혀 없고 오로지 국마(國馬)에만 신경 썼던 역대 목사(牧使)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 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 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馬政,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이었다.18) 버림받은, 천대받은, 착취당한 땅이었기에 부당한 압제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저항의식은 대대로 전승된 유산일 것이다. 특히 조선조 말에 일어난 '방성칠의 난'(1898) '이재수의 난'(1901) 두 민란은 제주인민의 뇌리 속에는 해룡의 격퇴에 나선 용감한 자위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19)

 

필자는 제주의 역사에서 바다 건너 마주한 타이완 섬의 역사를 중첩적으로 본다. 포모사(Formosa), 엄연히 존재하던 섬을 '발견'했다는 서양인의 탄성대로 '아름다운 섬' 미려도(美麗島)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큰 섬, 우줘류(吳濁流)라는 필명의 문인이 자조한대로 '아시아의 고아' 신세가 된 옛 망명 중화민국, 이 섬은 대대로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네덜란드, 청, 일본, 그리고 대륙에서 쫓겨 온 '외성인(外省人)', 지배자가 바뀌어도 토민의 신세는 매한가지, 분노와 한의 대물림이었다. 제주에서 4.3의 살육이 횡행하기 1년 앞선 1947년, 2월 28일 그 섬에서도 마찬가지 잔혹행위가 벌어졌다. 1979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가오슝(高雄)에서 일어난 자유언론쟁취운동이 있었던 여섯 달 후, 대한민국 광주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났다.20)

 

2000년 1월12일 '제주 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법에 의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윈회가 구성되었고, 위원회는 2년여의 활동 끝에 2003년 12월, 종합적인 진상보고서를 완성했다. "정부의 사과, 희생자 명예 회복, 추모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에 나서겠습니다. 이제 제주는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전 국민과 함께 돕겠습니다." 2003년 10월 31일,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국민의 이름으로 이렇게 약속했다.21) 그리고 직접 과거의 불행에 대해 사과했다. 사건 발생 55년 만에 비로소 특별법의 제정과 대통령의 공식사과로 한 단계를 매듭지은 듯 비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교롭게도 정권이 바뀐 2008년을 기점으로 정반대의 기류가 급습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과거의 국가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2014년에는 4.3위령제가 국가추념일로 지위가 격상된 정부행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후 국가의 대표자는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2008년 1월 21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4.3위원회)를 폐지하는 법률안의 발의에 현재의 대통령과 제주도지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엄연히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의 정부가 발행한 진상조사보고서를 '좌파 정권'의 역사 왜곡으로 규정하면서 개별 연구자의 차원을 넘어선 조직적 이념공세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흡사 그 시절의 군대와 서북청년단의 재출현을 연상시킨다.22)

 

한때 세계의 자랑거리였던 국가인권위원회는 2008년 이후 끊임없이 그 독립성이 위협받더니,23) 마침내 '등급보류'결정을 받아 투표권이 박탈되는 국제인권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었다.24)

한 시절 이 지역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즐겨 부르던 자조와 비애가 담긴 '노가바' 대중가요 속에 대한민국의 변방이자 변경, 제주도의 잔혹사가 암영을 드리우고 있다.

'바닷물이 철썩 철썩 타고남은 제주도
불사르던 폭도들은 어디로 갔나
국방군도 그리워라 경찰관도 그리워
제주도 사백 리에 양민이 운다.'

 

맺음말

'끝나지 않을 세월'이라는 부제가 붙은 독립영화, 「지슬」(2012)이 미국의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국내에서도 독립영화로서는 드물게 14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일찍이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火山島)」가 일본에서 발표된 후25) 실로 오랜만에 제주 4.3이 국제무대에 예술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개방성과 국제성의 상징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 중에 자연환경이 가장 안온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데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최근에 유엔 인권최고대표실(OHCHR)은 북한인권사무소를 서울에 두기로 결정했고 2015년 개소를 위해 서울시와 협의에 들어갔다. 그런가하면 2014년 9월 30일, 세계헌법재판관회의를 주최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장은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설립을 공식 제안했다. 일견 동아시아 인권담론의 주도적 역할을 자청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민감한 남북한 관계의 특성을 감안하면 정치와 인권의 혼화(混和)를 초치할 우려를 금할 수 없고, 후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특정하여 언급함으로써 현실적 가능성을 더욱 약화시켰다.

 

세계의 모든 이슈와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는 'Global'하고 'Smart'한 시대이다. 개인들 역시 모든 문제는 그 원인과 이유, 그리고 그 전개에 있어 얼핏 단순해 보이는 것이어도 실상은 매우 복잡하고 구조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정보의 범람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개방적 여건 아래서 더 이상 한 주권국가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범지구적 인권문제가 등장하였고, 국가 간의 상호의존성이 심화되면서 인권보호의 의무를 국가에 독점시킬 수 없게 되었다. 인권에는 국경도 없다. 인권은 마침표가 없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인권의 주체와 객체도 특정인이나 그룹에 한정되지 않는다. 국가, 개인, 단체, 모두가 '인권옹호자'(human rights defender)이다.

 

제주 4.3처럼 우리 사회의 변방에서 일어난 끔찍했던 인권침해를 국가의 보호의무에만 기댈 수 없다. 권력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념을 교묘히 차용하여 인권의 위상을 끊임없이 격하시키고자 한다. 이미 승부가 판가름 나버린 이념대결의 성적표를 들고서도 한국사회의 중앙에서는 천박한 이념적 편향성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고 있다. 끊임없이 '종북'의 진영으로 밀어붙이고,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협박하면서 승리의 만끽을 두고두고 우려내는 것은 스스로가 점잖지 못하며, 졸렬한 66년 전 가해자의 모습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4.3에 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 단순히 잘못된 과거사실의 적시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과 기억이 앞으로의 남은 삶에도 드리워질지 모를 심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여전히 창궐하는 레드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며, 평화와 인권의 본향으로서의 제주를 위치매기는 것이며, 후세의 기억의 표면화를 통해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공권력의 잔인한 발동을 경계시켜야 하는 것이며, 인권의 본질적이고 아름다운 가치를 위해 국경을 넘어선 연대를 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섬의 '똥깅이' 후세들에게26) 세상은 넓고, 세계가 깨어있으며, 인권을 신봉하는 세계시민은 고귀한 인간성을 유린하는 그 어떠한 제도적 폭력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현직 제주도지사는 제주의 장래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이렇게 썼다. "재발견은 많은 아픔과 책임을 동반한다. 죽비소리와 같이 깨닫고 일어서라고 한다. 중국자본, 초고층 개발, 카지노 등. 누군가 "도지사, 어디고로 감수광"하고 물었을 때, 나의 길이, 나의 목적이, 올곧고 바른, 정당하고 정의로운 길이요, 목적지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27) 어찌 도지사 혼자만의 각오이랴. 당당하고 정의로운 길을 내딛고 싶은 희망과 각오는 평화와 인권을 신봉하는 세계시민 모두의 몫일 터이다.


* (2014. 11. 20, '제주4.3평화포럼' 기조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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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의 작성에 한재훈, 양복심, 제주 출신 두 분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2) 현기영, 「海龍이야기(1979)
3) The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CPPCG) General Assembly Resolution 260. (1951.1.20. 발효)
4)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제주4,3 사건 진상보고서」 결론, 533-540쪽.
5) 진실화해위에서 2009년 확인한 피해자만 4934명, 대략 20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 추정했다.
6) 0세부터 16세까지가 327명, 나머지가 부녀자와 노인이 4명이다.
7) 그는 '육짓것들'한테 그만큼 당했으니, 이들도 당해도 싸다며 당당해했다. 빨갱이사냥으로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던 경험이 다시 빨갱이 사냥의 가해자로 현장에 서도록 한 이 가혹한 역사의 '쇠좆매(채찍)를 휘두른 것이 국가였다.
8) 「제노사이드 협약」 제1조
9) 현기영, 소설집 「順伊삼촌」(창작과 비평 1979) 48쪽. 김원일은 '진실에의 치열성'이란 제목으로 소설집의 발문을 썼다.
10) '어둠에서 빛으로' 2014.4.27. 김석범, 현기영, 이문교 좌담에서
11) 허버트 허시(Herbert Hirsch) 지음, 강성현 옮김「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Genocide and the Politics of Memory) 삶을 위한 죽음의 연구」 (책세상, 2009)
12) 김동춘「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 한국전쟁과 학살 그 진실을 찾아서」(사계절 2013) 78쪽.
13) 현기영, 『해룡이야기』 (127)
14) 실종자 가족들의 모임인 <오월광장 어머니회>(Asociación Madres de Plaza de Mayo)는 청산작업에. 이들은 해마다 3월 24일 쿠데타의 날을 "기억의 날"로 정하고 진실규명의 의지를 다졌다.
15)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돌베개 2012)
16) 이문열 「변경」 1-12 (민음사, 2014)
17)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18) 현기영 「海龍 이야기」(1979) 125쪽.
19) 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창작과 비평, 1983)
20) 안경환 「시대유감」 (라이프 맵, 2012) 72-74.
21) 「제주4,3 사건 진상보고서」 (2003) 543-544.
22) 『제주 4·3사건의 본질과「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문제점 연구』 : 鄕軍硏究論文 / 在鄕軍人會 安保問題硏究所, 國正協 事務處 [공편] ; 김광동 2009. 특히 제12장, 정부의 '제주4.3사건 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 문제 (254-282) 남로당의 반미군정시위보다는 '피해자'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치중립적인 무력충돌이 아니라 무장반란과 그에 따른 정당한 진압과정이었다." (258)"이와같은 잘 못된 보고서가 나오게 된 것은 당시 정부의 성격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하며,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대한민국 역사가 공산주의 확산을 극복하고 전쟁까지 감수하면 지키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로 성공시킨 역사를 부정하였다. 노무현대통령은 불과 며칠 뒤인 3월 1일, 3,1절 기념사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을 겪었다." 면서 다시금 대한민국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을 내비쳤는데, 그런 역사관이 당시 확정된 '제주4.3보고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260); 이선교, 『제주 4.3사건의 진상』 (현대사포럼, 2008.) '대한민국 정체성 회복 국민협의회 의장' 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중앙의장'의 직함을 지난 박세직이 추천사를 썼다. 저자는 "정부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해 보니 중요한 부분을 허위 및 좌 편향적으로 작성한 것을 보고 황당하여 ... 사실대로 정직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어" 쓴다며 저술의도를 밝혔다. (p.2.머리말) "제주 4.3 폭동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는 진상보고서의 주장은 허위 및 좌편향적 주장이다, (p.284) "대한민국 정부에서 보고서를 허위 및 좌 편향적으로 작성한 것으로도 모자라 전 대통령과 국군을 학살자로 책임을 물은 것은 세계역사 이래 없는 사건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낮은 단계의 공산화가 되었다는 증거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한다. (p.345)
23) 안경환, 「좌우지간 인권이다.」 (살림터 2013 )
24) 서울신문, 2014. 11.11
25) 이 작품에 대한 심층적 분석서가 일본인에 의해 저술되었다. 나카무라 후쿠지(中村福治)지음 ; 표세만 등 옮김.『김석범『화산도』읽기 : 제주 4·3 항쟁과 재일한국인 문학』 (삼인, 2001,)
26) 현기영의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의 청소년 판 『똥깅이』. (1999).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서사성과 남도의 대자연 위에 펼쳐지는 서정성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소설이다.
27) "원희룡의 내 인생의 책'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에 대한 공감 교과서" (경향신문, 201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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