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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과 그 앞의 이야기

또다른공간-------/알아두면좋다

by 자청비 2015. 3.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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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세계사] 마틸다 공주의 '은밀한 복수'

 

해럴드경제2015.03.02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물론 석달 열흘 붉은 백일홍도 있겠죠. 하지만 영원히 피어있는 꽃은 없습니다. 권력도 이 같은 꽃과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어제의 패자가 오늘의 승자가 되고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될 수 있는 게 인생인 것처럼 말이죠.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분쟁을 벌이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강력한 지원자, 마틸다. 그의 영지인 카노사 성에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났다.

오늘 전해드릴 이야기는 전장을 달린 공주 '마틸다' 이야기입니다. 하인리히 3세에게 엎드려 용서를 빈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마틸다. 그의 바람이 결실을 맺었던 걸까요. 하인리히 4세가 마틸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정반대의 날이 오기까지 22년이면 충분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의 장남에게 폐위를 당하도록 물밑에서 미끼를 던진 인물도 바로 마틸다입니다.


자, 11세기 중반인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갑시다. 당시 영지를 가진 유럽의 영주라면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양쪽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때는 교황의 권력이 더 강했던 시기이지만 때때로 황제의 명령이 곧 법이 되기도 했죠. 특히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영지를 둔 영주들은 어느 편에 서야할지 매일같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황제의 영토와 교황의 세력권 사이에 영지가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오로지 교황만을 지지했던 배짱 두둑한 영주가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가문과 척을 진 오늘의 주인공, 마틸다입니다. 마틸다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인 토스카나 지역을 관할하는 영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선 아버지가 암살을 당하면서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죠. 어머니는 광대한 영지를 탐내는 영주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른 영주와 재혼합니다.

 

그런데 마틸다의 새 아버지는 꿈이 큰 야심가였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전쟁을 벌여 북이탈리아를 장악해 버리거든요. 기세를 몰아 그는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영토까지 공격해버립니다. 감히 황제의 땅을 건드리다니, 하인리히 3세는 열불이 납니다. 하인리히 3세는 황제인 자신의 허락없이 마틸다 어머니가 새 영주와 재혼한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였거든요. 그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진군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마틸다의 새 아버지는 가족을 버려두고 혼자 고향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 카노사 성에서 무릎을 꿇은 황제 하인리히 4세(가운데)와 마틸다(우측)의 모습.
 

매정한 새 아버지 때문에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마틸다의 어머니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결국 마틸다의 어머니는 누추한 복장으로 황제가 있는 궁정으로 찾아가 엎드려 빌며 용서를 구합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만 갖게 해주면 그 영지 안에서만 살겠다고 간청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어머니를 체포해 감옥에 가둬버리죠.

 

이 때 마틸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꾸짖으며,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말입니다. 때마침 성에 두고 온 형제들이 "무참히 살해됐다"는 소식도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인리히 3세가 자신의 가족을 매정하게 살해했다고 믿은 마틸다, 그는 하인리히 가문에 대해 칼을 갈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인리히 3세가 세상을 떠납니다. 하인리히 4세가 그 뒤를 이었지만, 황제의 권위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영주의 힘이 황제보다 더 셌기 때문입니다. 새 아버지가 다시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고 반란을 부추기기 위해 독일로 돌아가 하인리히 가문을 압박하던 시기도 이 때입니다. 그리고 새 아버지에게서 토스카나 지역의 영지와 함께 카노사 성을 물려받은 마틸다. 그는 교황의 강력한 지원자가 됩니다. 하인리히 가문에 대한 '은밀한 복수'를 시작하기 위해서 말이죠.

 

(*) 3일자 [바람난세계사]에선 하인리히 4세가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7세에서 무릎을 꿇는 사건,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어머니가 하인리히 3세 앞에서 겪었던 치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마틸다. 그는 맨발에 누추한 옷을 입은 하인리히 4세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요.

 

이 기사 주소  http://media.daum.net/v/20150302092807268


 

 

[바람난세계사] '카노사 굴욕' … 또다른 이야기

 

헤럴드경제 | 2015.03.03

 

 
<마틸다 공주의 '은밀한 복수'> 2일자 기사 후속편입니다. 토스카나 지역을 관할하는 영주 '마틸다' 시선에서 본 '카노사의 굴욕'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교황 만들기' 프로젝트= 부모에게서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역의 영지와 함께 카노사 성을 물려받은 마틸다. 마틸다는 교황청에서 실력자로 꼽히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 힐데브란트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그를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하인리히 가문에 대한 은밀한 복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마틸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힐데브란트는 1073년 드디어 교황이 됩니다.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킨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그러니까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바로 그 교황이 힐데브란트입니다.

 

◀ 이탈리아의 귀족 카노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분쟁을 벌이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강력한 지원자였다. 그녀의 영지인 카노사 성에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힐데브란트가 교황이 되기 전인 1058년으로 시간을 당겨봅니다. 영주가 된 공주 마틸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당시 주교였던 니콜라오 2세를 로마로 안전하게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로렌, 토스카나 지역의 지지를 이끌어 니콜라오 2세가 교황이 되도록 물밑에서 지원하죠. 이 사건으로 힐데브란트의 교회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선출한 교황 베네딕토 10세가 도망을 다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는데,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15년 뒤. 드디어 마틸다가 꿈꿨던 순간이 다가옵니다. 마틸다가 믿고 의지하던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이 된 게 이 때거든요. 마틸다는 이 순간까지 하인리히 3세 앞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치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아온 마틸다가 니콜라오 2세에 이어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군사를 지원하며 교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도 복수를 위한 '물밑 다지기'였던 셈입니다.

 

#. "22년 전 그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3년 뒤 어느 날. 교황과 황제가 밀라노 대주교의 '임명권'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대주교 임명권을 가져와 교황의 권한을 강화시키려고 했던 그레고리우스 7세에 대항해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지역의 주교들을 모아 교황을 폐위시키고자 했거든요. 신정정치를 꿈꾼 그레고리우스 7세와 차근차근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을 키워 나가던 하인리히 4세 사이의 오랜 '알력'이 수면 위로 떠오른 셈입니다.

 

하지만 "대주교 임명권을 행사한다"며 그레고리오 7세에게 맞선 젊은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종교적 공민권 박탈은 물론 황제를 향한 반역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처벌이었죠. 황제의 권력이 커지는 걸 경계했던 독일의 영주들은 반란을 획책하기 시작했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하인리히 4세는 부랴부랴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있는 카노사의 성을 찾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틸다도 교황이 카노사의 성으로 향하고요.

 

마틸다는 성문 밖에서 자비를 구걸하는 하인리히 4세를 차갑고 냉정한 눈길로 바라봅니다. 그 순간 마틸다는 분명 자신의 어머니가 하인리히 3세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을 떠올렸을 겁니다. 불과 22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하인리히 3세에게 자비를 구걸했는데 지금은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마틸다 자신에게 용서를 빌고 있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다니요.

 

▶ 마틸다가 다스리던 카노사 성. 북부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 주에 있다.

 

황제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용서를 청한 지 사흘 만인 1077년 1월 28일에야 카노사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레고리우스 7세와 마틸다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겨우 죄를 사면 받게 되죠.

 

#. 복수는 복수를 낳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카노사 성에서 치욕을 겪은 하인리히 4세가 절치부심하며 6년 동안 세력을 키운 뒤 교황이 있는 로마로 진군하거든요. 당시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결국 하인리히 4세의 손에 의해 폐위를 당하게 됩니다. 독일 지역 영주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았던 황제는 자기 입맛에 맞는 새 교황을 앉히죠. 그렇다면 최후의 승자는 하인리히 가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마틸다는 이후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도 한편으론 황제에 대한 반란을 조종했거든요. 마틸다의 복수극은 수면 아래에서 남모르게 이어졌던 셈입니다. '이탈리아 왕권을 주겠다'는 미끼로 하인리히 4세의 두 아들을 설득시킨 마틸다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키게 만듭니다. 하인리히 4세. 아들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안고 영원히 눈을 감게 됩니다.


 

◀ <좌측사진> 카노사 성에서 무릎을 꿇은 황제 하인리히 4세(가운데)와 마틸다(우측)의 모습<우측사진> 카노사 성 밖에 맨발로 서 있는 하인리히 4세


(*) 하인리히 4세가 복수에 성공했어도 유럽 국왕 서열 1위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에게 굴종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의 힘이 세속군주의 힘을 누르는 시대가 열립니다. 특히 카노사의 굴욕은 자본의 지도까지 바꾸죠. 정치와 종교로 묶여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떨어지며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공화국들이 적극적인 무역정책으로 자본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십자군 전쟁으로 더욱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근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기사 주소  http://media.daum.net/v/2015030308210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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