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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부르는 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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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6. 7. 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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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명문 열전 ⑬ 김훈 

현장에서 부르는 펜의 노래.. '밥에 대한 단상' 


중앙일보 | 2016.07.04



좋은 글을 쓰려면 잘 쓰여진 과거의 글들을 읽어보는 것이 우선이다. 디지털 시대 글쓰기의 시작도 아날로그 시절의 명문(名文)들을 다시금 감상해보는데서 출발한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 언론사의 한 때를 풍미했던 걸출한 문객들이 써내려갔던 명문들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김훈(1948~)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 이전에 30여 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던 저널리스트다. 가난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워 고려대 영문과를 중퇴한 그는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 한국일보만이 유일하게 고졸에게도 입사지원 자격을 줬기 때문인데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이 김훈의 당돌한 모습을 눈여겨봐서 합격시켰다는 후문이다. 


문화부 평기자 시절인 80년대 초반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여행르포 기사였던 ‘문학기행’을 매주 연재하면서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주목을 받아 일찌감치 ‘글 잘 쓰는 기자’로 자리매김했다. 90년대 초반 시사주간지 시장이 본격적으로 떠오르자 시사저널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까지 지냈다. 조직과의 원만한 생활이 어려웠던 탓인지 이후 한군데서 정착하지 못했던 그는 1995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으로 등단하며 소설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김훈의 아버지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김광주(1910~1973). 50년대 말~60년대 초 『정협지』『비호』 등의 작품으로 유명했던 국내 무협소설 1세대 작가였다. 아마도 그의 문재(文才)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듯싶다. 그가 다시금 언론계의 조명을 받은 것은 50이 넘은 나이인 2002년 한겨레에 부국장급 사회부 기동팀 사건기자로 취재 현장에 복귀하면서부터다. 아들 뻘 되는 타사의 신참 경찰출입기자들과 함께 일선 현장에서 부대끼며 특유의 문체로 써내려간 기사들은 지금까지도 명문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의 실험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1년 만에 끝이 났지만 고참 기자들의 현장 취재가 드물었던 당시 언론계 풍토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에서 한국 언론사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훈은 기자이자 소설가였지만 소설과 기사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도기사에서는 사실(fact)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과 의견을 분리해야 한다”며 “사실이 먼저 있은 후 의견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거대담론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항상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채 내 욕망을 지껄이고 있는 문장인지 구분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의견을 사실 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 그는 “언론인들은 근본적으로 신념의 언어가 아닌 과학의 언어로 사유해야 한다”며 “사실에 바탕해서 의견을 만들고, 의견에 바탕해서 신념을 만들고, 신념에 바탕해서 정의를 만들고, 정의에 바탕해서 지향점을 만들어야한다”고 강조했다.

김훈은 특히 “기자는 개다. 달려가서 뼈를 물어 와야 된다. 어설프게 살점 따위를 뜯어 와서 는 안 될 일이다”라며 취재과정에서의 정확성을 주문했다. 기사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해서 취재하는 것이 바로 정확성의 요체라는 것이다. 


그의 글쓰기 철학은 한마디로 '살아있는 글이란 현장과 사실에서 나온다'로 요약된다. 따라서 뉴스에서는 현란한 수사적 표현보다는 취재를 통해 얻은 구체적이고 유익한 정보를 논리적으로 배열해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보에 바탕을 두지않는 수사학이나 사상은 다 필요 없으며, 그래서 기사를 쓰기위해서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더 많은 사람과 자료를 만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둔 그의 글은 상황을 말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마치 스케치하듯 보여준다는 점에서 ‘Show, Don’t tell’의 기사작성 원칙을 살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수사적 장치를 최대한 배제한 채 주어와 동사라는 뼈대만 가지고 사실을 보도하듯 써내려간다.

다음의 글은 한겨레 현장기자 시절 ‘거리의 칼럼’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면에 남겼던 31편의 글 중 2002년 3월에 썼던 두 편의 글이다. 원고지 3매, 600자 남짓한 짧은 공간에 감정이 절제된 드라이한 문체로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써내려간 문장이 인상적인 글이다. 결코 호소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만을 그대로 옮겨놓을 뿐이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당시 현장 어딘가에서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가며(그는 당시에도 연필과 원고지만을 고집했다) 묵묵히 글을 써내려갔던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듯하다. 


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기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부름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라파엘의 집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 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불우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 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아들이다.

술 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 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 라파엘의 집’ 한 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 뼈도 있다. 중복장애아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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