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국내파’ 김지하(66) 시인이 최근 세계여행기를 출간했다. 제목은 『예감』. 미국·아시아·유럽 등지를 돌며 그가 감지한 인간과 신, 역사와 미래의 통찰과 예지를 묶어 냈다. 책 5분의 1이 미국 얘기다. 출간에 즈음해 연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미국 얘기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에겐 ‘콤플렉스의 극복’이었기 때문이다. <본지 8월 15일자 2면> 이를 두고 논란이 뜨거웠다. 심지어 “김지하가 맛 갔다”는 원색적 비난까지 나왔다. 사실 그가 이런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 출옥 후 생명운동에 몰두했을 때도,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지던 91년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칼럼을 기고했을 때도 그랬다. 일산 자택에서 만난 그가 처음 꺼낸 말도 요즘 자신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기자에게 대뜸 “미국 얘기한 것 가지고 인터넷에서 욕하고 있다던데, 그건 가라앉았나”라고 물었다. 이어 그의 생각을 찬찬히 풀어갔다. 말이 차분하고 나직했다. 그리고 길었다. -왜 소위 ‘친미발언’을 했나. “나를 친미파라고 하는 표현은 가당치 않다. 주변 정세 치고 한국처럼 괴상한 나라가 없다. 남북이 찢어진 데다 4강이 붙어 있으니. 반미가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국을 믿는 것도, 일본을 무조건 나쁜 놈들이라 보는 것도 잘못이다. 이 복잡한 작은 동네를 활용할 수 있어야 우리가 평화 속에서 제대로 먹고산다.” -‘김지하가 변했다’는 말도 나온다. “과거 난 반미라고 앞에 내세워 미국을 욕한 것은 아니다. 당시 학생운동·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의 일반적 담론은 제3세계론, 미국의 경제적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자주적인 민족경제 발전과 민주화와 관련해 미국에 비판적 태도를 갖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이후 제3세계론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이제 동아시아론이 중심이 됐다. 이 입장에서는 미국이란 존재가 재평가돼야 한다. 덮어놓고 제국주의·식민주의라고 말을 꺾어버릴 차원은 아니다.” (그는 도리어 “올 초 반미·반FTA 난리하다가 평양과 워싱턴이 가까워지자 싹 죽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신문명, 네오 르네상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한국과 미국인가. “미국은 과학, 한국은 사상에서 잠재력이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만남이다. 과거의 문화유산을 여는 열쇠는 현재의 철학적 입장이다. 중국의 경우 유산은 풍부하지만 현재적 입장이 부족하다. 짝퉁이나 만들고 역사 왜곡이나 하고 있지 않나. 일본은 과거의 콘텐트도 부족하지만 침략국가라는 부채가 있다. 한국이 가능성 높다.” -500여 쪽에 달하는 이번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난 10년간 곳곳을 떠돌며 한국과 아시아 르네상스의 도래를 봤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해발 1500m 이상 고도의 산정호수에 형성된 고대도시의 시장이었다. 사원 앞 시장은 성(聖)과 속(俗)이 어우러진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시장경제의 교환 가치를 인정하면서 평등과 복지를 위한 호혜의 가치를 살릴 길이 거기 있었다. 혼돈에 처한 인류문명의 활로를 그곳 신시(神市)에서 찾았다.” -해외에 나가지 않아 ‘최후의 국내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번 책에서 그 이유에 대해 “조국의 민주화를 기다려야 했고 집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라고 썼다. “과거 민주화운동 하던 이가 해외에 가면 조국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정부를 욕하거나 칭찬해야 했다. 밖에서 자기 조국에 대해 시비 거는 것은 내게 맞지 않았다. 안에서는 싸우더라도 밖에 나가서는 칭찬은 못할지언정 주의는 하는 게 성숙한 자의 태도라 봤다. 그러니 나갈 수가 없었다.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 문제지만 과거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셈이다. 우리의 삶은 지구적인 삶이다. 바깥으로 나가 크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오기로도 읽힌다. <중앙일보> 김지하는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1970년대의 김지하는 ‘오적(五賊)’과 ‘타는 목마름으로’의 김지하였다. 각각 70년 『사상계』와 75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발표된 두 시는 그를 반(反)독재 투쟁의 ‘뜨거운 상징’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김지하는 구속과 석방, 도피와 재구속을 반복해야 했다. 유신정권이 끝난 80년에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고, 84년 사면 복권됐다. 80년대부터 김지하는 ‘생명사상’에 몰두했다. 동학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한 ‘율려사상’ ‘신인간운동’을 주창했다. 시에서도 격정과 의분의 외침 대신 축약과 절제, 관조가 두드러졌다. ‘저항시인’ 김지하의 이러한 변화는 ‘변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더 크다.” 91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란 글은 그를 둘러싼 갑론을박의 정점이 됐다.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래 열병처럼 번지던 운동권의 분신 투쟁을 나무란 이 글로 그는 완전히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명당하는 등 진보 지식인 그룹에서 소외됐다. 하지만 주위 반응이야 어떻든 김지하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 ▶본명 김영일 ▶1941년생 ▶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75년 ‘제3세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터스 특별상 수상 ▶81년 세계시인대회 ‘위대한 시인상’,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영남대·명지대 석좌교수 |
황석영 "그래도 글을 안쓰면 못 견디니까 계속 썼어"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리얼리즘의 문학가, 소설가 황석영을 만나다
▶ 지금 자녀가 어떻게 되세요?
3남매입니다. 아들 둘에 딸 하나에요.
▶ 만약에 그 아들이 그랬다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다행이 우리 아들은 저 같지 않고 정서가 안정되어 있어요.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저보고 청룡열차라고 해요.(웃음) 우리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세요. 제가 자살 미수도 3,4번 했잖아요. 그때마다 살려놓고.그 다음에 베트남 가려고 특수교육대 앞에 차량을 타고 훈련을 받으러 가는데 거기에 민간인이 올 곳이 아닌데 삼거리에 어머니가 와서 기다리고 계세요. 베트남 간다고 어머니께 말씀을 안 드렸거든요.
▶ 베트남에는 왜 가시려고 하셨어요?
군대 신체검사에 3번을 안 갔어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안 갔더니 파출소에서 잡으러 오더라고요. 그 달에 나가는 게 뭐가 있나 봤더니 해병대가 있어서 거기에 자원입대해서 간 거예요. 그때 미스코리아 심사하듯이 3군데를 사람을 세워놓고 뽑아요. 학력도 좋고 풍채가 좋으면 의장대와 군악대, 헌병대를 뽑는 거예요. 이게 3대 골병대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기합이 세거든요. 그래서 떨어진 곳이 헌병대에요.
헌병학교 가서 교육받고 배치 받은 곳이 진해 헌병대인데 거기 가서 교통정리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진해 사령부에 근무를 했는데 그때는 가난할 때니까 파견대장 했던 사람이 직업군인이니까 중사쯤 됐어요. 그 사람이 기름을 빼서 팔아요. 나는 졸병이니까 시키는 대로 통과시켰죠. 그런데 그게 걸렸어요. 이 사람이 와서 나는 여기 말뚝이고 처자식도 있는데 어떡하냐, 너는 졸병이니까 졸았다고 해라. 그래서 졸았다고 했죠.결국 영창을 살다가 파병하는데 특수교육대에 가서 교육받고 그대로 베트남으로 갔어요.포항에 있는 특수교육대 앞에 어머니가 서 계시더라고요. 영화장면처럼 차가 달리는데 좇아오시는 거예요. 난 정말 어머니 이야기 나오면 할 말이 없습니다.
▶ 그 당시에 뭐가 그렇게 황석영 선생님을 자살로까지 가게 했을까요?
뭘 채울 수 없는 허기라고 해야 할지, 도달할 수 없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글을 계속 썼죠. 1년에 몇 편씩은 썼어요. 쓰지 않으면 못 견디니까요.
▶ 그때가 데뷔를 하셨던 때였나요?
그렇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상계 신인상을 받았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그러고 나서의 일입니다. 고등학교 때 가출도 당선 이후에 한 일들입니다.그리고 그 후에 다녀와서도 대학 재학 시절에 6.3사태가 났을 때도 노량진 경찰서에 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붙잡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징역을 보내지 않고 구류를 살렸어요. 경찰서 유치장 구류로 사는데 제 2한강교 교각공사 하러 나왔다가 술 먹고 십장을 폭행한 노동자가 하나 잡혀왔는데 그 사람이 해병대 출신이더라고요. 갈매기 3개를 대위로 바꿔서 별명을 붙였는데 본인도 대위래요. 「삼포가는 길」과 「객지」의 모델이 되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래서 그 사람과 남도를 떠돌았어요. 이때가 대학생이니까 군대 가기 전이에요.이를 테면 삼포가는 길 같은 경우는 우리가 신탄진 연초장 기초공사할 때 한 방에 있다가 비도 오고 구질고 임금도 밀리고 하니까 튀었어요. 조치원에서 청주까지 가는 길이 60여리가 되는데 이 길이 옛날에 참 아름답던 길이에요. 옆에 강 비슷한 개울이 흐르는 길을 오후부터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때 비가 왔는데 소설에는 눈으로 바꿨어요.
▶ 재미있는 게, 사람들이 삼포가 어디에 있는 곳이냐고 물어보죠.
삼포는 지상에 없는 장소입니다. 사실 고향이라는 게 지상에 없죠. 그 전에 갔던 공간은 이미 아니니까요.
◇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원고, 결국엔 인정해 주셨어
▶ 어머니가 소설 쓰시는 것을 안 좋아하셨다고요.
밥 못 먹을까봐. 의사라든지 실용적인 직업을 택해라. 외삼촌이 용렬한 사람이지만 외삼촌을 가리키면서 난리 통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의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글 쓰고 소설 쓰면 룸펜밖에 더 되느냐고요.(웃음)내가 원고를 써서 습작을 하면 불구덩이에 집어넣으셨던 적이 많아요. 그런데 그 뒤에 내가 학원문학상도 받고 사상계 신인상도 받고 할 때마다 그래도 인정을 안 하시더니 다 연로하셔서 광주에서 마지막 몇 해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때 장길산을 쓸 때였는데 농촌경험이 없으니까 호남을 택해서 내려가서 있었어요.아침에 신문이 오면 장길산을 연재한 연재물을 돋보기를 쓰고 오리고 계세요. 스크랩해서 붙이셨어요. 그걸 보면서 이제는 어머니가 생업으로 인정을 하셨구나 생각했죠.
▶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어요?
80년 광주항쟁이 끝나고 그 해 겨울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감옥 가는 걸 안 보시고 가셔서 다행입니다.(웃음)그런데 광주민주화 항쟁이 초창기에 터질 때 제가 서울로 도피를 했는데 합동수사본부에서 잡으러 왔거든요. 신발 신고 7,8명이 마루에 들어오니까 어머니가 나와서 그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는다고 “이 놈들아, 신발 벗어라.” 그러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북 평양 분이시기 때문에 아주 대단하셨거든요.
▶ 황석영 선생님의 첫 작품이 뭐였어요?
세상에 처음 나온 게 「입석부근」이고 그 다음에 나온 게 「탑」이라는 소설이었어요.그리고 중간 중간 썼던 게 재고품이 되었다가 데뷔한 뒤에 사이사이에 나오게 되죠.
◇ 넌 ‘세수 안 한 사슴’이고 난‘억울한 사슴’이야
▶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쓰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탑」부터였어요. 본 이름이 황수영인데 그건 여자이름이잖아요. 빼어날 수, 꽃뿌리 영인데 완전히 여자이름이라서 놀림이 되었어요. 동생이름은 수웅이고요.제 원래 본명은 수남이에요. 빼어날 수, 사내 남, 이게 일본이름이잖아요. 옛날에 여자들한테는 ‘자’를 붙이고 남자들 이름은 ‘웅’, ‘남’ 등 일본식 이름이 많아요. 그대로 호적에 올렸다가 남으로 내려와서 다시 올리면서 수영으로 바꿨다고 그래요. 아버님의 소박한 생각으로는 수영이와 수웅이를 합치면 영웅이 되니까 그러신 것 같아요. 하지만 수영은 여자이름이에요. 그래서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제가 지었어요. 수영이보다는 석영이가 발음이 더 좋고 한자도 예쁘고 해서 제가 지었죠.
▶ 황석영 선생님은 정말 끼가 많으세요. 배우로 무대에 서시겠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옛날에는 많이 그랬죠. 연극도 많이 했어요.고등학교 때 이순재 선배가 학교에 와서 지도도 하고, 저도 연극반에 가서 활동도 했어요. 그랬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글을 쓰다가 대학교를 가더니 연극반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더라고요.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이 생겨요. 민주화운동을 하는데 문학 쪽에서 할 일이 많다고. 김지하 형과 같이 처음 그걸 개척해서 마당극이니 현장극이니 이런 것들을 하게 되죠.
처음에 같이 하다가 김지하 형이 민청학련 사건 이후로 장기간 구속되면서 모여 있던 후배나 친구들한테 후사를 석영이한테 맡긴다고 해서 맡게 된 거예요. 지금은 다 50이 넘었는데 그 세대가 저하고 같이 일을 했죠. 당시에 대학교에서 문화 1세대에요. 화려한 휴가를 제작했던 유인택씨, 이 사람이 2세대정도 되죠. 장선우 감독, 탈하는 부산대학교 최희완 교수, 임진택, 노래하는 김민기 등등 이 사람들이 1세대에요.
▶ 황석영 선생님의 말솜씨를 두고 사람들은 ‘황구라’라고 하는데, 말씀 잘 하시는 건 어머니 쪽인가요, 아니면 아버님 쪽인가요?
경복중학교에 갔더니 애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고 공부도 잘 하는 것 같아요. 주목을 끌 일을 해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주목을 끌 수 있겠구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한 게, 아이들 말로 히트 칠 문구를 생각해 낸다든가 교실 등교를 해서 문을 열 때 아이들이 와르르 웃어야 직성이 풀렸어요. 지금은 손녀도 생기고 하니까 인품이 잡혀서 광대의 비극적 아우라 하고는 거리가 있거든요.(웃음)
▶ 지금은 김훈 선생님한테 자리를 좀 뺏기시는 것 같아요.
김훈은 피리 부는 소년이거든요. 그 친구는 보면 늘 문어체로 말을 해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꼭 옛날 일기장에 보면 오늘의 명언 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런 식으로 보통 때 말을 해요. 너는 말씨 좀 고치라고, 평소에도 문어체로 말을 하냐고 그래요.요즘 자기의 모토는 ‘단정하고 경건한 노인네가 되자.’래요. 단정함은 자세를 이야기하고 경건은 마음가짐, 노인네는 연륜을 표한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야, 이 사람아.”(웃음)
▶ 예전에는 여성 팬들도 독점하고 계셨는데요.
아니에요. 제 별명이 스스로 ‘억울한 사슴’이에요. 나는 사슴인데 여성분들은 저를 야수로 알아요. 그래서 억울한 사슴이에요. 우리 후배 중에 김훈이 질투하는 상대가 있는데 김훈보다 조금 아래에요. 시인 김사인이라고 있는데 본인이 사슴인 줄 알아요. 오빠부대가 많았는데 지금도 있을 거예요. 노래를 시키면 아주 나직하게 천천히 동요를 정감 있게 부르니까, 늘 보면 쓸쓸하고 먹여주고 싶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괘심해서 별명을 지어줬어요. 너는 세수 안 한 사슴이라고, 그냥 사슴이라고 하면 억울하잖아요. 그리고 나는 억울한 사슴이라고 하고.(웃음)
그런데 김훈 이 친구는 옛날부터 서울내기 버릇이 있어요. 마초와 같은 위압적 자세를 취하면서 말을 해요. 예를 들어 여자가 좀 터진 옷을 입으면 “어 거, 꿰매 입어라.” 이런다든지.(웃음) 그래도 내가 이 친구를 보고 참 좋다 싶은 건 올해 환갑인데도 청년 같아요. 지금 저 나이에 잊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 다행한 일이다 싶어요. 거의 그 나이 또래들이 물러앉아서 동사무소에서 “여러분, 오늘은 노인들을 위해서 설렁탕을 준비했으니 모두 한 분도 빠짐없이 모여주세요.” 그런 방송을 동네에서 듣는다는 거 아닙니까.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는 거 보면 참 다행이다 싶은데 요즘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몇 번 혼을 냈는데 그러고 나니까 사방에 다니면서 형님 다음에 자기라고 그런대요.(웃음)
◇ 지금도 부엌 쟁탈전, 요리는 수준급
▶ 황석영 선생님 하면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요즘에는 뭘 좋아하세요?
날이 갈수록 특별히 맛있는 것이 없네요. 그리고 다 맛있어요.옛날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요. 지난번에 후배인 윤한봉이 죽었다고 그래서 나와는 형제 같은 친구인데 파리에 있는 동안 부음을 들어서 미처 오지 못했다가 이번에 새삼스럽게 망월동에 가느라고 잠시 들렀었어요. 상원이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여학생 박기순하고 영혼결혼을 시키면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는데, 박기순의 오빠가 윤한봉의 누이동생과 결혼해서 사는데 그 친구는 건설회사도 하고 성공했어요. 그런데 내가 왔다고 하니까 떡 벌어진 한정식 집에 갔어요. 가정식으로 드시겠느냐고 해서 그러자고 해서 그때 옛날식 굴비를 지져놓은 걸 처음 봤어요.그걸 또 녹차 얼음물에 밥을 말고 굴비 지진 것하고, 적당히 땅에다 묻어놓은 열무김치 삭인 거 조금하고 묵은지를 먹었는데 옛날에 먹던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던지 한 그릇 반을 먹었어요. 과식하면 속이 답답한데 어떻게 맛있게 먹었는지 두 시간 있으니까 금방 꺼지더라고요. 속이 참 편했어요. 요새 그런 음식이 좋습니다.갈치 새끼처럼 생긴 갈치포를 조린 걸 물에 말아서 먹는 음식들하고 짭짤한 마늘지에다 된장에 재워놓았지만 깨끗한 깻잎, 얼마나 맛있습니까.
▶ 요즘도 직접 음식을 하시나요?
그럼요. 부엌 쟁탈전을 매일 벌이죠. 집 사람은 부엌 더럽힌다고 뒷정리도 깨끗이 못한다고 하는데 깨끗이 한다고 하는데 부엌 권리를 안 내어주네요. 런던이나 파리에 있을 때도 직접 만들어 먹었어요. 국수는 종류별로 한국 것부터 파스타까지 다 해요.
▶ 북한에 가셨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뭐였어요? 언 감자국수라고 있다고요?
문익환 목사님과 몇 번 본 다음에 나 혼자 김일성 주석과 점심을 몇 번 같이 했는데 국수가 보니까 새까맣더라고요. 여기에도 칡으로 냉면을 만들잖아요. 북에서는 그걸 언감자 국수라고 하는데, 그 분 말씀으로는 일제시대 때 그 지역 사람들이 독립군들에게 식량을 직접 전달을 못 하니까 산등성이에 감자를 묻어놓고 표시를 해 뒀대요. 그러면 소위 보급투쟁을 나가서 캐 오는데 언 땅 속에 있었으니까 감자가 다 얼어있을 거잖아요. 먹는 방법을 몰랐는데 강원도 화전민 출신의 병사가 언 감자를 녹말을 내려서 국수를 뽑는 방법을 알고 있더래요. 그걸 뽑아서 눈 녹인 물에 말아서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점심에 국수를 뽑아서 콩국에 말고 검은 깨를 뿌리고 그 위에 함경도 들갓을 얹는데 북쪽지방의 갓김치는 젓갈을 안 넣고 고추, 마늘 등의 양념만 해서 맛이 아주 담백하고 깨끗했어요. 들갓이 작은데 그걸 콩국수 위에 놓는데 콩국은 하얗고 국수는 까맣잖아요. 또 검은 깨를 뿌리고 들갓은 초록이고. 그걸 아주 맛있게 먹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와 늘그막에 두 분이 친하게 지냈던 모양인데,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독일에서 오셨으니까 얼린 감자로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처음이라고 하더래요.언감자 국수가 굉장히 찰기가 있어요. 우리는 그게 아릴 것 같은데 찰기가 있고 맛있습니다.
▶ 노티는 뭔가요?
노티는 약과의 일종인데 약과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기장쌀이라고 남쪽에는 없는데 북쪽에는 조하고는 조금 다른데 조하고 그 사이에 뭐가 있어요. 그 기장쌀을 가루로 만들어서 엿기름에 넣고 섞어서 잰 것을 적당히 발효시킨 다음에 참기름에 노릿하게 지져요. 이것을 꿀에 잰 과자 같은 간식이에요. 그러고 항아리에 재어놓고 두고두고 먹는 거죠. 이건 평안도 음식이에요. 어디서 들으니까 개성에서도 노티라는 이름으로 있다고 하더라고요.
◇ 리얼리즘의 최고봉, ‘소설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 바리데기 소설도 나왔고, 다음 계획은 어떤 게 있으세요?
9월 20일까지 여러 일정을 국내에서 소화한 다음에 돌아가서 청산하고 짐 싸가지고 나와야죠. 10월 말이면 완전히 귀국을 합니다.
▶ 시골에 가서 사시겠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래서 몇 군데 보고 있어요. 시골에 정착을 해서 들어앉아서 작품 쓸 일밖에 더 있겠어요. 작품의 소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요. 계획한 것의 절반도 못 썼어요.(웃음)
▶ 작품 쓰실 때 특별한 버릇 같은 게 있으세요?
제일 나쁜 악습이 담배를 많이 피우고 밤을 새운다는 건데 담배피우는 걸 중지하면 한편으로는 작품이 제대로 나올까 하는 염려도 있지만, 담배를 끊고 작품을 시작했다는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지 않을까 해서 담배를 끊고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 글 쓰는 것 외에 좋아하는 취미는 뭔가요?
젊은 때는 다른 게 있었겠지만 요즘은 글 쓰는 시간 이외에 산책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파리에서도 집 근처 숲까지 걸으면 15분 정도 걸리는데, 가서 2시간 정도 숲 속을 걸어 다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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