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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이야기

한글사랑---------/우리말바루기

by 자청비 2007. 8. 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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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 이야기

조재수
(겨레말큰사전 편찬실장)

 

 사전 이야기에서 ‘낱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단어’ 대신 ‘낱말’을 쓰기로 한다. 사전에 다루어 싣는 말을 ‘올림말’이라 하는데, ‘표제어’, ‘등재어’라 하는 이도 있다. ‘표제어’는 제목말, ‘등재어’는 올려 싣는 말이니 ‘올림말’과 비슷한 용어다. 사전의 주된 올림말은 낱말이다. 낱말 이상의 것으로 숙어, 속담도 있고 낱말 이하의 것으로 토·말끝(어미), 접두사·접미사 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올림말은 낱말이다. 접두사·접미사를 최현배 선생은 ‘앞가지·뒷가지’라 하였고, 북에서는 ‘앞붙이·뒤붙이라 한다.
 ‘낱말’이란 글자 그대로 낱낱의 말이다. 낱말은 일정한 뜻을 가지고 따로 설 수 있는 말의 낱덩이다. 그래서 낱말은 말(언어)의 가장 작은 표현 단위가 된다. 아이가 처음 말을 익힐 때도 낱말부터 띄엄띄엄 말한다. 누구나 첫 국어 공부는 낱말 공부였다. 아무개가 말을 많이 안다는 것도 바로 낱말을 많이 익히고 있다는 평가다. 요즘 관심을 끄는 우리말 실력 겨루기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주로 낱말 알아맞히기를 하고 있다. 국제 정치판에서는 낱말 하나를 놓고 협상이 되기도 하고 판이 깨지기도 한다.
 낱말에도 짜임새가 있다. ‘옷, 밥, 집’ 같은 한 소리마디(음절)로 된 간단한 것에서부터 ‘넉점박이각시꽃하늘소’나 ‘헐레벌떡헐레벌떡하다’처럼 여러 소리마디로 된 복잡한 짜임새들이 있다. 낱말을 만드는 요소로 ‘형태소’라는 것이 있다. 일정한 소리와 뜻을 가지는 가장 작은 말의 조각(형태)을 형태소라 한다. 형태소에는 뿌리(어근·어간), 어미, 토(조사), 접미사, 접두사들이 있다. 뿌리 형태소에는 ‘먹었다’의 ‘먹-’이나 ‘밝다’의 ‘밝-’처럼 자립적이지 못한 것도 있고, ‘얼’, ‘말’, ‘글’과 같이 자립적인 것도 있는데 이렇게 따로 설 수 있는 뿌리 형태소는 곧 기본 낱말이기도 하다. 형태소가 이어져 낱말을 만들고, 낱말이 이어져 말마디(어절)를 만들며, 말마디가 이어져 한 문장을 만든다. 낱말은 문장을 이루는 기본 요소로서 한 문장 속에서 주어=임자말(‘아이’가), 목적어=부림말(‘글’을), 서술어=풀이말(‘읽는다’) 등으로 일정한 노릇을 한다.
사전 편찬에서 중요한 일거리가 형태소와 낱말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밝히는 일이다. 우리말의 낱말 수는 얼마나 되며, 형태소의 가짓수는 얼마나 될까? 사전을 통하여 낱말의 수는 몇 만, 몇 십만으로 잘 알려지는데 형태소의 수량을 밝힌 통계는 없다. 이는 우리말의 형태소를 샅샅이 챙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형태소 사전이 없다. 그러면, 형태소의 결합에 따른 우리 낱말의 유형을 살펴보자.
 한 형태소로 된 낱말에 ‘물, 불, 쌀, 구름, 하늘, 고사리’ 같은 것이 있다. 둘 이상의 형태소로 된 낱말에는, (ㄱ) 뿌리와 뿌리가 합친 ‘달-밤, 밤-낮, 늘-푸른-나무, 오르-내리-다, 검-붉-다’ 들이 있고, (ㄴ) 뿌리에 접두사가 붙은 ‘헛-일, 짓-밟-다’ 들과 / 뿌리에 접미사가 붙은 ‘높-이, 사랑-스럽-다’ 등이 있다. 뿌리와 뿌리가 합쳐진 낱말을 ‘합성어=합친말’이라 하며, 뿌리에 접두사·접미사가 붙어서 된 낱말을 ‘파생어=가지친말’이라 한다. 낱말에도 일정한 갈래가 있다. 사람의 지혜는 일찍이 세상의 온갖 사물을 그 성질과 모양 등에 따라 갈라볼 줄 알았다. 사물 현상을 나타내는 수많은 낱말도 그 특성에 따라 갈래를 지을 수 있었다. 이른바 ‘품사’라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께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가 처음으로 여덟 가지 품사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최현배: 우리 말본>. 일정한 뜻을 지닌 수많은 낱말이 각각 어떤 형태적 특성이 있으며, 문장에서 어떤 구실(기능)을 하는가에 따라 나눈 갈래가 품사다. 우리의 학교 문법에서는 명사, 대명사, 수사, 동사, 형용사, 관형사, 부사, 감탄사, 토(조사)로 분류해 온다. 최현배 선생은 낱말이 말의 씨라는 뜻으로 ‘품사’를 ‘씨’라 하여, 이름씨, 대이름씨, 셈씨, 움직씨, 그림씨, 매김씨, 어찌씨, 느낌씨’라 하였다. 사전 편찬에서 품사에 대한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품사의 특성에 맞게 말을 풀이하고 바른 쓰임새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각 품사에 대한 설명은 지나가기로 한다.
 겨레의 삶이 그렇듯이, 한 언어권에도 말은 세월 따라, 지역 따라, 또 사람과 직업 따라 차이가 있다. 옛말의 ‘사랑하다’에는 ‘생각하다’ 뜻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다. 요즘의 ‘개미’라는 말은 단순히 벌레만이 아니다. ‘일반 투자자, 소액 투자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지도 오래다. ‘마당발’은 볼이 넓은 발이기도 하고, 발이 너른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역어로는 행정 구역상의 각 도의 토박이말, 국토의 분단으로 말미암은 남녘·북녘의 달라진 말들이 있다. 또 중국 속의 조선말과 옛 소련 지역의 고려말 등 나라 밖 동포의 모국어도 챙겨야 할 지역어다. 사람에 따라 속된말을 잘 쓰는 이가 있고, 노름꾼·소장수·심마니·죄수 같은 특정 집단인에게는 저들끼리 주고받는 변말(은어)이 있다. 요즘 젊은 세대의 인터넷 통신 언어도 일종의 변말이라 할 수 있다. 또 각종 전문 학술 분야의 용어는 오죽 많은가.
 낱말에도 질과 양이 있다. 일반적인 것(일반어)과 특수한 것(전문 용어), 규범적인 것(표준어/문화어)과 비규범적인 것(사투리), 어려운 것과 쉬운 것, 전통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들이 있어 낱말의 품격과 분포를 서로 달리한다.
 낱말 하나하나에도 깊이와 넓이가 있다. 각 낱말의 의미와 쓰임의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낱말에는 한 가지 뜻뿐인 것도 있고, 여러 뜻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같은 부류의 말인데도 ‘흙’은 흙 이외의 딴 뜻이 없는데, ‘땅’에는 여러 뜻이 있다. ‘땅’은 지구의 겉면(‘땅 속’), 논이나 밭(‘땅을 부치다’), 영토(‘독도는 우리 땅’), 곳이나 지방(‘고향 땅’, ‘만주 땅’) 등으로 넓게 쓰인다. ‘가다, 오다’나 ‘먹다’ 같은 말은 열에서 스무 가지 이상의 뜻갈래가 있다. 이처럼 낱말에는 기본뜻이면서 일반적인 뜻에 머무는 것, 또는 비유나 상징적으로 널리 번져 쓰이는 것들이 있다. ‘여물다’의 쓰임을 보자.
 ‘날씨가 좋아 열매가 잘 여물고’, ‘아직 뼈가 여물지 못한 어린 몸’, ‘가을이 감빛으로 여물고’ <조정래: 태백산맥>, ‘일이 잘 여물어 간다’ 들에서 각각의 ‘여물다’는 뜻바탕이 다르면서 품사로는 자동사로 쓰였다.
‘전 선생은 말끝을 여물자 술을 다시 따르라 하였다’ <이기영: 봄>에서 ‘여물다’는 타동사로 쓰였다.
 ‘여문 알사탕’, ‘손끝이 여물다’, ‘씀씀이가 여물다’, ‘아침부터 햇볕은 여물었다’ <유주현: 하오의 연가>, ‘실개천 물소리도 제법 여물다’ <이무영: 제1과 제1장> 들에서 ‘여물다’는 모두 형용사로 쓰였다. 세 가지 문법 형태에다 쓰임의 갈래가 여러 가지다. 그 쓰임새를 간추려 보면, 물리적이거나 자연현상적인 것, 사람의 행동 양상, 일의 진행 정도 등으로 뭉뚱그릴 수 있다. 어떤 낱말이 번져 쓰이는 깊이와 넓이에 관해서 일정한 법칙을 끌어 내기란 쉽지 않다. 언어 행위 곧 말의 표현이란 사람마다의 창조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사전 편찬인은 이러한 말의 쓰임새를 간추려서 갈래를 짓고 그 뜻과 문법적 바탕을 밝혀 주는 일을 주로 하는 연구자들이다.
  낱말의 갈래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낱말들을 문법적 특성에 따라 품사별로 나눈 것은 앞에서 보았다. 낱말들을 소리나 의미의 관련성에 따라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소리가 같은데 뜻이 다른 낱말이 있다. ‘눈’, ‘말’, ‘배’에는 각각 세 가지 이상의 다른 뜻의 낱말이 있다. 이런 말들을 한자 용어로 ‘동음이의어’라 한다.
 뜻이 같거나 비슷한 낱말도 있다.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을 이윤재(1888~1943) 선생은 ‘같은말’, 한글 학회 우리말 큰사전에서는 ‘한뜻말’, 북에서는 ‘뜻같은말’이라 하고, 한자 용어로는 ‘동의어’라 한다. ‘옥수수·강냉이’, '옷·의복·입성’, ‘감·재료’, '말본·문법' 등은 뜻이 같은 명사들이다. 뜻은 같은데 품사를 달리하는 것도 있다. ‘모자라다’는 동사인데 ‘부족하다’는 형용사다. 일반적으로 뜻바탕이 일치하는 말이면 동의어라 한다.
  뜻이 비슷한 말을 우리말 큰사전에서는 ‘비슷한말’, 북에서는 ‘뜻비슷한말’이라 하고, 한자 용어로는 ‘유의어’라 한다. 뜻이 꼭 같은 말보다는 뜻이 비슷한 말이 훨씬 많다. '가게·상점', ‘값·가치’, ‘껍데기·껍질’, ‘궁둥이·엉덩이·방둥이’, '가난하다·구차하다·궁하다·애옥하다', ‘끝내다·끝맺다·마치다·마감하다·마무르다’, ‘마침내·드디어’ 따위는 각각 비슷한 말이다. 가게와 상점은 둘 다 물건을 파는 곳이지만 규모면에서 상점이 큰 것이 일반적이다. ‘상품의 값’, ‘상품의 가치’에서 보듯, ‘값’에 비하여 ‘가치’는 학술 용어로 더 잘 쓰인다. ‘꽁지’는 보통 새의 꼬리를 가리킨다. ‘궁둥이’는 엉덩이의 아랫부분으로 앉으면 바닥에 닿는 부분, 엉덩이는 볼기의 윗부분, ‘방둥이’는 짐승의 엉덩이<문세영>를 가리킨다.
 이처럼 비슷한 뜻바탕에서 차이 나는 바탕을 가려내어 표현하는 능력이 사전 편찬인에게는 중요하다. 비슷한 말무리를 잘 정리하면 각 언어의 낱말 특성과 분포를 알 수 있다(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함). 한 올림말에 비슷한 말을 모아서 보이는 사전이 ‘비슷한말/유의어 사전’이다. 또 ‘비슷한 개념 사전’이라 하여 영국 사람 로제(Peter Mark Roget. 1779~1869)는 영어 시소러스(Thesaurus 보물 곳간)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미국 웹스터 칼리지에이트 시소러스는 비슷한 말과 반대말 사전을 겸하는 사전이다.
 낱말끼리는 뜻이 반대되는 것도 있다. '남자 : 여자', ‘삶 : 죽음’, '있다 : 없다'처럼 둘 사이에 중간 대상이 없는 것과, '위 : 아래', '크다 : 작다', ‘더위 : 추위’처럼 중간 대상이 있는 것이 있다. 둘 사이에 중간 대상이 없는 반대개념을 논리학에서는 ‘모순개념’이라 한다. ‘젊다’와 ‘늙다’는 반대말이긴 한데 ‘젊다’는 형용사고, ‘늙다’는 ‘늙는다, 늙어 간다’에서 보듯 주로 동사(자동사)로 쓰인다. ‘젊는다’는 말이 안 된다.
 논리학이나 분류학의 개념 나누기에 유(類)와 종(種)이 있듯이, 낱말에도 전체와 부분 관계에 있는 말, 또는 같은 갈래에 딸린 또래말들이 있다. ‘생물’의 아랫갈래에 ‘동물’과 ‘식물’이 있고, 식물의 아랫갈래에 ‘나무’가 있으며, 나무의 갈래에 소나무, 감나무 등의 온갖 나무들이 있다. 이런 관계에 있는 낱말을 ‘계열어’라고도 하는데, 이를테면 ‘꽃’이나 ‘바람’을 나타내는 낱말이라든지, 물소리 ‘졸졸’이나, 햇빛의 ‘반짝’에 어감이 ‘큰말과 작은말’, ‘여린말, 센말, 거센말’ 같은 것이 있다. 이런 큰말과 작은말 따위는 비슷한 말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 술집의 종류로 군치리, 날밤집, 내외술집(안침술집), 니나놋집, 다모토릿집, 대폿집, 매밋집, 목로술집(목로주점), 받힘술집, 방석집, 선술집, 옴팍집, 주막 등이 사전에 올라 있다.?
다른 품사끼리도 밀접하게 어울리는 낱말이 있다. 명사 ‘꽃’은 동사 ‘피다’나 형용사 ‘붉다’ 등과 어울려 한 문장을 만든다. ‘짓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낱말은 ‘옷, 밥, 집’, ‘약’, ‘농사’, ‘글, 노래’, ‘이름’, ‘웃음, 표정’ 등이다. 이처럼 각 낱말에는 문법적으로 꼭 어울리는(선택하는) 낱말들이 따로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끼리 어울려서는 말이 안 된다.
 낱말은 각 겨레의 삶터와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독특하게 발달한다. 각 겨레말에서, 어떤 부류의 낱말수는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며 드물기도 하다. 아랍어로 낙타를 설명하는 데 쓰이는 용어가 5~6천이나 되는데 낙타의 모양, 크기, 빛깔, 나이 및 걸음걸이에 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점을 표현한다. 또 미국 인디언 언어에는 걸음걸이라든가, 때리는 행동에 대해 무척 많은 말을 볼 수 있다 <에른스트 카시러: An Essay on Man>(최명관 옮김). 몽골 사람들은 말을 색깔에 따라 부르는데, 그 색깔들을 나타내는 말이 거의 100가지나 된다 <람스테드: 일곱 차례 동방 여행>(고송무 옮김). 오아시스 주변 거주민들은 야자수를 나이, 크기, 수확력 등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60개 이상의 낱말을 가지고 있다 <레오 바이스게르버: 모국어적 중간 세계의 의식화>(허발 옮김). 시베리아의 소수 민족어 어웡키말에는 눈을 가리키는 낱말이 30가지나 되며, 사슴과 관련된 낱말은 무려 500가지 이상이 된다. <권재일: 퉁그스 말겨레> (한겨레. 2007. 3. 30.)
 우리말에는 어떤 분야의 어휘가 발달하였을까? 우리 겨레는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와 금수강산이라 일컫는 복된 땅에서 살아온다. 봄꽃, 여름숲, 가을단풍, 겨울눈 등 좋은 자연을 두루 누리며 산다. 또 들과 바다에서 갖가지 물산을 거두어 살았다. 그래서 우리말의 낱말도 골고루 발달해 온 것으로 판단하고 싶다. 그런데 어떤 이는 지적하기로, 우리말에는 감각어는 풍부하나 관념어는 부족하다 하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사물의 소리나 모양을 그려 내는 의성어(소리흉내말)와 의태어(짓흉내말) 같은 낱말이 무척 많은 것을 들어 감각어의 발달로 볼 수 있겠고, 철학 용어 등의 학문 용어에 토박이말이 잘 안 쓰이는 데서 관념어의 부족을 말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일본 조총련 산하 조선어 연구회는 1971년에 올림말 약 4,000 단어의 <조선말 의성의태어 사전>을 낸 적이 있고, 일본 학자 靑山秀夫가 1991년에 약 9,000 어휘의 <조선어 상징어 사전>을 낸 적이 있음을 밝혀 둔다.
 지적한 대로 우리말에 감각어가 풍부하다는 것은 우리 겨레가 섬세한 감각력을 우리말로 잘 나타낸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에 관념어가 부족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관념적인 지식이나 사유하는 능력이 모자랐거나, 아니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우리말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이른바 관념어라 할 우리의 학문 용어를 되돌아보면 대부분 중국, 일본,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전통 학문과 사상과 이념이 있었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말과 글은 우리 것이 아닌 주로 한자와 한문이었다. 대부분의 학문 용어는 한자의 옷을 입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영어 용어가 더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말로 학문 용어를 만들면 안 되는가? 우리 지식인들 가운데는 일본 사람이 서양말을 번역한 용어는 그대로 받아 쓰면서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우리 학자가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지어 쓰면 어색해 하는 이가 많다. 일본이나 중국 학자는 그들 식으로 외국 용어를 번역해도 되고, 우리는 우리말 식으로 번역하여 쓰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서, ‘사전’은 ‘말모이’나 ‘말거울’이 되지 못하고, ‘문법’은 ‘말본’이 되지 못했으며, ‘명사·동사’는 ‘이름씨·움직씨’가 되지 못하였다. '기체’를 ‘김몬’, ‘고체’를 ‘굳몬·얼음몬’, ‘액체’를 ‘묽몬·물몬’, ‘시계’를 ‘때알이’, ‘그녀'를 ‘그미’라 하는 것은 어색하다고 돌아보지도 아니하였다.
어느 나라고, 말은 민중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태어나며, 또 전문 지식인들이 생각하고 다듬고 하여 지어 쓰게 된다(일본, 중국에서처럼). 우리말로 된 학문 용어를 늘리기 위해서는 우리 민중들의 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우리 식으로 말을 다듬고 짓기도 해야 한다(일본, 중국의 지식인들처럼). 우리에게 그러한 낱말 만들기의 능력이 없었거나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한자말이나 서양말만 학문 용어로 적합한 언어는 아닐 것이다. ‘존재’, ‘무’, ‘인식’이라야 되고, ‘있음’, ‘없음’, ‘앎’은 되잖은 말일까?
 마무리하면서 글 한 단락을 인용한다.

 단어들이 각기 다른 의미로 나타나는 삶의 형식들을 비트겐슈타인은 ‘말게임’이라 부른다. 말게임은 그들이 각기 다른 뜻으로 말해지는 구역들이다. (중략)
비트겐슈타인이 이해하는 철학의 과제는, 사색이 언어가 쳐놓은 함정들에서 벗어나도록 보살피는 일이다. 전통에서 전해진 철학적 문제들의 엄청난 혼란에서 구원하는 길은 말게임들을 밝히고 묘사하는 데 있다.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그냥 공중누각일 뿐이다. 우리는 말이 서 있는 그 바탕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최종적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순수하게 ‘기술(記術)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단어들의 사용을 서술하는 것이다. <빌헬름 바이셰델(안인희 옮김): 철학의 에스프레소, 32. 철학의 붕괴 혹은 비트겐슈타인(끝부분)>

 전통적인 철학의 허구를 지적하면서 바르게 철학하기를 논한 내용이다. 우리에게도 와 닿는 말이 아닌가? 지금도 철학 강의에서나 석학들의 글에서 느끼는 일이다. 그 알 수 없이 어렵기만 한 용어와 베껴 온 이론들 말이다. 철학뿐이 아닐 것이다.
 낱말! 언어의 중심이면서 철학의 중심이기도 하다. 우리 낱말과 용어로 우리 철학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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