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연구소 실학산책 401호>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
박 원 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제후국들이 천하의 패권을 두고 약육강식의 경쟁을 벌이던 중국 전국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한(韓)나라에 소후(昭侯)라는 군주가 있었다. 그가 하루는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왕의 모자를 담당하는 관리가 소후가 추울 것을 염려하여 옷을 덮어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왕이 고마움에서 시립한 신하에게 누가 자신에게 옷을 덮어주었냐고 묻었다. 신하들이 모자 담당관이 그랬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소후는 왕의 의상 담당관과 모자 담당관 모두를 처벌하였다(모자담당관은 사형시켰다는 판본도 있다). 의상 담당관은 응당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모자 담당관은 제 일이 아닌데 월권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비자가 법치를 주장한 까닭은
조직경영은 모름지기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거해야 함을 강조할 때 많이 인용되는, 『한비자』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여기에 담겨 있는 한비자의 생각은 업무가 명확히 분장된 관료 시스템을 먼저 확립하고 해당 직책에 임명된 관리가 규정된 업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를 따져 군주가 이에 따른 상과 벌만 정확히 행사한다면 국가경영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모자 담당관이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었음에도 소후가 그를 처벌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적인 판단에 따라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 일을 행함으로써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무시한 죄목이다. 국가경영은 인치(人治)가 아니라 법치(法治)에 의거해야 한다는 동양 법가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관점이다.
그런데 한비자의 이런 생각의 갈피 속에서 민주주의적인 문제의식의 한 측면을 발견한다면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여기에는 ‘보통 사람’과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사고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자신의 법치론은 태평성대를 이끈 요(堯)·순(舜)과 같은 성군이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걸(桀)·주(紂)와 같은 폭군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수준의 군주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이라 말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치란(治亂)의 양 극단을 상징하는 요·순이나 걸·주 같은 군주가 다스리는 시대는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반면, 역사 대부분의 시기는 그저 그렇고 그런 중간치 군주에 의해 나라가 통치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 잘 만나서 왕노릇하는 군주들의 시대가 대부분인 이상 통치론은 모름지기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성군을 상정하고 통치론을 입론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구백 여년은 언감생심 성군정치는 흉내도 못내는 고만고만한 군주들에게 감당할 수도 없는 짐을 지우는 우를 범해 국가경영을 망쳐버리기 십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에 희망을 거는 정치를 고집한다면 이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처럼 나무그루터기를 지키고 앉아 토끼가 걸려 넘어지는 요행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비자는 비판한다. 그렇다면 답은 자명해진다. 천 년에 한 번 오는 요·순을 염두에 두고 국가경영의 얼개를 세움으로써 나머지 시대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고 보통의 군주가 오더라도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상시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한비자의 법치사상에 깔려있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요약하자면, 한비자는 시스템을 상수로 하고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을 변수로 하는 통치론을 구상한 셈이다. 운영자의 자리에 어떤 군주가 오더라도 국가가 시스템에 의해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게 하려는 취지에서이다. 한비자의 생각이 민주주의의 문제의식과 어떤 측면에서 맞닿을 수도 있다는 발상이 발동하는 부분은 이 대목이다. 바로 ‘보통사람’을 주권자로 상정하고 ‘시스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주권자에 의해 확립된 ‘절차’에 의거하여 작동되는 국가에 대한 신념을 양자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라고? 경제는 경제논리로만 해결되지 않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대목은 동시에 한비자식의 구상이 잠시 오버랩만 될 뿐 결코 민주주의와 만날 수 없는 근원적인 간극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무엇보다 한비자의 법치에서 주권자는 ‘보통 군주’ 1인임에 비하여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인 ‘보통 사람들’ 모두라는 데서 분명해진다. 근래 엉뚱한 계기로 회자되고 있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른바 주권재민의 원리가 한비자의 법치 프레임에서는 처음부터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간극으로부터 너무나 익숙한, 민주주의 결코 훼손될 수 없는 토대를 역설적으로 확인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 주체가 되어 자신들이 결정한 절차에 의거하여 각자의 의사를 표시하고 합의점을 도출해가는 정치적 제도라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의 형식상의 최소조건은 모든 구성원의 공의(公議)에 의해 확립된 절차의 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근래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이 최소조건이 뒷걸음질 치며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합의된 절차의 준수라는 원칙이 하나씩 뭉개져가고 있다. 심지어 대의민주주의 상징인 정당정치가 이를 앞서 실천(?)하는 아이러니를 목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주권재민의 원리에 따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들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허수아비로 내몰리는 것도 모자라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줄을 서는 장면이 연일 연출되고, 이를 통해 공당(公黨)이 사당(私黨)으로 변질되는가 하면 정체성까지 새로 규정받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덕이 아니라 힘에 의한 법치를 정당화한 한비자의 구상보다도 못한 정치현실이다. 1인 주권자와 시스템이라는 한비자의 두 축 가운데 전자는 시대착오적으로 부활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치권은 문제는 경제라며 근시안적인 진단에만 매달린다. 그리하여 한쪽에선 저들이 경제를 발목잡고 있다고 호소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반대로 저들이 경제를 망쳤으니 심판해달라며 읍소한다. 내로라하는 경제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는 정당에서 경제문제는 더 이상 경제논리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상식에 처음부터 무지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도시 요령부득이다. 이를테면 이번 장에서 한몫 잡으면 되지 다음 장까지 생각할 게 뭐 있냐는 식이다. 국가경영에 대한 어떠한 원려(遠慮)도 없이 이처럼 외곬으로 내닫는 형국에서 정치인들이 때만 되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휘두르는 그 경제에 궁극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자본이야말로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일 터이다. 그러니 한때 유행하던 패러디를 다시 한 번 호출할 수밖에.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It’s the democracy, Stupid!)”
글쓴이 / 박원재
·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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