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에 시를 읽는다 | ||
바로 그날, 프랑스 일각에서는 ‘새해를 축하하지 말고 그것에 저항하자’는 시위가 벌어질 모양이다. 늙는 게 진절머리 나는 시민들이 세운 계획이라고 했다. 영국의 유력지 ‘인디팬덴트’가 우정 보도했다니 틀림없다. 지난해 프랑스 남부 낭트에 생긴, 이름 한번 거창한 ‘새해반대전선’이 주체다. 두건과 마스크를 쓰고 기자회견을 한 이 단체의 지도자는 말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지구와 우리가 무덤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간다는 뜻’이라고. ‘이 비극을 기뻐할 이유가 없다’고. 노년의 황당한 우스갯짓에 불과하지만 조직을 만들어 거리로 나서는 실천적 발상이 놀랍다. 가사 자체 만으로는 세계의 어떤 국가(國歌)보다 전투적인 ‘라마르세예즈’의 격정마저 연상케 한다. 피아간 사정은 엄청 다르되,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예로 고려장 시절의 우탁(禹倬)을 들 수도 있을까.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읊었던 그의 희작( 作)을 생각하면서. 백발쯤이야 요즈음 세상엔 아무 것도 아니다. 염색으로 ‘신장개업’이 수시로 너끈하다. 눈이 부시게 가꾼 ‘독야백백’의 머리를, 러닝 머신 등으로 제법 매끈해진 노안이 받쳐주면 더욱 근사할 테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평균 수명이 높아지는만큼 아이를 낳지 않는 추세가 갈수록 심해 노년은 속이 편치 않다. ‘시집 안 가겠다’는 노처녀의 큰소리와 ‘어서 죽어야겠다’는 늙은이의 엄살을 공인된 거짓말로 치는 사회에서, 전자의 호언은 어느덧 참말로 굳어 간다. 반대편의 독신남도 늘었다. 여론은 그때마다 20년 30년 후의 고령화사회 걱정으로 땅이 꺼진다. 언제는 다섯 젊은이가 일로(一老)를 건사해야 한다더니, 최근엔 셋이서 부양해야할 지경이라는 것이 당겨 쓴 비관의 골자다. 안 그래도 공짜표를 받기 위해 지하철역 창구에 손을 내밀 적마다 조금 미안하고, 대여섯이 늘어섰을 때는 많이 어색했다. 한데 이제는 모든 청춘남녀의 눈치에도 신경을 쓰게 생겼다. 그렇다고 근천은 떨어 무엇하리. 부끄럽게 산 지난 날들을 새삼 돌이키며, 지지난해 입적하신 봉암사 조실(祖室) 서암스님이 열반송을 묻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할 시간이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이르신 오도송을 감히 떠올린다. 다시 찾아 읽는 시인들의 짧은 시 몇몇 편 역시 세밑에는 한결 따뜻하게 다가온다. 체험을 앞지르는 천재가 있을 거나 세월을 능가하는 스승이 있을 거나 빛바래고 사그라지고 병도 들어 불편도 하지만 맘 놓고 늙자 늙어를 가자 눈물 도는 두 눈 눌러를 감고 깊이 그리고 오오래 감사하자 오늘은 오늘만큼 늙어서 고맙다고 고마운 줄 알게 되어 더욱 고맙다고. (유안진「오늘만큼의 축복」전문.) 황지우 시인의「늙어가는 아내에게」끝 연(聯)은 어떤가.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어떻게 살았는가도 물론 중요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너에게 묻는다」전문.) 고단한 생을 견디다가 되찾은 고향길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김사인「코스모스」전문.) 마지막으로 고은의 석 줄짜리 시「헤어질 때」를 빌어 2006년을 보내야겠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이 말이 이 세상 전체를 아름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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