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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본다는 것, 얼마나 믿을 수 있나

또다른공간-------/생활속의과학

by 자청비 2014. 11. 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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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 똑똑히 뜨고도 고릴라를 못 본 이유는?

한겨례 2014.10.25

 

 

 

[토요판] 하리하라 눈을 보다


(5) 눈과 뇌

◀ 하리하라.

 

본명 이은희. 생물학을 전공해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등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과학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현재는 과학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하리하라'라는 인터넷 아이디를 필명으로, 세상에 퍼져 있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를 걷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격주로 '인간의 눈'과 본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하단 동영상 참조>

 

흔한 치정 드라마의 한 장면.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주인공의 배우자(혹은 연인)가 바람을 피운다고 전해준다. 주인공은 충격을 받고 배신감에 휩싸여 비틀거리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외친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

사람은 오감(五感)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지만, 이 다섯 가지 감각의 인식에 대한 기여도는 공평하지 않다. 사람의 감각 중 가장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은 시각(視覺)으로, 사람이 습득하는 정보의 80%는 오로지 시각에 의존한 정보들이다. 대부분의 정보를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는 심각한 시각 의존성은 자연스럽게 시각에 대한 높은 신뢰도로 이어진다. 그래서 치정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눈에 불을 켜고' 불륜의 증거들을 찾으며, 의심이 드는 행동들은 '눈을 씻고' 다시 본다. 그리고 남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기 전까지는 '눈을 질끈 감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청각 정보(타인의 말)에 의해서 흔들려도 여전히 남아 있던 한 조각의 믿음은 실제 불륜의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일시에 사라진다. 이제 남은 것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분노해서 '내 눈에 눈물나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이 나게 만든다'는 마음으로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뿐. 이 과정을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역시나 '백번 듣는 것은 한번 보는 것만 못하구나'라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눈으로 보는 정보들은 다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정말 '눈에 보이는 대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개구리와 인간의 눈이 다른 점

우리는 어떤 경로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일까? 일단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우리의 신체는 눈만이 유일하게 빛, 그것도 가시광선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진화해 왔다. 그래서 눈이 손상되거나 혹은 기타 다른 이유로 기능을 잃게 되면 우리는 그 즉시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눈 그 자체가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의 동공을 통해 안구 안쪽으로 파고든 빛은 망막의 시각세포들에 의해 전기적 신호로 변환되어 시신경을 통해 눈의 반대편, 즉 뒤통수 쪽에 위치한 뇌의 시각피질로 들어가야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본다'(고 느낀다). 여기서 흥미로운 구조는 눈에서 시각피질로 정보가 전달되는 통로, 즉 시신경의 분포 형태다. 눈은 두 개이므로 여기서 나오는 시신경의 다발도 당연히 둘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시신경 다발은 눈에서 나온 그대로 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하나로 합쳐진다. 하지만 합쳐졌다고 해서 그대로 뇌로 가는 것이 아니고, 교차 지점을 지나면 다시 두 개의 신경 다발로 분리되어 각각 시각피질의 좌우로 따로 들어간다. 즉, 눈에서 시각피질로 가는 길은 11자가 아니라, X자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다시 분리될 거라면 애초에 왜 합쳐지는 것일까?

시각신경의 X자 트위스트는 개구리로부터 사람에 이르는 거의 모든 척추동물들의 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개구리와 사람의 시신경의 교차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개구리의 경우 시신경은 '단지 스칠 뿐'이다. 왼쪽 눈에서 들어온 정보는 몽땅 오른쪽 시각피질로, 오른쪽 눈에서 들어온 정보는 몽땅 왼쪽 시각피질로 들어갈 뿐이기에 시신경의 교차가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다만 눈과 시각피질을 잇는 시신경의 길이가 더 길어질 뿐이다. 얼핏 이는 매우 비효율적인 구조로 보인다. 직선으로 가면 더 빠를 길을 왜 굳이 돌아가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생물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구리에게서는 쓸모없는 시신경의 교차가 사람의 뇌에서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은 그림에서 보이듯이 각각의 눈에 존재하는 망막의 절반, 즉 두 눈의 왼편 망막에서 들어온 시신경은 시교차 부위를 지나면서 모두 시각피질의 오른편으로 들어가고, 눈의 오른편 망막에서 들어온 시신경은 왼편으로 들어간다. 즉, 사람의 경우 시교차 부위에서 절반의 시신경들이 자리바꿈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신경의 스쳐 지나감과 자리바꿈은 개구리와 사람에게 서로 다른 시각의 차이로 나타난다. 개구리는 두 눈에서 들어온 정보를 따로따로 받아들이기에 입체시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사람은 시신경이 자리바꿈을 하면서 통합되기에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양안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애초부터 시신경이 효율적인 전달만을 위해 일직선으로 발생되었다면 우리는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먼 옛날, 시신경이 최대 효율의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은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며 꼬였던 덕에 우리는 세상을 더욱더 깊이 있게 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두 팀의 농구공 패스 보여주며
한쪽 팀 패스횟수 세라고 한 뒤
분장한 고릴라 9초간 내보냈지만
실험 참가자 절반이 못 봤다고 답
학자들은 '무주의 맹시'라 명명
빛은 시신경 통해 뒤통수에 있는
뇌의 시각피질로 들어가는데
일직선 아닌 X자 형태로 가
절반의 시신경 자리바꿈 통해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보게 돼


30개 복합적인 영역으로 구성된 시각피질

경기가 한창이던 농구장. 휘슬이 울리기 직전, 버저비터를 향한 기대감이 한껏 차올라 달아오른 코트 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선수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던 심판이 갑자기 코트 위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 것이었다. 선수들과 관중들이 이 뜻밖의 사건에 우왕좌왕하던 사이, 심판은 숨을 거두고 만다. 뜻밖에도 그의 목덜미는 예리한 칼로 베어져 있었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정황상 분명히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바로 이 코트 위에서, 방금 전에. 놀라운 사실은 누가 그를 죽였는지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선수와 관중을 비롯해 농구장 안에는 200여명이 지닌 400여개의 눈동자가 존재했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아무도 살인자를 본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다행히도 이 영화 같은 장면은 현실이 아니라 미국 드라마 <퍼셉션>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 자체의 기원은 현실이다. 드라마와 동명의 저널-물론 드라마가 더 뒤에 나왔다-<퍼셉션>(Perception)지에 1999년 '우리 가운데 있는 고릴라'라는 제목으로 실린 논문이 그 기원이다. 당시 하버드대 심리학과의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셔브리는 흰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은 학생들 여럿을 두 팀으로 나누어 같은 편끼리만 이리저리 농구공을 패스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은 뒤,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렇게 주문했다. '검은 셔츠를 입은 팀은 무시하고 흰 셔츠를 입은 팀의 패스 횟수만 세어주세요'라고. 영상은 1분 남짓에 불과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흰 셔츠 팀의 패스 횟수를 맞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은 왜 이런 간단한 실험을 하는지 목적을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는 이랬다. 실험 참가자들이 보는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의상을 입은 한 여학생이 걸어나와 가슴을 치고 퇴장하는 장면이 무려 9초에 걸쳐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영상을 본 사람들 중 절반은 자신이 고릴라를 보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나머지 절반은 고릴라를 알아보고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고릴라 등장 사실을 알려주고 영상을 다시 한 번 보여주자, 분명 먼젓번 동영상 속에는 고릴라가 등장하지 않았다며 피험자들이 자신을 놀리려고 다른 동영상을 보여준다고 의심할 정도로 이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도대체 왜 이들은 고릴라를 못 본 것일까?

당시 실험을 실시한 학자들은 이를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칭했다. 이는 시각이 손상되어 물체를 보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보면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 보지 못한다고? 정말로 황당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늘 이런 경험을 한다. 실연한 뒤에는 유난히 행복한 커플들의 모습이 눈에 자주 띄어 속을 뒤집어 놓고,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늙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짠했던 날에는 유독 나이 든 어른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찌나 그렇게 내 마음이 요동칠 때 타이밍도 잘 맞춰 나타나는지. 당연하게도 세상이 그토록 내 맘에 맞게 움직여 줄 리 없다. 고릴라는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내가 이를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즉, 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봐도 알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뇌가 인지했다는 것이다.

눈에서 뻗어나와 교차된 시신경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시각피질이지만, 이곳은 단일한 부위가 아니라 현재 밝혀진 것만 약 30개의 영역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영역이다. 시각 정보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물체의 기본적인 이미지인 선과 경계, 모서리를 구분하는 구실을 하는 V1, V2 영역을 비롯해 형태를 구성하는 V3, 색을 담당하는 V4, 운동을 감지하는 V5와 이밖에도 다른 영역들이 조합되어 종합적으로 사물을 인지한다. 이들은 각각 따로따로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여러 개의 악기가 모여 각자가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음을 연주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음악을 전해줄 수 있는 오케스트라처럼 모든 영역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게 일시에 조율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아무리 같은 피아니스트가 같은 곡을 동일하게 연주해도 피아노 건반이 몇 개 사라지거나 음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으면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같은 것을 보더라도 시각 영역의 각 부분들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으면 같게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시각 영역의 V4 부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색맹이 아니었던 사람도 세상을 흑백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며, V5 부위가 손상되면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아도 느리게 움직이는 클레이애니메이션처럼 뚝뚝 끊겨지는 정지화면으로만 보이게 된다. 하지만 수십 가지나 되는 뇌의 영역들이 오로지 시각이라는 감각 하나에 할당되어 있음에도 세상은 워낙 변화무쌍한지라 뇌는 눈에서 오는 모든 정보들을 빠짐없이 처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뇌가 선택한 전략은 선택과 집중, 적당한 무시와 엄청난 융통성이다.

우리는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눈에 뻔히 보여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으며, 쥐꼬리만 봐도 벽 뒤에 숨은 쥐의 전체 모습을 그릴 수 있고, 빨간색과 파란색이 주는 색의 스펙트럼에서 그 색이 주는 이미지와 의미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때와 장소와 현재의 관심 대상과 그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우리 눈은 정말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에는 눈을 질끈 감는 것이다.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편식하는 것은 뇌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엄마의 잔소리를 코앞에서 흘려듣는 십대 아이의 귀에 달린 엄청난 필터링 능력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눈앞에서 딴전 피우는 애들의 귀에, 아니 뇌에 소리를 흘려넣고 싶다면 일단은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로 먼저 시작하는 것이 그나마 효과가 있다. 그러니 눈앞에 뻔히 보이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던 사람은 '눈이 삐거나' 얼빠진 사람이 아니라, 하기 싫은 숙제를 슬쩍 미뤄버리는 아이처럼 주의집중하지 않는 시각적 정보는 은근슬쩍 뭉개버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뇌를 가진 결과이다.

모든 걸 다 볼 수 없다고 인정하는 자세

고대 이래로 많은 시인들은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노래했다. 이는 어떤 점에서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가진다. 시각의 연결 통로에서 눈이 하는 역할은 세상을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두컴컴한 두개골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시각피질에 한 줄기 빛을 넣어주는 창(窓)의 역할에 가깝다. 방에 창이 하나도 없거나 있더라도 창문이 닫혀 있으면 방은 어두울 것이다. 애초에 빛이 들어오지 않을 테니. 하지만 창이 나 있다고 해도-그것도 두 개나-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비해 방이 너무 크다면 여전히 방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희미한 빛에 의존해 온갖 잡동사니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것은 '눈을 치켜뜨고'서라도 봐야 하지만, 나머지는 적당히 융통성 있게 무시하거나 대강 파악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뇌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본다. 그렇기에 있어도 못 보거나 잘못 보는 일도 다반사다. 그렇다고 '눈뜬 장님'이라고 신세 한탄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만 인정한다면, 서로 시각이 다른 현실에서 내 눈으로 본 것만이 옳은 것이라며 핏대를 세우고 서로를 헐뜯는 일은 오히려 줄어들 테니 말이다.

이은희 과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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