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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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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6. 7. 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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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시세계]

아래 글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 소견입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를 평가하는 여러 의견들 중 한 갈래에 부합하는 의견이므로 아주 창의적인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두겠습니다.

제가 대학원 과정 중에 제출했던 [신동엽론]의 일부(기존연구 검토나 본론의 작품분석은 너무 딱딱한 듯해서 제외하였음)를 심하게 요약·발췌하면서 되도록 논문스럽지(?) 않게 재정리 한 것이니, 그냥 가볍게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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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1930∼1969)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이꾼의 대지]가 입선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으며(석림石林이란 필명으로), 김수영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후반기 모더니즘이 한국 문단을 풍미하던 시기에 [이야기하는 쟁이꾼의 대지]로 등단한 그의 시적 경향은 당시의 풍토에서 볼 때는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문단 생애는 그리 길지 않았고, 등단 후 1969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0여 년 동안 그가 발표한 시는 70여 편에 불과합니다.

시 외에는 시극대본 1편, 오페레타 대본 1편, 평론 성격을 띤 산문 10여 편이 있습니다. 1989년에는 실천문학사에서 그의 수필, 편지, 일기 등을 모아 단행본(<젊은 시인의 사랑>)으로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사보셔도 좋을 듯.

신동엽 시인에 대한 연구는 해가 거듭될수록 관심의 폭이 더 넓고 깊어져 왔습니다. 1983년에 이미 신동엽에 대한 핵심적인 논문과 평론이 한데 묶여 발간되었고, 1999년에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은 추모 논문집이 다시 한번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구중서·강형철 편, {신동엽 30주기 학술논문집; 민족시인 신동엽}, 소명출판, 1999)

신동엽 시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김수영과 조동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신동엽에 대한 논의는 '민족', '참여', '역사'라는 키워드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신동엽의 시가 갖는 '민족', '참여', '역사' 등의 레테르를 배제하고 새로운 방법론으로 작품을 읽고자 한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결론은 기존의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신동엽의 시세계가 꾸준히 설명되어 오는 동안 '민족시인 신동엽'으로서의 위치는 오히려 더 고양되고 그 자리가 확고히 자리매김되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역설적으로, 1960년대의 한국문학사를 살다 간 신동엽의 존재가 그만큼 확고부동한 색깔을 지닌 시인이었다는 말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세계의 출발점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김수영이 "50년대에 모더니즘의 해독을 너무 안 받은 사람"이라고 신동엽을 평가한 것도 이와 같은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동엽류의 반모더니즘적인 시의 탄생은 사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1960대는 한국 내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갈등과 비판이 4·19 혁명으로 표면화된 때로,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그 전환점을 마련하게 됩니다. 또한 문단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발을 같이 하여 문학의 본질과 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4·19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단의 경향은 시와 현실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급격한 관심의 대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시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회적 기능을 가져야 하며, 시인이 사회의 선도적인 비판적 지성이 돼야 한다는 신념과 주장이 크게 설득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한편 <순수>와 <참여>의 대립 구도를 겪으면서 문학이 사회적인 기능과 태도에 주목하게 된 것은, 문학이 역사와 현실에 대한 신념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현실지향적인 문학 정신의 고양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동엽의 문학 활동은 이러한 사회적·문학적 요구에 잘 부응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당대로서는 김수영과 함께 선구적이고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흔히 그의 대표작이라 일컫는 [껍데기는 가라]는 <참여시> 경향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신동엽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껍데기는 가라]가 그의 시세계의 핵심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껍데기는 가라]는 그의 시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해 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신동엽의 시세계는 오히려 김종철이 지적했던 '도가적 상상력'이나 조태일, 김윤태 등이 주목한 '중립사상'에서 더 설득력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때의 '중립사상'이란 핵심, 정상, 근원, 집중, 순수 등의 여러 의미가 뭉뚱그려진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힘을 나타내며 동시에 영원한 민중적인 힘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동엽 자신이 [시인 정신론]에서 피력한 글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잔잔한 해변을 원수성(原數性) 세계라 부르자 하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의 세계는 차수성(次數性) 세계가 된다 하고, 다시 물결이 숨자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물방울의 운명은 귀수성(歸數性) 세계이고, 땅에 누워 있는 씨앗의 마음은 원수성(原數性) 세계이다. 무성한 가지 끝마다 열린 잎의 세계는 차수성(次數性) 세계이고 열매 여물어 땅에 쏟아져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은 귀수성(歸數性) 세계이다.
(<신동엽 전집> 364면)

원수성 세계는 인류의 봄철, 원초적인 대지의 생명성으로 갈등도 대립도 없는 순수 생명, 사랑, 화해와 구원의 세계입니다. 차수성 세계는 인류의 여름철로 인간의 역사 이래로 문명과 제도에 의해 지배받으며 발달된 산업의 분업화는 인간을 맹목적인 기계문명의 기능자가 되게 합니다. 이는 이기와 불신, 공포, 악이 팽배한 세계입니다. 귀수성 세계는 인류의 가을철로 '씨앗의 마음'으로 다시 원초적인 시원(始原)의 원수성 세계로 귀소하기 위한 노력의 단계에로 이르는 세계입니다. 즉 인류의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신동엽은 이러한 세계에 필요한 인간형이 '전경인(全耕人)'의 정신을 지닌 인간이라 하였는데요, 이는 곧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 정신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경인이란, 밭 갈고 길쌈하고 아들 딸 낳고, 육체의 중앙에 합당한 양의 발언, 세계의 철 인적 시인적 종합적 인식, 온건한 대지에의 향수적 귀의의 조화적인 실천생활을 이루는 귀수성 세계 속의 인간, 그리고 원수성 세계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신동엽전집>, 370면)

신동엽이 밝힌 이와 같은 시정신론은 그의 시세계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신동엽 시세계에 있어 '알맹이'와 '껍데기'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알맹이는 원수성 세계를, 껍데기는 차수성 세계를 의미합니다. 알맹이는 그의 중립적 세계관과 연관지을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핵이며 본질, 순수, 사랑, 평화, 생명성 등을 내포하면서 민중, 민족의식의 뿌리를 형성합니다. 반면 껍데기는 부조리한 현실을 통해서 드러나는 문명성, 인간상실, 전쟁 등과 민족, 민중의 자주적, 주체적인 삶을 가로막는 모든 비본질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시정신론은 그의 시작업을 통해 충분히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시세계가 껍데기로 대변되는 차수성 세계를 비판하고, 귀수성 세계를 통해 알맹이로 대표되는 원수성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이상세계는 원수성의 세계로, 이것은 도가적 자연관인 무위자연의 세계 내지 원시공동체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세계에 대한 지향은 때때로 그의 시를 관념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혹자들은 이것을 신동엽 시의 한계점으로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시를 너무 '참여시'의 기준에 맞춰 해석하려다 보니 다소 완강한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읽다 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그것은 그의 시가 부드러움과 거칠음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신동엽 = 참여시>라는 구도가 각인되어 있는 분들이라면, 그의 부드러운 면을 발견하고는 다소 놀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자는 신동엽의 시를 '맑음, 고움과 거칠음의 공존'으로 보았는데, 전자는 '시어'에서, 후자는 '형식'에서 오는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신동엽의 시가 부드러움과 거칠음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은 시정신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 즉 원수성 세계를 그릴 때는 부드러움이, 차수성 세계를 그릴 때에는 거칠음이 시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수성 세계 자체는 외세의 간섭이 없고, 민중의 고통이 없으며, 인간(인류)은 순수성을 회복하고, 더불어 민족통일이 이루어진 세계에 해당되므로, 평화와 조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부드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차수성의 세계는 치열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세계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도 예리하며, 거부와 저항은 점점 더 강력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쨌든 신동엽의 시세계가 부드러움과 거칠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점은 바로 이러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이것은 관심 있으신 분이 연구를 해보면 좋겠지요.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를 통해 참여시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 전반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원수성 세계를 지향하는 과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지향한 세계는 원수성 세계니까요. 그런데 그 세계는 처음에는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가 현실과 역사를 인식하게 되면서 점점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벽이 허물어진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죠. 통합된 세계만이 원수성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며 민족의 순수성, 인류의 순수성을 되찾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신동엽의 [산문시1] 입니다. 그의 시정신의 귀착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판단되어서 아래에 수록해보았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1968년 당시 <월간문학>에 실린 상태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니, 오해 마시길)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1968, 11월 창간호, 83면)


이제 아셨나요? 시인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를 목 터지게 외치며, 혁명을 부르짖으며,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세계가 어떤 모습인가를. 그의 목소리가 거칠면 거칠수록 그 이면에는 평화와 조화의 세계를 갈구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앞서 밝혔다시피 <참여시>라는 형식을 딛고 궁극적으로 그가 바라고 지향했던 바가 사실은 도가적인 '중립사상'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은 일부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판단은 그의 작품을 다 읽어본 뒤 각자의 몫으로 남겨둬야겠지요.
그런데 과연 지금, 이 시대..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아 있나요?

NAVER 불로그 >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에서 가져온 글임.

출처 :강가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 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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