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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베를린 제패 그 이후(3)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6. 11. 24.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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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표의 스포츠野史
<스포츠평론가>
1947년 제 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가운데)과 손기정 감독(오른쪽) 등 일행은 태극기를 들고 인천항으로 도착했다.(사진 제공=한국체육인동우회)

1946년, 손기정은 마라톤 선배 권태하를 회장으로 추대한 마라톤 보급회를 결성했다. 자신의 베를린올림픽 제패로 국민에게 그토록 강렬한 감격을 안겨준 마라톤을 전국에 장려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임의단체였다. 구체적으로는 전국을 돌아다녀 유망 장거리 선수를 발굴, 보급회 임원들이 훈련시켜 올림픽대회 등의 세계무대에 진출케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보급회를 운영하려니 돈이 달린다. 권태하를 필두로 김은배, 손기정, 남승룡 등 보급회 임원들은 당대의 부호들을 찾아 보급회 창립의 취지와 운영 방침을 설명하고 희사를 구했다. 화신산업의 박흥식(朴興植), 삼양사의 김연수(金秊洙) 등 해방 직후의 대표적 부호들을 찾아 희사를 요청했던 것이다. 모두가 만나기 힘든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김일성이 그랬듯이 베를린 제패의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피 끓는 감격을 맛보았던 인물들이다. 그때 그 감동을 주었던 주인공들이 직접 찾아왔다면 안 만날 수 없다. 권태하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만큼 웅변가였다. 보급회 설립 취지를 유창하게 설명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그저 배석하고 있을 뿐이다. 일행이 취지를 모두 설명하고 희사를 구하면 호응은 바로 나왔다. 5천 원, 1만 원을 서슴없이 기부하는 것이었다. 5천 원이면 8.15 직후, 서울에서 번듯한 집 한 채는 능히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보급회는 전국의 학교를 순회하며 유망 신인을 발굴하는 임무를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맡겼다. 이들은 베를린올림픽대회의 기록영화를 구했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여배우 출신의 감독이 제작한 것인데 < 민족의 제전>과 < 미의 제전>이라는 2부작이다. < 민족의 제전>은 성화계주와 극적인 개∙폐회식 및 육상 경기 위주로 짜여진 것인데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감동적인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진다.

그 속엔 손기정, 남승룡이 1,3등을 차지하는 과정이 상당 부분 나와있다. 두 사람은 눌변이었다. 그러나 < 민족의 제전>을 먼저 상영한 다음 더듬더듬 베를린에서의 승리의 과정을 설명하면 끝내는 폭풍우와 같은 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런 다음 학생들을 교정에 끌고 나가 운동장을 돌게 한 끝에 유망 선수가 발견되면 그들을 보급회의 합숙소에 수용하여 지도했다.

이런 과정에서 발견된 선수가 서윤복(徐潤福), 함기용(咸基鎔) 등이다. 이들은 서울 돈암동의 손기정 자택에 차려진 합숙소에서 생활했다. 매일 6시에 기상, 돈암동 거리를 벗어나 개운사(開運寺)를 거쳐 고려대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면서 아침 운동을 끝냈다. 그러나 이들의 아침 훈련에 동네에서 뜻밖의 항의가 들어왔다. 소란스러워 새벽잠을 설치게 되어 수면부족에 빠진다는 것이다. 합숙하는 선수들은 6시에 기상하면 마당 한구석에 세워진 기둥에 태극기를 올리고 애국가를 불렀던 것이다. 그 합창소리가 안면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항의를 받고 나서 애국가 합창은 새벽의식에서 생략됐다.

훗날 1947년의 보스턴마라톤을 우승하는 서윤복에 의하면 보급회 합숙소에 들어가 세끼의 식사를 하는 것은 합숙소 생활 중에 겪은 커다란 즐거움이라고 했다. 손기정은 아침이면 자전거로 시장을 보러 나가 그날 필요한 식량을 모두 구입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부인과 함께 조리해서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손기정은 조리솜씨가 좋아 그가 만들어내는 음식은 꿀맛이었단다.

합숙소에서의 훈련은 고되었다. 보급회 강사인 손기정이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훈련 방침은 “연습에서 울고 경기에선 이겨서 웃어라”라는 것이었다. 1950년의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한 함기용은 허벅지 근육을 키우기 위해 겨울철의 산타기 훈련에서는 피오줌을 누어야하는 훈련을 매일처럼 계속했단다.

마라톤 보급회는 유망후보 합숙훈련 외에 손기정의 올림픽 제패를 기념한 단축마라톤을 조선일보사의 후원을 얻어 1947년부터 해마다 8월 9일에 광화문~오류동간 왕복코스에서 펼쳤다. 이 대회에서도 양정중학의 이원복 등의 유망주 여럿을 발굴했는데 1949년까지 세 차례의 대회를 치렀으나 6.25 전쟁으로 1950년 이후 마라톤 보급회와는 인연이 끊기고 말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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