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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560명 숨진 최대 학살마을...9일 해원상생굿 ‘한풀이’

한라의메아리-----/바람속의탐라

by 자청비 2016. 4. 1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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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 노형, 과거엔 말 못할 끔찍한 일이...

 

제주의소리 20160410

 

제주4.3 당시 560명 숨진 최대 학살마을...9일 해원상생굿 한풀이

 

제주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제주시 노형. 대형마트, 고가의 주택이 즐비해 제주의 강남으로 불리지만 60여년전 노형은 수백 명의 주민이 군인의 총칼에 쓰러져간 장소였다. 제주4.3 당시 단일 마을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노형에서 처음으로 현장위령제가 열렸다. 이유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위로하는 굿판에 유족들은 깊은 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제주민예총이 주최, 주관한 제14회 찾아가는 현장위령제가 9일 노형동주민센터 앞에서 열렸다. 매해 제주 구석구석 4.3의 현장을 찾는 현장위령제는, 예술과 의례를 통해 죽은 자를 넋을 풀어내는 자리다. 아름다운 제주 풍경이 과거 핏빛 가득한 땅이었다는 사실을 도민 사회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한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이다.

()제주민예총은 9일 노형동주민센터 앞에서 제14회 찾아가는 현장위령제를 열렸다.

 

올해는 제주의 중심으로 불리는 노형동이다. 지금은 오가는 차량이 끊이질 않고, 제주에서 가장 부자동네로 소문난 비싼 땅이지만, 과거 4.3 시절 노형은 확인된 사망자만 560여명에 달할 만큼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 마을이었다. 피해자 절반이 20~30대 젊은 나이다월랑마을에서만 178명이 숨졌고, 월산 96, 광평 76, 정존 64, 원노형에서 37명이 숨졌다.

 

그것은 이유도 설명도 없는 학살이었다. 토벌대의 소개 명령에 따라 내려갔던 소개지에서 소개민이라는 이유로, 소개민 학살을 피해 떠밀려 올라갔던 피난처 곳곳에서는 입산자라는 이유로, 산에서 내려오면 모두 살려준다는 토벌대의 말을 믿고 하산한 뒤에는 귀순자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희생됐다. 제주 전역을 대상으로 해도 단일 마을로서 최대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곳이 바로 노형이다.

 

예로부터 예의와 도덕을 중시해 '선비마을'로 불려졌고, 어승생악의 정기가 모여 전통적으로 문사가 많이 배출됐다는 평화로운 노형 자연마을은 4.3으로 인해 모두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 그 위에는 아파트와 빌딩이 세워졌다.

 

4.3 당시 노형 일대 주민 소개지 및 학살터. 제공=제주민예총.

 

이날 현장위령제는 오전 10시 국악연희단 하나아트’, 캘리그라피 이대길, 춤꾼 박연술이 펼치는 초혼퍼포먼스로 시작됐다. 예술로서 굿판의 터를 정화시킨 뒤, 제주큰굿보존회가 시왕맞이 초감제를 벌였다. 영혼이 저승의 좋은 곳으로 가도록 지원하는 굿이다.

 

제주4.3부녀회가 준비한 간단한 주먹밥을 나눠먹은 뒤, 68년 전 4.3 현장을 밝히는 유족 증언 순서가 진행됐다. 국악단 가향의 추모 노래, 노형 출신 강덕환 시인의 추모시 <그릅써, 가게마씀> 낭송이 이어진 뒤, 질치기·서천꽃밭 질치기로 마무리 됐다. 두 순서는 저승길을 닦아 영혼을 맞아들여 위무하고 저승길로 보내는 과정이다.

 

1930년생 현상지 씨는 현재 미리내공원 일대인 가매통지역에서 가족 8명을 잃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큰형, 형수, 작은형, 조카 2, 동생 가운데 자신과 어머니만이 살아남았다. 불타는 마을, 총소리, 시체가 된 가족들...백발의 노인이 된 현 씨에게 그날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시간이다.

노형리가 불타던 날, 그날 저녁에 경비대가 개진이까지 올라왔어요. 와서 하는 말이 불태울 거니까 다 내려가라는 겁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래 내려갈테니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말했죠. 그러니 경비대가 거기 가면 다 살려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말만 믿고 10식구가 이호2리 오도롱으로 소개했습니다.”

 

4·3 당시 노형마을 주민들을 모아 오랫동안 전략촌으로 운영됐던 정존마을 전경. 제공=제주민예총.

 

4.3 당시 가족 8명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현장지 씨가 과거 사연을 증언하고 있다.

 

 

현 씨의 증언을 경청하는 청소년들.

 

 

안심할 새도 없이 군인들은 소개민을 뽑아내 공개총살을 시켰고, 위기감을 느낀 현 씨 가족은 가매통 지역으로 올라갔지만 쫒아온 군인들에 의해 몰살됐다. 겨우 살아남아 투항하다 시피 내려왔을 때는 현 씨와 어머니만이 남아있었다. 바로 1949122일 노형리 지역 일명 바게밧을 급습한 바게밧 집단학살 사건의 피해자다.

 

그 이후에도 재검속의 위기를 겪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징병을 당한 그는 언제는 귀순자, 반역자라고 몰더니 군인으로는 왜 끌고 간 것이냐. 그렇게 사람이 없었냐며 이승만 정부에 맺힌 한을 쏟아냈다.

 

여전히 과거를 이야기 하는 것이 두렵고, 아픈 추억이 되살아난다고 말하면서도 올바른 과거를 미래세대들에게 전해줘야 겠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 섰다는 노구의 의지에 참가자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오춘옥 심방이 진행한 질치기, 서천꽃밭 질치기는 죄 없이 목숨을 잃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넋을 달래주는 시간이었다. 무대를 가득 채운 560명의 희생자 이름과 나이를 모두 부르는 시간만 30분 넘게 소요됐다. 땅 속에 묻힌 이들에게 빙의돼 통곡하는 오 심방의 모습에 유족들도 서럽게 눈물을 닦아냈다.

 

 

제주큰굿보존회 오춘옥 심방이 4.3 노형리 피해자 이름을 부르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

 

영혼들의 저승길을 정성스레 만드는 유족들.

 

유족들이 희생자들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이날은 제주민예총이 진행한 청소년 4.3역사문화 탐방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도 자리에 함께 했다. 자신들은 겪지 않은 과거를 체험한 이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4.3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됐다

 

노형중학교 3학년 천다영, 이소의 양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정말 힘들게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4.3이 정말 무섭고 끔찍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면서 옛 제주사람들이 집이 불타서 힘들게 도망 다니고 가족과 이별한 시간이 제주 땅에 담겨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금은 제주의 중심으로 불리는 노형동. 허나 과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학살터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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